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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유준과 원혁은 담벼락 뒤에서 트럭을 주시했다. 곧 검은 옷을 입은 놈이 하나 내려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다음 한 모금 들이켰다.
“아, 담배 맛 죽인다.”
남자가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그의 시야각이 가장 좁아지는 순간이었다. 원혁이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남자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태유준이 남자의 입을 청테이프로 막았다. 원혁이 남자의 팔을 뒤로 꺾어 로프로 결박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남자는 패닉에 빠져 발버둥 쳤다.
원혁과 태유준은 남자를 질질 끌어다가 으슥한 곳에 숨겨 두고 트럭에 올라탔다. 트로이의 목마에 몸을 실은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은 후,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아까 봤던 트럭들의 동선을 그대로 따르며, 트럭은 공장 정문 방향으로 이동했다. 태유준은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전방을 살폈다. 혹시라도 경비병들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원혁은 이 역할극에 심취했는지, 끼어드는 트럭에 길을 양보하며 손을 흔드는 여유까지 부렸다. 그러자 상대 운전수가 고맙다고 수신호를 줬다.
“이 상황에서 그런 여유가 나오십니까.”
“연기를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하여간 형답네요.”
태유준은 1분에 한 번씩 짧은 기도를 올리며 간절하게 작전 성공을 빌었다. 그리고 첫 번째 관문, 경비병과의 조우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우선 차를 멈춰 세우라고 손짓을 한 다음, 플래시로 트럭 번호판을 살폈다. 그러고는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끄덕이더니 들어가도 좋다고 오케이 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원혁은 장난스럽게 경례까지 붙이며 경비병들과 인사를 나눈 다음 차를 전진시켰다. 길을 알지 못하니 요령껏 눈치를 보고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원혁은 앞서가는 차량의 뒤꽁무니를 쫓아갔다.
공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앞차가 멈추어 섰다. 주차 요원인지, 검은 옷 위에 야광 조끼를 입은 남자들이 형광 봉을 휘두르며 차를 정렬시켰다. 원혁과 태유준의 트럭에도 한 명이 따라 붙어 주차장 끝에 차를 대라고 명령했다. 원혁은 얌전히 지시를 따랐다.
공장의 전체적인 느낌은 남가도와 비슷했다. 분주하면서도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는 일꾼들,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트럭들. 다만 특징이 있다면 어디서도 좀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남가도에서처럼 셔터 문 바로 뒤에 좀비를 세워 놓는다든가, 얼빠진 채 걷는 좀비들을 총부리로 위협하면서 열을 맞추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좀비 특유의 퀴퀴하게 썩은 내도 흐릿하게만 나는 것으로 보아, 좀비는 바깥에 있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다. 태유준은 공장 생산동 쪽을 바라봤다. 바로 저 거대한 공장 안에 좀비가 우글거리는 게 아닐까. 태유준은 그렇게 의심하고 있었다.
“자자, 운반자들은 얼른 안으로 들어갈 준비 해. 줄 맞춰 서고!”
빨간 헬멧을 쓴 남자가 운전수들에게 외쳤다. 빨간 헬멧이 곧 관리 직급임을 알기에, 태유준과 원혁은 그를 예의 주시하며 운전수들의 줄 끝에 섰다.
“자. 차례로 따라 들어와.”
빨간 헬멧이 앞장서 걸었다. 태유준과 원혁은 부지런히 그를 따라갔다. 10여 분쯤 걷자, 메인 건물 격으로 보이는 큰 공장의 외관이 보였다.
“이제 생산 라인 들어갈 거니까 기피제 뿌려.”
“예.”
빨간 헬멧이 운전수들에게 기피제를 나누어 주었다. 원혁과 태유준은 능숙하게 기피제를 뿌렸다. 그런 다음 서로 신호를 주고받았다. 우린 천천히 가자. 원혁의 말이 옳았다. 맨 끝에 가야 무슨 일이 있어도 도망치기가 쉽다.
이제는 서로 눈빛만 봐도 말이 통했기에 별다른 대화는 필요 없었다. 두 사람은 남가도에서의 경험을 살려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빨간 헬멧을 필두로 운전수들이 하나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태유준과 원혁은 그들과 거리를 두고서 한 박자 늦게 건물로 진입했다. 그런데 뜻밖의 난관이 있었다. 경비병 두 사람이 원혁과 태유준을 막아선 것이다.
“이름과 소속 대.”
남가도와 달리 이곳은 경비가 철저했다. 신분 확인까지는 미처 예상하지 못한 태유준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버벅거린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팔꿈치로 냅다 남자의 명치를 가격했다. 그 옆에 서 있던 남자가 무전을 치려는 순간 원혁은 그의 손목을 중화도 칼등으로 내려쳤다.
“아악!”
“조용히 해.”
원혁이 남자들에게서 소총을 빼앗아 개머리판으로 그들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기절한 남자의 허리춤에서 무전기를 빠르게 빼낸 다음, 원혁과 태유준은 계단 쪽으로 미친 듯 뛰었다.
