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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92화 (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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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유준은 기꺼이 탱크 안으로 상체를 숙였다. 손이 닿을 듯 말 듯 수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과감하게 한 팔로 몸을 지탱하고, 전신을 탱크 안으로 던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허리까지 잠겼다.

탱크 안에 달린 사다리를 통해 빠르게 바깥으로 빠져나온 후, 그는 추위에 몸을 떨었다. 설탕물이 굳으며 온몸이 찐득해 불쾌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다 좀 뒤집어썼다고 죽지는 않을 것이었다.

“지금입니다. 파이프요!”

태유준이 외침과 동시에 원혁이 파이프가 갈라지는 곳을 향해 총을 쐈다. 그가 가진 마지막 한 발이었다.

탕, 소리와 함께 파이프가 파괴되었다. 천장에서부터 누수가 시작되어 강한 압력을 받은 파이프가 펑펑 터져 나갔다. 하늘에서 내리는 사이다 세례로 인해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컨베이어 벨트에 묶인 놈들은 잿빛 연기를 내며 타들어 갔다.

“꿰에엑!”

“꾸아아악!”

구속 벨트에 묶인 터라 좀비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됐어요!”

태유준이 크게 외쳤다.

“이제 이 공장 자체를 날려 버려야 해요.”

좀비는 해치웠으나 이 공장을 통째로 없애 버려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태유준은 공장의 뇌관이 어디일까, 어떻게 해야 이 공장을 무용지물로 만들까 고민했다.

“이때쯤 되면 이게 나와 줘야지.”

원혁이 품 안에서 사각형의 상자를 꺼내들었다. 상자의 크기는 반지 케이스만큼 작았으나, 은색 외관에 시뻘건 색으로 ‘DANGER’라고 쓰여 있어 심상치 않은 물건임을 짐작케 했다.

“이게 뭐죠.”

“시한폭탄.”

“네? 이런 건 어디서 났습니까.”

“남가도에서 주웠지. 높아 보이는 놈이 터뜨리려고 하길래 죽도록 패서 빼앗아 왔어. 이거 하나면 남가도 생산 기지가 다 날아갈 정도로 강력하다고 하니까, 욕심이 나서.”

원혁이 픽 웃었다. 태유준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었다.

“그렇다면 이 공장도 통째로 날릴 수 있겠군요.”

“응. 5분 뒤로 세팅하지. 어때, 그때까지 나갈 수 있지?”

“한두 번 달려 본 게 아닙니다.”

“역시, 유준이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니까.”

원혁이 케이스를 연 다음 안에 든 폭발체를 벽에 붙였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빨간 글씨가 번쩍이며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뛰어!”

원혁과 태유준은 생산 건물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바깥에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회장님이 어떻게 저런 꼴로….”

“말도 안 돼.”

그들은 바닥에 떨어져 죽은 좀비 1호와 회장을 보며 경악하는 중이었다. 마치 한 몸처럼 껴안고 죽어 있는 두 시신을 힐끗 쳐다본 태유준은 재빠르게 발길을 돌렸다. 원혁 또한 남자들 틈에 섞여 걷다가 태유준 옆으로 합류했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 공장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고구마 트럭을 목전에 둔 순간이었다. 맹렬한 굉음이 울려 퍼지며 화염이 터졌다. 주변의 초목이 흔들리고 땅이 울릴 정도로 강력한 진동이 뒤따랐다.

뒤를 돌아보니 공장은 불길에 휩싸여 시커먼 재를 뿜고 있었다. 원혁과 태유준은 결승선을 앞에 둔 육상 선수처럼 달렸다.

“끝내줬어.”

운전석 문을 열어 몸을 실으며 원혁이 소리 내 웃었다. 태유준도 조수석에 오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이런 일은 제 인생에 두 번 없을 거예요.”

“두 번 있으면 곤란하지.”

이렇게 살아 나왔으니, 두 번의 행운은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태유준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유준아.”

“네?”

“나 상 줘.”

“상이요? 무슨 상.”

“죽지 말자는 약속 지켰잖아.”

“그건 저도 지켰는데요?”

원혁이 태유준을 빤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잘됐네. 우리 서로한테 상을 주자.”

“어… 상을 주는 건 좋은데, 무슨 상이에요?”

“잠실 가서 몸으로 보여 줄게.”

“네? 안 돼요. 저 오늘은 못 해요, 힘들어, 안 돼!”

* * *

“상인지 벌인지 모르겠네.”

태유준은 침대에 엎드려 한숨을 쉬었다. 사이다 공장에서의 활약에 이어서 밤새 애정 행각까지 나누니 몸이 남아나지 않았다. 성취감과 뿌듯함이 엔도르핀을 생성해 주고는 있지만, 그래도 원혁은 간밤 너무했다.

그래도 이렇게 있으니까 좋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태유준이 원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깊게 잠들어 있는 남자에게는 이제 그 어떤 찝찝함도, 걱정과 고민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여유로움과 다정함, 그리고 유쾌함만이 그를 채우고 있을 뿐.

태유준이 원혁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원혁이 잠에서 살짝 깨어나며 잠긴 목소리를 냈다.

“우리 유준이 어리광 부리네.”

“네. 그러고 싶어요.”

“우리 조금만 더 잘까?”

“좋아요.”

“내가 말한 건 그 자는 게 아닌데.”

원혁이 태유준을 깔아 눕혔다. 태유준은 경악에 차 발길질을 했다. 저기, 세상 다 구해 놓고 내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 * *

해가 중천에 떴을 때, 두 사람은 느지막이 일어나 앞으로의 일을 토의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박사님께 일융 건을 말씀드려야겠죠?”

