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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89화 (8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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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혁은 탈진한 태유준에게 입으로 물을 먹여 주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끝도 없이 귓가에 속삭여 주었다.

“난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줄 몰랐어.”

“…저도.”

“내 목숨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를 만나게 되리라고도 생각지 못했어.”

원혁이 태유준의 손에 깍지를 꼈다. 태유준은 홀린 듯 원혁의 손을 가져다가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간밤부터 정성스레 키스한 덕에 좀비에게 물린 흉터는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랑 같은 현상이 일어난 걸까요. 좀비에 물려도 아무렇지 않다니.”

“나도 이상하게 생각해. 특수 체질이 두 명이나 있고, 하필 그게 우리 둘이라는 건 확률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두 사람 다 의구심을 느끼는 부분이 이것이었다. 태유준이야 일찌감치 초능력이 발현하고 장 박사로부터 특수 체질을 진단받는 등 별난 사람이었다고 쳐도, 원혁은 아니었다. 육체가 강건할지언정 지극히 평범한 면역 체계를 갖추고 있을 텐데 어째서 원혁까지 좀비 바이러스에서 살아남았단 말인가.

“혹시 제가 가진 힘이 전파된 것 아닐까요?”

“그런가?”

“제가 머리 많이 만져 드렸더니 이제는 두통 없으시잖아요. 제 손에 신비한 힘이 깃들어 있기는 한가 보다 싶은데요.”

“아, 그렇네. 이제는 두통약 없이도 살 것 같아.”

“나중에 장 박사님 만나게 되면 한번 물어봐요. 꼭 짚고 넘어가야 찝찝하지 않을 거예요.”

“맞아. 지금 고민해 봤자 별 의미 없어.”

원혁은 태유준을 다시 품에 안으며 뺨을 비볐다. 장난스러운 키스가 오가다가 접촉의 수위가 점점 높아졌다. 질척한 소리와 함께 입술이 맞물렸다.

“이러고 평생 있고 싶다.”

“저도 그래요.”

두 사람의 마음은 하나였다. 힘들게 찾아낸 서로를 안고 영원토록 누워만 있고 싶었다.

하지만 태유준의 마음 깊은 곳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는 사명이 있다. 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니요, 한다고 해서 어떤 이득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이 개같은 세상을 끝장내는 데 한몫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것은 그가 성직자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

일융제약의 서울 공장의 위치도 대략적으로 파악해 두었고, 사태를 해결할 열쇠도 쥐고 있다. 그러니 자신이 움직이는 게 맞았다.

“유준아.”

“…네.”

“이대로 너랑 평생 끌어안고 있고 싶지만, 우리가 비밀을 알아낸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지?”

“맞습니다. 놈들의 서울 공장을… 파괴하고 모든 걸 끝장내고 싶어요.”

원혁 또한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이 마주치자 누구랄 것 없이 입술을 맞댔다.

“이래야 유준이지.”

태유준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남기며 원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두 사람은 침대에서 나와 옷을 갖춰 입었다.

“난 일융 놈들 처부수고 내가 치료제 생산할 거야. 그럼 돈방석에 앉겠지?”

“당연하죠.”

“돈 벌어서 우리 유준이 맛있는 거 사 줘야겠다. 그 김에 천국도 가고. 이거 괜찮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누구보다도 경건하게 변장할 검은 옷으로 갈아입는 남자. 품 안에는 이제 총알이 단 두 발 남은 총과 중화도가 있다.

“우리 유준이랑 같이 천국 가고 싶다.”

“같이 가야죠. 죽으나 사나 이젠 함께예요.”

“와, 너 이제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원혁이 짐짓 놀란 척을 했다.

태유준은 일전에 훔쳐 두었던 일융제약 놈들의 검은 옷을 꺼내 입었다. 목에는 묵주를 걸어 안쪽으로 집어넣고, 손으로 성호를 그었다.

“우리 약속해요. 형.”

“어떤 걸.”

“무슨 상황에서도 목숨을 제일 우선시할 것. 절대 죽지 말 것.”

“약속이 아니라 피의 맹세 같은데?”

“맞아요. 제가 그러고 싶어요.”

“그렇다면 기꺼이.”

원혁이 태유준의 손등에 짧게 키스했다. 맹세를 수락하겠다는 의미였다.

두 사람은 호텔방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섰다. 쿵- 하고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태유준은 다시금 이곳에 돌아오겠노라고 다짐했다. 지금은 잠시 낙원을 떠나는 것뿐이다. 나는, 아니 우리는 반드시 승리해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호텔 로비층으로 내려간 둘은 어두운 길가로 나갔다. 갓길에 주차된 트럭을 보고 원혁은 크게 반가워했다.

“내 트럭! 잘 있었구나.”

트럭을 껴안듯 양팔을 벌리는 원혁을 보며, 태유준이 입술을 삐죽였다.

“어떻게 된 게 저 만났을 때보다 더 반가워하시는 것 같습니다?”

“뭐야. 질투해?”

“아니거든요.”

“유준이 이리 와. 뽀뽀하게.”