서너 층 정도 올랐을까. 건물 내에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젠장. 어떤 새끼가 봤나 보군.”
태유준은 무전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짐작대로 건물 내 침입자 발생, 즉시 소탕하라는 명령이 들려오고 있었다.
“어차피 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우릴 알아보긴 어려울 겁니다. 침착하게 움직여요.”
“좋아. 그러면 일단 잠깐만 몸을 숨기자.”
두 사람은 7층에서 비상구 문을 열어 복도로 샜다. 아래에서 쿵쾅쿵쾅, 위로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요란했다. 잠자코 기다리자 발소리가 작아졌다. 추격자들이 원혁과 태유준을 지나쳐 더 위층으로 올라갔다는 증거였다.
원혁과 태유준은 그대로 복도를 가로질러 반대편 비상구를 열었다. 이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새끼들 멍청하네. 건물에 계단이 두 개인데 한쪽만 뒤지면 어떡해.”
원혁은 숨이 차지도 않은지 놈들을 비웃으며 뛰었다.
“저희야 좋죠. 자, 빨리 올라가요.”
계단은 10층에서 끝났다. 공장치고는 높은 층수라고 할 수 있었다. 태유준이 생각해 보건대 이곳은 생산 설비가 아닌 사무 공간이 위치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음료수는 무겁기 때문에 무조건 1층에서 만들어 바로 출하하게끔 설계돼 있을 테니.
그렇다면 여기에는 일융의 우두머리가 자리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태유준은 긴장하며 비상구 문을 열어젖혔다.
복도 한가운데 경비병 두 명이 소총을 메고 왔다 갔다 하는 중이었다. 경비병들의 시선이 묵직한 나무 문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중요 인물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원혁과 태유준은 아무 말 없이 그들에게 걸어갔다.
“누구지? 우리 층 담당이 아닌 것 같은데.”
경비병이 의아해하며 원혁을 자세히 살피려 했다. 원혁은 그의 얼굴이 다가오기도 전에 시원하게 주먹을 날렸다.
“뭐, 뭐야!”
“너희 누구냐!”
남은 경비병이 방어 태세를 갖추며 원혁과 태유준에게 총을 겨눴다. 태유준은 망설이지 않고 그 총을 발로 찼다. 총을 떨구며 손목까지 제대로 얻어맞은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마무리는 원혁의 몫이었다. 그가 제 손목을 부여잡고 고래고래 악을 쓰는 남자의 턱을 힘 있게 후려갈겼다. 이로써 경비병들은 맥없이 쓰러진 허수아비 신세가 되었다.
“다 처리했군.”
“이제 거짓말을 좀 해 볼까요.”
태유준이 무전기를 들고 송신 버튼을 눌렀다.
“침입자들은 생산 라인에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모든 인원 생산 라인으로 집결하라.”
곧이어 알겠다, 지금 간다는 답신이 들려왔다.
“우리 유준이 제법이네.”
“저도 한다면 합니다.”
이제 두 사람의 눈앞에는 굳게 닫힌 문 하나가 남아 있었다. 아무런 명패도 없었지만, 안에 있는 사람은 분명 일융의 윗대가리일 것이었다.
원혁과 태유준은 다시 한번 시선을 교환하고 동시에 문을 밀었다. 문은 무척 묵직했지만, 잠겨 있지는 않았다.
문 안쪽은 평범하게 디자인된 집무실이었다. 통창을 통해 시커먼 밤 풍경을 바라보며 등을 돌린 한 남자가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태유준이 재빠르게 문을 잠갔고, 원혁은 남자에게 다가가 권총을 겨눴다.
“무슨 일이지.”
등을 돌리고 있던 자가 천천히 원혁과 유준을 향해 몸을 틀었다. 마주 본 남자는 머리가 하얗게 센 70대 노인이었다. 등이 굽고 몸이 여위었으나, 뿔테 안경 너머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어디서 왔나?”
노인은 안경테를 밀어 올리더니 값비싸 보이는 가죽 의자에 앉아 팔꿈치를 괴었다. 고풍스러운 데스크 위에 ‘일융제약 회장 천융건’이라는 명패가 반짝였다.
“어디서 왔으면 어쩔 건데?”
“하긴. 그건 문제가 아니지. 여기까지 왔다면 보통내기가 아닐 테니 그게 더 문제지.”
노인은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더니, 거만하게 턱을 치켜올렸다.
“원하는 게 뭔가. 말해 보게.”
태연자약한 노인의 태도에 태유준은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장본인이 바로 여기 있었다. 그런데 이 작자는 한술 더 떠 좀비를 생산하는 공장까지 차려 놓고, 저 뻔뻔한 얼굴이라니.
“당장 이 짓거리 집어치워.”
태유준이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이마에 자글자글 주름을 만들며 인상을 썼다.
“짓거리라니?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말투였다.
원혁이 회장 앞으로 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말장난하지 마. 이 공장 당장 폐쇄시키라고.”
노인은 그제야 알아들었다는 듯 픽 웃었다.
“아, 안 그래도 슬슬 생산은 중단하려고 했네. 구매자가 너무 줄어들면 곤란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