<혈통이 깡패임 1화>
1화 혈통이 대단함
“죄송하지만 더 이상 남아 있는 D등급 던전은 없어요.”
이른 아침, 헌터 협회에 도착했을 때, 이한울은 직원에게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어제 대전 서구에 발생한 D등급 던전의 입장권을 발급받았는데요.”
헌터가 던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협회가 판매하는 입장권이 필요하다.
입장권을 미리 확보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이한울은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기본을 잊을 만큼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아, 그거 말이죠. 죄송하게 됐네요. 이한울 씨보다 더 필요하신 분께 먼저 발급이 됐어요.”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먼저 신청한 사람이 있는데. 그걸 멋대로 취소하고 다른 사람에게 발급을 했다고요?”
이한울의 항의에 직원은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짜증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이한울에게 말했다.
“그래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있잖아요.”
“사과하면 끝입니까?”
“그럼 새로운 D등급 던전이 나타나면 이한울 씨한테 가장 먼저 입장권을 지급할 게요. 됐죠?”
“협회에 항의할 할 겁니다.”
사원이라면 누구나 식겁할 수밖에 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직원은 비웃음만 지을 뿐이었다.
“이게 어디서 내려온 지시인 줄 알아요? 위에서 직접 하달된 명령이에요.”
이한울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지?
“아이언펭 알죠? 거기 길드 마스터의 차남이 경험을 쌓는데 필요하다고 D등급 던전을 구해달라고 협회에 부탁했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D등급 던전은 요즘 매물이 부족하잖아요.”
“설마 그래서 제가 예약한 던전을 넘겨줬다는 겁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려니 하세요.”
이한울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직원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아들었으면 이만 나가 보세요. 바쁜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 * *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이한울은 야외에 마련된 벤치에 엉덩이를 붙였다.
“더러운 놈들. 누가 협회 업계의 암덩어리 아니랄까봐.”
한국의 협회가 으레 그렇듯 헌터 협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리, 부정, 상위 길드와의 결탁.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이었으나 협회의 영향력이 워낙 커서 아무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이번 던전을 공략하려고 내가 들인 돈이 얼마인데.”
이번 던전을 공략하기 위해서 이한울은 빚까지 냈다.
어쩔 수 없었다. 지난번 던전 공략 때, 재수 없이 위험한 몬스터를 만났고, 모든 장비가 망가졌기 때문이다.
22년을 살면서 배운 기술이라고는 헌터짓밖에 없기에 이제 와서 다른 일을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빚을 내서 장비를 대여하고, 필요한 약품을 구입했다.
“이거 큰일이네. 다른 던전을 갈 수도 없는데.”
던전 난이도는 D급이 최하위. 더 낮은 던전은 없다.
하지만 직원이 말한 대로 요 근래 들어서 D급 던전의 출현이 확 줄었다. 이한울도 며칠을 기다려서 간신히 D급 던전의 입장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C급 던전을 가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이한울은 자신의 수준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빚을 어떻게 갚지.”
이렇게 한탄을 하는 동안에도 이자는 계속 쌓이고 있을 터.
이한울은 잠시 생각하는 그만뒀다. 그저 멍하니 도시를 바라봤다.
“아빠! 나 오늘 문제집 다 풀었어!”
“우리 아들 수고했네! 이따 맛있는 거라도 먹을까?”
손을 잡고 길을 걷는 부자가 보였다. 아빠가 장난스럽게 볼을 꼬집자 아들이 꺄르륵 웃었다.
이한울은 뭔가에 홀린 듯이 두 부자를 따라 계속 시선을 옮겼다.
“좋겠네.”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는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22년이라는 세월을 고아로 지난 이한울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보육원은 좋은 곳이었지만 가족의 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만으로 18세가 되던 날, 이한울은 반강제로 보육원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다행히 이한울에게는 헌터로서의 자질이 있었다. 이한울은 먹고 살기 위해서 헌터 업계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이한울이 가지고 있는 자질은 굉장히 미천했다. 삼류 헌터 수준밖에 안 되는 이한울을 데려갈 길드는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이한울은 2년이 지난 지금까지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다.
“아이언펭의 차남께서 내 던전을 가져갔다고 했지.”
아이언펭.
대한민국 1위에 빛나는 거대 길드.
그런 곳의 차남으로 태어나면 얼마나 많은 특권을 누리고 살 것인가.
그리고 그 특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짓밟힐 것인가.