“그렇지. 장 박사가 있어야 치료제를 만들 수 있으니까 어차피 연락은 해야 돼.”

원혁은 머리 뒤로 깍지를 끼고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웃었다.

“드디어 박사랑 약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됐네.”

“여정이 좀 길었습니다.”

“그러게. 많이 길었지. 그래도 그 과정에서 이렇게 예쁜 애인을 얻었으니 이득이다.”

“…애인…이요?”

애인이라니. 태어나서 자신이 누군가의 애인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원래 신에게 자신을 바친 태유준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뒤집히고, 우연히 만난 이 남자와 생사를 함께하고 이제는 애인이라고 정의할 만한 사이가 되었다. 애인이라는 표현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막상 직접적으로 들으니 민망하기도 했다.

“애인이지, 그럼 우리가 친구야?”

“그, 그건 아닌데.”

“우리 갈 데까지 갔어. 사랑한다고 고백도 했고.”

“그…렇긴 한데요.”

“유준이 형 애인 하기 싫어?”

원혁이 능청맞게도 물었다. 태유준은 고개를 저으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부터 넌 공식적으로 내 애인이야. 알겠지?”

“애…. 알겠습니다.”

“애인, 해 봐. 우리 형아 유준이 애인이다. 나는 우리 형아 애인이다, 해 봐.”

“싫습니다.”

태유준은 짐짓 점잔을 빼며 슬금슬금 다가오는 원혁을 밀어 냈다. 그러면서도 얼굴에 띤 웃음은 지우지 못했다.

* * *

두 사람은 야음을 틈타 청담동 연구소를 찾았다. 장 박사는 원혁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살아 돌아왔습니까.”

“드라마 못지않은 사연이 있죠. 그보다는 일융 보스가 죽은 게 훨씬 드라마틱합니다.”

“일융…? 설마 천 회장이?!”

“그 노인네, 좀비 1호랑 같이 추락사했어요.”

원혁이 음료 공장에서의 일을 설명하자 장 박사는 충격과 놀라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원혁이 살아 돌아온 게 가장 놀랍다는 입장이었다.

“어떻게 좀비에 물리고도 멀쩡한 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유준이야 항체가 있었지만요.”

“저도 사실 그게 제일 궁금합니다.”

“흠… 자세한 건 검사를 해 봐야 알겠군요. 미스터 어빙, 당신 피를 좀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죠.”

장 박사는 원혁의 혈액을 채취해서 검사한 다음, 가설을 내놓았다.

“혹시 유준이의 항체가 옮겨 간 건 아닐까 싶은데요.”

“그게 가능합니까?”

“흠… 일반적인 일은 아니긴 합니다만, 유준이 체질이 워낙 특이해서 말이죠. 제 생각에는 특이 체질에 특정 변수가 합쳐져 일어난 일 같습니다. 가벼운 접촉으로는 불가능하고, 아주 밀접한 접촉을 통해 체액을 교류하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키스나 성적 접촉을 통해 점막끼리….”

장 박사는 거기까지 말하고 입을 닫았다. 옆에 앉은 태유준의 얼굴이 터질 듯 빨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박사님,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아… 그래. 그게 낫겠구나.”

장 박사는 헛기침을 하며 모른 척을 해 주었다.

“그나저나 이제 남은 건 치료제 완성뿐이군요.”

“그렇죠. 유준이의 혈액이 있으니 머지않아 개발이 끝날 거라고 생각은 합니다.”

“빨리 끝나길 바랍니다.”

태유준은 장 박사와 원혁의 대화를 들으며 지난날을 돌이켜 봤다. 가을부터 겨울이 다 끝나 가는 지금까지의 여정에 함께했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과연 무사할까. 벙커 안의 사정은 어떠할까.

“벙커….”

인터넷이 끊긴 지 오래이건만, 태유준은 습관처럼 브라우저를 열었다. 당연하게도 ‘벙커’ 사이트는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어? 재난 문자예요.”

[서울특별시 재난 문자]

이상 행동자들의 수가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기간 시설 복구 및 인터넷과 통신 재개가 빠른 시일 내 이루어질 예정이니 벙커와 자택에 계신 분들은 안전에 유의하며 대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정부에게서 도착한 문자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태유준은 한참 말없이 핸드폰만 쳐다보았다.

약속들이 하나둘 지켜지고 있다.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던 약속들이,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며칠 후, 간헐적이긴 했지만 인터넷 신호가 잡히기 시작했다. 정부는 포털 사이트에 사태에 관한 현황 보고서를 게재했고, 언론도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간 숨죽이며 100일을 견딘 자들은 ‘벙커’ 사이트로 몰려들어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넷과 전화조차 끊긴 나날이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한탄을 늘어놓는 자도 있었고, 세상이 원래대로 수복되길 염원하는 자도 있었다.

그리고 장 박사는 장문의 글을 준비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을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 어떻게 해서 좀비가 생겨났고, 사라졌고, 치료제가 개발될 것인지 낱낱이 알려야겠어.”

장 박사는 모든 비난과 법적 책임을 감수하겠다는 서두로 글을 써 ‘벙커’에 올렸다. 바이러스의 진실, 일융제약이라는 배경, 그리고 이제는 치료제를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네티즌 사이에서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이게 대체 믿을 수 있는 이야기냐. 공상 과학 소설이 아니냐 하는 비판이 뒤따랐다. 하지만 장 박사가 첨부한 몇 가지 증거 자료를 본 사람들은 장 박사의 글을 믿었다.

또한 비록 장 박사를 비난할지언정, 이 지옥 같은 시절이 저물고 새로운 페이지가 열린다는 사실에는 모든 이가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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