원혁이 태유준의 입술에 짧고 장난스러운 키스를 여러 차례 남겼다. 기분이 풀린 태유준은 큼큼, 헛기침을 하며 짐칸에 배낭을 실었다.

“사이다는 이만큼 남았고요, 각목이랑 삽은 그대로 있어요.”

“돈가스 다지는 망치도 여전하네. 어? 고구마도 그대로다.”

원혁이 짐 더미에 깔려 있던 고구마 상자를 발견했다.

“유준아.”

“네?”

“여기 와서 이것 좀 봐.”

“왜요?”

“고구마에 싹이 났어.”

“뭐라고요?”

태유준은 제 눈을 의심했다. 이 엄동설한에 얼어 죽지 않고 싹을 틔우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이건 불쌍해서 차마 못 구워 먹겠다.”

원혁이 아쉬운 티를 내며 고구마 상자를 다시 덮었다. 태유준은 멍하니 종이 상자를 쳐다봤다. 상자의 뚜껑 틈으로 빼꼼, 푸른 싹이 돋아나 있었다.

이건 기적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태유준은 푸릇푸릇한 이파리를 보며 생각했다. 냉해로 죽어 가는 대신 싹 틔우기를 선택한 이 작은 생명처럼 세상도 되살아났으면 좋겠다고.

운전석에 오른 원혁은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운전대, 액셀, 클러치를 살피질 않나 대시 보드까지 열어 보았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다 그대로여서 좋다고 했다.

“오랜만이네. 자, 그럼 가 볼까.”

조수석에 오른 태유준은 말없이 웃었다. 자신도 원혁의 곁인 이 자리에 앉으니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았다.

곧 트럭은 시동을 걸고 밤 깊은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길거리는 이전보다도 더 시커멓게 멍이 든 모습이었다. 길거리의 방치된 시체 더미, 고장 나서 아예 작동하지 않는 가로등과 신호등, 불이 꺼진 아파트와 건물들.

디지털 단지 앞의 풍경도 음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트럭은 은밀하게 디지털 단지 내를 정찰했다. 장 박사가 말한 음료수 공장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주변부터 정찰한 다음, 골목을 굽이굽이 꺾어 조금씩 공장에 접근했다.

공장 입구로부터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운 다음, 두 사람은 드나드는 사람들과 차량을 살폈다. 새벽 1시가 되었을 무렵 안쪽에서 사이다 브랜드 마크가 선명한 트럭이 세 대 나왔다. 그러더니 약 30분 후 다시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다시 똑같은 번호판을 단 트럭이 나오는 것을 보고, 원혁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 세 대를 돌려쓰고 있네.”

“그런 것 같습니다.”

“일단 내려서 좀 접근해 볼까.”

원혁이 무기를 점검한 뒤, 차에서 내리려 했다.

“잠시만요.”

태유준이 그런 그를 붙들고 짧게 키스했다.

“아까 말했죠. 죽지 말라고.”

그러자 원혁이 키스를 되돌려 주었다. 더 깊고 진한, 끈적하기까지 한 입맞춤이었다.

“너야말로 죽지 마.”

두 사람은 시간 차를 두고 트럭에서 내렸다. 각자 좌측과 우측으로 나누어 공장 가까이 접근하니, 경비를 서고 있는 남자들이 보였다. 남가도에서 보았던 놈들과 똑같이 검은 옷 차림이었다.

태유준과 원혁은 시선을 교환한 다음, 조금 기다리자는 손짓을 하고 각자 맡은 구역의 동향을 살폈다.

태유준은 가로수 뒤에 숨어서 남자들을 살폈다. 입구 경비병들은 죄다 소총을 들고 있었고, 차량이 드나들 때마다 번호판을 꼼꼼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경비가 삼엄하네. 하긴, 남가도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 여기까지 안 전해졌을 리가 없지. 그렇다면 저 안으로 들어가기가 생각보다 힘들겠는데. 경비병 숫자도 많고.

고민에 빠져 있던 그의 옆으로 원혁이 다가와 소곤댔다.

“유준아.”

“네.”

“우리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하잖아.”

“그렇죠.”

“트로이의 목마 작전으로 가자.”

“네? 설마 트럭에 타자는 건가요.”

원혁의 의견은 트럭을 훔쳐 운전수인 척하고 안으로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요란하게 공격하며 쳐들어가 봤자, 수적으로 상대가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좋은 의견입니다. 그럼 운전수 하나 잡아다가 골로 보내죠.”

“우리 유준이 제법 컸네. 과격한 말도 할 줄 알고.”

“누구한테 배웠겠어요.”

태유준은 씩 웃은 다음 앞장서서 공장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거대한 공장 부지는 정문뿐 아니라 측면에 쪽문을 지니고 있었다.

“저기 담배꽁초가 잔뜩 있어요. 흡연 구역인가 봐요.”

태유준이 작게 속삭이며 쪽문 앞을 가리켰다. 흡연 구역에는 반드시 혼자 내지 많아 봤자 두세 명이 들러 무방비하게 담배를 피우기 마련이다. 그건 트럭 운전수들도 예외가 아니다.

숨어서 기다리기를 20여 분, 마침내 트럭 한 대가 그 앞에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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