“하여간 높으신 분들은 죄다 밥맛이라니까.”
겨우 3류 헌터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이한울은 이 업계에서 3년을 버텼다.
그렇기에 헌터 업계가 얼마나 더러운지 잘 알고 있었다.
“……빈자리라도 구하러 가야겠군.”
간혹 클랜이나 길드에서 급하게 헌터를 구할 때가 있다.
고용주 헌터들의 비유를 맞춰줘야 하는 게 흠이기는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뭐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게다가 헌터는 던전에 들어가야지만 강해질 수 있다.
돈이 없다고 일용직을 구하는 것보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던전에 들어가는 게 훨씬 나았다.
이한울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날 때였다.
그때 이한울의 앞에 자동차들이 멈춰 섰다.
보통 차량이 아니었다. 고위 정치인들, 재벌들을 대상으로만 극소량의 경호 차량을 생산하는 ‘OGMG’ 회사의 자동차였다.
한 대에 수십억은 가뿐히 넘는다는 최고급 차량이 한 대도 아니고 열 대가 넘게 줄지어 섰다.
차량의 문이 열리고 정장을 입은 경호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을 본 순간, 이한울은 경악했다. 개개인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소름끼칠 정도로 강맹했기 때문이다.
경호원들이 모두 내리고, 마지막으로 중앙에 있던 차량에서 젊은 여성이 밖으로 나왔다.
깔끔하게 다려진 슈트와 정장 바지. 어깨까지 자른 단발. 수수한 차림임에도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여성은 이한울이 있는 쪽으로 또박또박 걸어왔다.
처음에 이한울은 여성이 도중에 방향을 바꿀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여성은 이한울의 앞에 멈춰 서서는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이한울 님이 맞으시죠?”
이한울은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여인을 훑어봤다.
누구둔지 벌건 대낮에 최고급 승용차와 열 명이 넘는 경호원을 데리고 오면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그쪽은 누군데 남의 이름을 멋대로 알고 있는 겁니까?”
“저는 흑천 그룹에서 나온 주하연이라고 합니다.”
“흑천 그룹?”
이한울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흑천 그룹이 어떤 곳이던가.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대기업이다.
아니, 기업 수준이 아니다. 흑천 그룹이 보유하고 있는 자본, 그리고 군사력은 대국과 맞먹는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대한민국 1위 길드 아이언펭조차 흑천 길드의 앞에 서면 티끌보다 더 하찮았다.
“그렇게 대단한 곳에서 나한테 무슨 볼일입니까? 설마 스카웃 제의라도 하시려고?”
“아, 그건 아니에요.”
“그렇겠죠. 흑천 그룹에서 뭐 하러 나 같은 삼류 헌터를 데려가겠어요.”
이한울의 입가에 자조적인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럼 무슨 볼일입니까? 심심해서 길을 물어봤을 리는 없고. 바쁜 사람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말하세요.”
“이한울 님, 부모님에 대해서 기억하고 계십니까?”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이한울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앗다.
“설마 지금 시비 거는 겁니까?”
“이한울 님의 아버지는 흑천 그룹의 회장 권선우 님의 차남 권천님이십니다.”
실로 오랜 만에 이한울은 안면의 근육이 딱딱하게 굳는 것을 경험했다.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가 아닙니다.”
“헛소리 맞네. 나는 어릴 적부터 보육원에서 자랐어요. 그런데 내 아버지가 그런 대단한 사람일 리가…….”
“권천 님께서는 오래 전에 흑천 그룹을 나와서 잠적하셨습니다. 그 이후, 결혼을 하시고 이한울 님을 낳으셨죠.”
주하연은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갔다.
“권천 님과 아내분께서는 불행히도 병환으로 사망하셨습니다. 이후, 이한울 님께서는 보육원에 맡겨지셨죠.”
말문이 막혔다.
이한울은 한참 동안 입가를 매만졌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흑천 그룹에서는 오랫동안 권천 님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최근이야 두 분이 돌아가셨다는 것과 이한울 님의 존재를 알게 됐습니다.”
주하연이 이한울을 향해 다시 한 번 더 허리를 숙였다.
“이한울 님의 조부이시자 흑천 그룹의 회장이신 권선우 님께서는 이한울 님을 흑천으로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주하연이 차량을 가리켰다. 길게 나열되어 있던 경호원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이한울 님, 저와 함께 흑천으로 가시죠.”
이날, 이한울의 인생이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