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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푹 떨구고 있는 태유준에게 지훈의 아버지가 다가왔다.
“저, 선생님들. 저희 집으로 가서 묵으시죠.”
지훈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고 남가도에 갇혀 있는 동안 병이라도 얻었는지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표정만큼은 밝았다.
“이야기 듣자 하니 지훈이한테도 잘해 주셨다고요. 가실 곳도 없으실 텐데, 저희 집에서 지내면 좋을 것 같아요.”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어떻게 저희가 선생님들을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부탁이니 저희 집에서 쉬세요.”
지훈의 아버지는 막판까지 사람들을 배에 실어 나른 장 박사, 그리고 배를 몰아 여기까지 온 태유준에게 뼈저린 감사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의 간곡한 부탁에 두 사람은 하는 수 없이 지훈이의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지훈은 아버지의 손을 꼭 붙잡고 걸었다. 마치 그 손을 놓으면 다시 아빠가 사라질까 봐 걱정된다는 듯이.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지훈의 모친은 기절할 것처럼 깜짝 놀라며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헐레벌떡 달려 나온 그녀는 남편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지훈 아빠!”
“여보!”
부부에 아이까지 셋이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자, 태유준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분명 보기에 흐뭇한 광경이 맞는데, 부러움과 서러움이 치밀어 올랐다.
자신은 함께 끌어안고 울 사람을 잃어버렸기에. 저들과는 다르기에.
어두운 밤이 되었을 때, 박광식 형제와 어머니가 들러 먹을 것을 주었다. 지난번 배에서 탈취한 식량 중 일부였다.
“저희 아들내미들 살려 주셨죠. 평생 이 은혜는 잊지 못할 겁니다.”
박광식의 모친은 한마디를 할 때마다 눈물을 한 움큼씩 흘렸다.
“신부님. 이거 꼭 드세요.”
그녀가 눅눅해진 강냉이와 땅콩 부스러기를 마저 건넸다. 교회 지하실에서 권했던 그 땅콩이었다. 짐작대로 그녀는 땅콩을 먹지 않고 아껴 두고 있었다. 이번에는 태유준도 사양하지 않고 받았다. 그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서, 긴 기도를 올렸다.
깊은 새벽. 태유준은 잠들지 못했다. 식욕이 없어서 식사도 하지 않았지만 그건 아무렇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눈을 감을라치면 자꾸만 원혁의 모습이 눈앞을 아른거렸다.
“하아….”
옆에 잠든 장 박사를 살피니 그는 깊이 잠이 들어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태유준은 방을 빠져나왔다. 해안으로 나오자 어느새 한겨울로 들어선 날씨를 실감케 하는 바람이 불었다. 에일 듯한 바람이 태유준의 뺨을 아프게 할퀴고 지나갔다.
조금 걷다가 멈추었다가, 태유준은 제자리를 뱅뱅 맴돌았다. 그러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불빛이 마을 곳곳을 수놓고 있었다. 주인이 떠난 집이라 그간 삭막하게 불이 꺼져 있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재회한 가족들이 켠 불로 인해 마을은 밝고 환했다.
태유준은 다시 고개를 돌려 시커먼 바다를 바라봤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파도가 거칠게 몰려와 포말을 튀겼다. 얼굴에 차가운 것이 닿자 태유준은 지금 제 얼굴에 흐르는 게 뜨거운 눈물임을 알게 되었다.
태유준은 무릎을 꿇었다. 다시금 파도가 밀려와 그의 발치를 차갑게 적셨다. 태유준은 저항 없이 그 추위와 차가움에 몸을 맡기고 가슴을 쳤다. 꺽꺽대며 울음을 토하는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를 다독여 줄 이도, 안아 줄 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남가도에서 그의 곁에 남았더라면 어땠을까. 그 사람을 홀로 놔두지 않고, 비록 변해 가는 그일지라도 마지막 모습을 지켜봐 주었더라면 나았을까. 태유준은 의미 없는 가정을 했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은 인간에게 시간을 되돌릴 기회를 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끝나 버린 지금, 태유준은 저 수평선 너머에 남가도가 있겠거니 생각하며 가슴을 쥐어짤 수밖에 없었다. 원혁이 잠들어 있을 그 남가도가.
이튿날, 어김없이 해는 떠올랐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태유준에게도 태양 빛이 도달했다. 원혁이 없어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어제를 밀어 내고 다시 오늘이 왔다. 그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으나, 세상은 개인의 사정을 봐줄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태유준은 방 밖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지훈이의 발소리를 들으며 몸을 웅크렸다. 원혁은 이제 저 어린아이 같은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을 것이다. 숨을 쉬지도 않을 것이고 심장이 뛰지도 않으리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이지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태유준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둘이서 함께 보낸 시간은 그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없을 테다.
