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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87화 (8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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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에서 잠실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위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점프 슈트 좀비의 개체 수가 그사이 더 늘어난 것인지, 태유준은 놈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여야 했다.

가로등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좀비가 트럭 위로 쿵, 하고 떨어진 적이 있었다. 태유준은 순간 심장이 남아나지 않을 만큼 놀랐다. 급하게 차에서 뛰어내렸고, 트럭 짐칸에서 활개를 치는 좀비의 허벅지를 가위로 찔렀다. 좀비는 괴성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태유준이 더 빨랐다. 그는 허벅지에서 가위를 뽑아 망설임 없이 목덜미를 찔렀다.

육교를 지날 때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점프 슈트 좀비들과 일반 좀비들이 빈틈없이 빽빽하게 육교에 매달려 있는 꼴이 벌레 같았다. 태유준이 탄 차의 소음에 반응해 하나둘 비명을 지르며 낙하하는 모습도, 차가 빠르게 도망갈수록 죽어라 쫓아오며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모습도 다 역겨웠다.

그렇게 그는 좀비를 피해 시체, 버려진 차량, 부서진 간판과 온갖 잔해물들을 뚫고 돌아 돌아 잠실로 들어섰다.

“드디어.”

저번에 원혁과 왔던 때처럼 조심스럽게 행동하니 로비에 있는 좀비들을 깨우지 않고 무사히 진입할 수 있었다. 천장에 매달린 등이 깜박거려서 다소 불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그래도 계단으로 가는 길에 좀비를 마주치는 것보다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게 나을 듯했다. 좀비가 층 선택 센서에 카드 키를 갖다 대지는 못할 테니까.

손에 쥐고 있던 카드 키를 태그하고 최고층 버튼을 누르자, 금방 객실이 있는 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복도를 걸어 객실 문 앞에 선 그는 밀렸던 한숨을 내쉬었다.

“후….”

말도 안 되는 상상이지만 이 안에 원혁이 있었으면 했다. 원혁이 남가도에서 살아남아 자신처럼 난관을 돌파하고, 이 호텔에 도착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곳을 호텔이 아닌 천국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태유준은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묵직한 문이 열리고 객실 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태유준의 심장이 기대감과 불안감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썰렁한 공기와 함께 텅 빈 객실만이 태유준을 반겼다. 태유준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이전에 자신과 원혁이 묵고 나갔던 모습 그대로였다.

태유준은 새삼스레 아파 오는 왼쪽 가슴이 우스웠다. 무얼 기대한 걸까, 무얼.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걸어 침대에 쓰러졌다. 차가운 침대 시트를 움켜쥐고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온몸이 찝찝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곳까지 오면서 좀비들과 맞서 싸우느라 얼굴과 옷에 피가 튀기도 했다. 은근하게 올라오는 피비린내에 인상을 쓰며, 태유준은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갔다.

저번처럼 온수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나마 자신의 잡념과 슬픔을 씻어 내 주었으면 했기에 그는 망설임 없이 옷을 벗었다.

며칠 사이 많이 야윈 팔다리에 거품을 내고, 강박적일 만큼 여러 차례 머리를 감았다. 온몸을 다 씻고도 그는 말없이 물줄기를 맞았다. 안 그래도 흰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입술의 색이 지워질 때까지, 한참 동안 그러고 있었다.

지치도록 몸을 씻어 낸 그는 빨래를 할 힘이 없었다. 가방에도 어차피 새 옷은 없었기에, 태유준은 샤워 가운을 입고 목에 묵주만 걸었다. 차가워진 십자가를 손으로 꼭 움켜쥐며, 그는 스스로를 위해 침묵했다.

만약 이때 형제님이 있었더라면 아무것도 입지 않고 십자가만 걸친 날 짓궂게 놀렸겠지. 머리를 말려 준다면서 퍽 다정하게 굴었을지도 모른다. 날이 추우니 끌어안고 자자고 했을 거다. 그건 정말 확실하다.

“…천국에 갔으려나.”

착한 일을 하며 천국에 갈 점수를 쌓고 있었으니, 그는 마땅히 천국에 갔을 테다.

그렇다면 나는?

태유준은 의문을 품었다. 그는 생채기 가득한 손바닥을 펼치며 생각에 잠겼다.

사랑하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했는데. 그 사람을 버리고 섬을 떠났는데 난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내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을까.

“보고 싶어….”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사무쳤다. 아직도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음에.

“너무… 보고 싶어.”

그때였다. 태유준의 중얼거림 사이로 찰칵, 하는 금속성의 소리가 파고들었다.

태유준이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소리는 분명 방문 쪽에서 난 것이었으며, 바깥쪽 출입 센서에 카드 키를 가져다 댈 때 나는 종류의 소리였다.

뭐지.

