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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혁과 태유준에게도 새 세상을 위한 역할이 부여되었다. 성수를 만들어서 각 벙커로 배달하는 일이었다. 물론 태유준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은 비밀에 부치고, 안에 특수 약품을 넣었다고 둘러댔다.
성수라는 무기를 손에 넣은 사람들은 용기를 얻었다. 지쳐 있던 자들의 마음속에 불꽃이 피어오르며, 벙커인들은 조금씩 인간의 영역을 회복해 나갔다.
원혁과 태유준은 매일 아침 성수를 만들었고, 오늘은 신용산 벙커에 들르는 날이었다. 물건을 받으러 나온 사람은 얄궂게도 창영과 효영 남매였다. 그들은 태유준을 끌어안고 울다가 웃다가, 또 오열하기를 반복했다.
내친김에 그들은 김은진의 가족도 만났다. 수척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모두가 무사히 살아 있음에 태유준은 감사했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져왔던 오빠의 후드티를 돌려주었다. 김은진의 오빠는 옷을 받아 들고 조금 울었다.
광화문 벙커에 들른 날은 태유준에게 있어 아주 특별했다.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내려 배달이 힘들기도 했고, 광화문에 간다는 사실에 마음도 어수선했기 때문이다.
광화문 벙커에는 원혁과 태유준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룹 3으로 분류돼 배척받던 자들은 화들짝 놀라며 두 사람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다른 사람들도 그때 살아남게 해 줘서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신부님. 무사하셨군요…!”
김은진은 태유준을 보자마자 눈물을 터뜨렸다.
“은진 씨 덕분에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태유준은 주저앉아 우는 그녀에게 위로를 건넸고, 조만간 가족과 조우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말은 점차 현실이 되어 갔다.
두 사람이 배달하는 성수는 그 탁월한 효과로 널리 소문이 퍼졌다. 물탱크에 손을 담가서 좀비를 해치웠던 경험을 통해, 태유준은 성수를 희석해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적당량의 성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희석해서 양을 불릴 수 있었다.
성수는 경찰과 군대 조직에도 흘러들어 갔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민간인이 만들어서 벙커에 뿌리고 있다는 소문에 그들은 원 출처를 알아내려 애썼지만, 결국 두 사람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다만 좀비와의 전쟁에 요긴하게 성수를 사용했을 뿐이다.
때로는 수 마리, 때로는 수백 마리와 전투가 벌어졌다. 군인, 경찰, 시민 할 것 없이 좀비와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 과정에서 물론 희생도 뒤따랐지만, 그래도 인간은 더 이상 어두운 지하에 숨어 지낼 필요가 없었다.
낮을 빼앗기고 밤으로 도망쳐야 했던 인간이, 아주 조금씩 자신의 것을 수복해 나가고 있었다.
겨울의 끝 무렵, 부활한 정부는 서울 시내에 남아 있는 좀비 숫자를 추산하여 발표했다. 지방으로 넘어간 좀비 숫자도 지속적으로 통계를 냈다.
10만 마리.
9만 7천 마리.
7만 마리.
…
5천 마리 추산.
사람들의 핸드폰에는 매일 재난 문자가 울렸다. 하루하루 줄어 가는 좀비의 숫자를 보며 시민들은 힘을 냈다. 국가 기관도 기업도 다시 일터를 개간해 나갔다.
아주 조금씩, 느리지만 확실한 방향을 잡고 사회는 평화를 되찾아 나갔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모두가 있는 힘껏 노력했다.
장 박사의 치료제가 완성된 것은 3월의 어느 날, 봄을 알리는 비가 쏟아지던 오후였다. 전 언론은 장 박사의 기자 회견을 실시간으로 생중계했다.
“이제 이 약만 있으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치료와 예방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약이었기에, 다시는 공포에 떨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장 박사는 약의 레시피를 원혁의 ‘노 모어’에 넘겼다. 다시 악한 자가 술수를 부려 약을 전매하는 일을 방지코자 함이었다. 원혁은 기꺼이 미국의 생산 공장을 풀가동해 한국인들에게 보급할 약을 생산하기로 했다. 평생 먹고도 남을 만큼, 아주 풍족하게.
약은 노약자와 기저 질환자, 청소년, 성인들에게 골고루 분배되었다. 사람들은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검찰은 장 박사를 기소했다. 장 박사는 기꺼이 법정에 출두했고, 어떤 구형이 내려져도 항소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장 박사가 이 사태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실 폭로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적당한 선에서 처벌되지 않겠냐는 언론의 예측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4월 초, 오늘. 반쯤 복구된 공항에서 오랜만에 마이애미행 항공편이 재개되었다. 승무원도 승객도 들뜬 모습으로 공항 내를 활보했다.
―마이애미행 GF915편 항공기가 곧 출발합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탑승 게이트 7번으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마이애미행 GF915편 승객 중 아직 탑승을 하지 않은 고객님께서는 서둘러 게이트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장내에 벌써 두 차례의 방송이 울려 퍼졌지만, 원혁은 대기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7번 게이트 앞에 서 있는 승무원이 그런 원혁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마이애미에 가는 것 같은데 왜 안 타지, 하는 시선이었다.
바로 어제까지 설득을 거듭했지만, 태유준은 한국을 뜨는 것을 쉽게 결심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혁을 따라 미국으로 가면 예비 사제의 길도 접어야 하니 그건 태유준의 근간을 흔들 법도 하다.
게다가 미운 정 고운 정이 든 익숙한 땅을 떠나는 건 어렵지. 그러니 내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국제 연애를 하는 수밖에 없나. 하지만 문득 보고 싶어질 때면 어떡하라고.
원혁은 진심으로 단 한 순간도, 앞으로의 삶에 있어서 일분일초도 태유준과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막판까지 설득을 해 보았건만 고집 센 애인은 끝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듯했다.
원혁은 다시 한번 시계를 보았다. 이제 곧 탑승 수속이 마감될 시간이었다. 이 비행기는 타지 말고 다시 유준이를 설득하러 가야 하나, 싶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원혁을 향해 달려오는 남자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태유준은 하얀 맨투맨을 입고 한 손에 가방을 들고 있었다.
“유준아.”
“…형.”
태유준이 원혁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원혁은 트렌치코트 앞섶을 활짝 열어 태유준을 확 끌어안았다.
“너 기다리다가 죽는 줄 알았다.”
품 안에 갇힌 태유준이 작게 중얼거렸다.
“농담으로라도 죽는다는 소리 하지 말라니까요.”
“알았어, 알았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활짝 웃었다. 처음과 다르게, 하지만 정해져 있던 미래대로.
* * *
마이애미비치의 햇빛은 눈부시다. 그 어떤 부정적인 생각도, 잡념도 날려 버릴 만큼 환하다. 그래서 태유준은 마이애미에 온 이후로 매일같이 바닷가에 나오자고 원혁을 졸랐다.
원혁은 애인의 부탁에 약했으므로, 번번이 태유준과 비치에 나왔다. 그리고 이렇게 선 베드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보고는 했다.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태유준의 얼굴과 상체에 쏟아졌다.
“역시 사람은 햇빛을 받으면서 살아야 해요.”
“그건 나도 동감이야.”
“예전엔 어떻게 햇빛 없이 살았지.”
“전생 같지?”
“솔직히 말하자면, 네.”
태유준이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밝은 대낮에 아름다운 푸른 바다와 바람에 살랑이는 야자수,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그에게 원혁이 칵테일 잔을 건넸다. 새빨갛고 노란 음료의 빛깔이 마치 일출처럼 보였다.
“이거 이름이 뭔가요?”
“데낄라 선라이즈.”
“선라이즈라, 뜻이 좋네요.”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셔 보니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태유준은 다시 한 모금 맛을 음미하면서 원혁을 보고 웃었다.
“맛있어요.”
“안주랑 곁들여 먹으면 더 맛있을 거야.”
“안주 시켰어요?”
“응. 저기 나오네.”
뒤를 돌아보니 비치 바의 직원이 쟁반에 접시를 받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스위트포테이토 프라이 시키신 거 맞죠?”
“맞아요. 맛있겠네요.”
“최고 인기 메뉴니까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서버가 접시를 원혁과 태유준 사이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올려 주었다. 태유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저기, 이거….”
“고구마.”
“칵테일에 고구마?”
“말했잖아. 처음 만났을 때 내 꿈이 세계 최고의 미인과 마이애미비치에서 칵테일 마시는 거라고.”
원혁이 씩 웃었다.
“그러면 제가 세계 최고의 미인… 아니,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 분위기에 고구마가 웬 말이에요.”
“너랑 구워 먹기로 한 고구마가 싹 나 버렸잖아. 그거 못 먹게 됐으니까 이거라도 먹어야지.”
태유준은 이마를 짚고 소리 내 웃었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자, 어서. 유준이 아 해.”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그러지 말고 얼른.”
원혁이 덩치에 맞지 않게 애교를 떨었다. 태유준은 파도처럼 시원하게 웃었다. 따뜻하고 눈부신 햇살, 아름답게 넘실대는 대낮의 바다가 그를 축복했다.
태유준과 원혁은 이제 밝은 빛 아래 살아간다. 다른 누구도 아닌,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였기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