태유준은 깜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다음 순간, 태유준은 숨을 삼켰다. 객실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바깥에서 누군가가 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누가. 괴물? 아니면 사람?

태유준의 전신이 공포와 당황으로 얼어붙었다. 머릿속은 온통 혼란투성이였다. 이윽고 침입자의 옷자락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태유준은 제 눈을 의심했다.

얼굴과 겉옷에 피를 뒤집어쓴 남자. 한밤중의 방문객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원혁이었다.

“…제… 형제, 님…?”

태유준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나 했다. 방에 도착하자마자 너무 피곤해서 씻지도 않고 그대로 잠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이런 꿈을 꾸고 있는 거다.

태유준은 잠시 꿈과 현실의 경계를 오갔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게 차마 진짜 원혁이라고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원혁의 굳은 얼굴이 안도감으로 가득 차자,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것은 얼지 않은 물 위를 걷는 것처럼 아주 기묘한 감각이었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형… 형제님.”

“유준아.”

원혁은 좀비처럼 눈알이 뻥 뚫리지도,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이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옷이 마구 해졌고 머리가 헝클어져 있다는 것 정도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오가는 말은 없었다. 마치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태유준은 눈을 뜨고 주룩주룩 눈물을 흘릴 뿐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유준아.”

태유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달려가 원혁의 품에 자신을 던졌다. 피비린내 사이로 원혁의 체향이, 찬기를 머금은 옷가지 너머로 원혁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것만으로 태유준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살아 돌아왔어. 죽지 않았어.

기적이 일어났다. 그렇게나 간절히 바라던 기적이 지금 이 순간 태유준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태유준은 원혁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마치 지금 격렬하게 끌어안지 않으면 원혁이 신기루가 되어 사라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태유준은 그에게 매달렸다.

그가 어떻게 돌아왔는지보다는 그가 눈앞에 실재하고 있다는 게 훨씬 중요했다. 그리고 그건 손으로, 품으로 그를 느껴야만 확인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유준아. 나 지금 좀 더러운데.”

“상관없어요.”

“아니, 잠깐.”

원혁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태유준의 입술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하아… 하아.”

키스는 숨 가빴다. 태유준은 원혁의 얼굴을 감싸고 그의 입술을 요령 없이 빨아들였다. 그러자 원혁에게 불이 옮겨붙었다. 그는 태유준의 깨끗한 목뒤, 여린 귓불, 샤워 가운 아래 드러난 허벅지를 거침없이 더듬었다.

그러자 태유준은 속절없이 밭은 숨소리를 내면서 원혁이 자신을 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살아 있는 원혁이 제 몸을 만져 온다는 건, 전신이 불에 타 버릴 만큼 황홀하고도 또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태유준 또한 원혁과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그의 널따란 가슴, 강철 같은 팔, 남자의 향기가 묻어 있는 목덜미를 되는대로 만졌다. 그가 실제로 존재하는 육체임을 확인하고 싶었다.

“울지 마.”

“흐… 흐흑.”

원혁이 태유준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는 더없이 소중하고, 또 부서지기 쉬운 것을 다루는 듯 조심스럽게 태유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젠 울지 않아도 돼.”

태유준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따라 입 맞추며 원혁이 속삭였다. 태유준은 원혁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이제야 마음껏 목 놓아 울 들판이 생긴 기분이었다.

* * *

“나 좀 씻어야 할 것 같은데.”

갈급한 키스가 끝나고, 조금 이성이 돌아온 후 원혁이 제일 먼저 한 말이었다.

“씻겨 드릴게요.”

“진심이야?”

원혁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피식 웃었다.

“진심이에요. 욕실 같이 들어가요.”

“신부님.”

“유준이라고 불러요.”

격렬한 키스 탓에 태유준은 가운 앞섶이 열려 가슴팍이 다 보였다. 늘씬한 목에 매달린 묵주를 보며 원혁이 입술을 혀로 쓸었다.

“…꼭, 씻겨 드리고 싶어요.”

태유준이 입술을 감쳐물며 눈을 내리깔았다.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위험한 발언인 거 알지.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고 있어요.”

태유준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원혁은 더 참을 이유가 없었다. 그가 태유준의 손목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둘은 눈을 마주친 채 함께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의 옷깃에 손을 댔다.

태유준이 먼저 손을 움직였다.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고 원혁의 피 얼룩과 먼지 가득한 겉옷을 벗겨 냈다.

셔츠 단추가 하나둘 풀릴 때마다 태유준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마치 태어나 처음 호흡을 하는 사람처럼 숨 쉬는 게 어색해지기도 했다.

이윽고 옷이 완전히 벗겨지며 원혁의 탄탄한 상체가 드러났다. 태유준이 눈을 내리깔자, 원혁이 손을 뻗어 태유준이 걸친 가운의 끈을 풀어 버렸다. 가운은 이내 힘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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