…모든 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 기도도 하고 싶지 않다. 그저, 하염없이 슬퍼하고 싶었다. 원혁이 없는 하루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장 박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등을 보이고 누운 태유준 옆에 앉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유준아.”
“…네.”
“어제 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다쳤을 줄로 안다.”
“….”
“미스터 어빙 때문에 더욱 그랬겠지. 너랑 그 사람이랑 줄곧 같이 다니면서 정이 얼마나 쌓였는지까지는 내가 짐작할 수 없다만. 분명히 많이 슬플 테다.”
태유준의 감은 눈꺼풀 아래로 눈물이 고였다. 이윽고 얼굴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장 박사가 웅크린 태유준의 등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너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마.”
태유준이 절실하게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득한 어둠에 갇혀 있을 그 사람과 또한 자신을 위한 기도를 바랐다. 늘 남을 위해 기도를 바치던 자신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위로받는 입장이 되고 싶었다. 너무나도 절실히.
* * *
“제가 인천항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간소한 식사가 끝난 후 지훈의 아버지가 제안을 했다. 장 박사와 태유준의 목적지가 동인천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였다.
“제가 실은 선박 수리 업자입니다. 망할 놈들이 마을 배를 다 못 쓰게 만들어 놨지만 저라면 고장 난 배에 다른 배 부품을 끼우는 식으로 수리가 가능해요.”
남가도에서 훔쳐 온 배는 마을 사람들에게 주기로 했으므로, 태유준과 장 박사는 다른 배를 타고 나가야 했다. 그러니 지훈 아버지는 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희야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장 박사가 고개를 깊이 숙였다. 태유준 역시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훈의 부친과 장 박사, 태유준 세 사람이 집 밖으로 나섰다. 해안선을 따라 걷다 보니 과연 망가진 배가 여러 척 있었다. 조종실이 부서진 배도 있었고, 아예 선체가 박살 난 것도 있었다.
“저기도 부품이 뜯긴 게 한 척 있습니다. 살펴보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멀쩡한 배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들이 저희한테 해 주신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훈의 부친은 집과 바닷가를 오가며 즉시 수리에 들어갔다. 선체가 가장 멀쩡했던 놈을 바탕으로 부품을 끼워 넣자, 차근차근 쓸 만한 배가 완성되었다. 장 박사와 태유준도 부품을 나르고 못질을 하며 지훈의 부친을 도왔다. 태유준은 오히려 이렇게 일을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면 아주 잠깐만이라도 원혁을 잊을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꼼꼼하게 배를 살피고 작동 테스트를 하면서, 태유준의 마음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이제 이 배를 타고 인천으로 나가면 원혁과는 더욱 멀어진다. 이미 단절되어 있지만 이 근처를 벗어나기까지 하면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다.
태유준은 먹먹한 눈으로 먼바다를 봤다. 새끼손톱보다도 작게 남가도가 보였다.
…그와의 모든 것이 흩어진다. 부서지고 무너진다.
태유준은 생각했다. 원혁이란 사람은 몸이 죽었지만, 태유준은 마음이 죽어 버렸다고. 그러니 우리는 결국 둘 다 살아남지 못했다고.
* * *
배 수리는 이틀에 걸쳐 끝났다. 나름 깔끔해진 배를 보며 장 박사와 지훈의 부친은 기뻐했다. 지훈이의 어머니는 섭섭해하면서도 태유준을 무사히 떠나보낼 수 있어 다행이라며 여러 차례 눈시울을 붉혔다.
"어, 그런데 키 큰 아저씨는 어디 갔어요? 어제도 안 보였는데."
지훈이 백사장에서 모래성을 쌓으며 물었다. 천진난만한 눈망울이 태유준의 가슴을 송곳처럼 찔렀다.
“…그 아저씨는 먼저 인천으로 갔어.”
“아. 따로 가요?”
“응. 먼저 가느라 인사를 못 했네. 지훈이더러 잘 지내래. 엄마아빠 말씀 잘 듣고 공부도 열심히 하래.”
“난 공부 싫은데.”
지훈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태유준은 쓰게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마도 그가, 원혁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게 했으리라 생각했다.
“잘 가요. 신부님!”
“안녕히 가세요. 몸조심하시고요.”
마을 사람들 전체가 나와 장 박사와 태유준을 배웅했다. 박광식 가족은 수차례 고개를 숙이고 손을 흔들며 아쉬운 티를 냈다. 살려 줘서 고맙다는 말도 반복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평화를 빕니다.”
태유준은 섬사람들에게 일일이 인사하고 배에 올랐다. 지훈의 부친이 조종실에 타고, 장 박사와 그는 선실에 나란히 앉았다. 이윽고 배가 털털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출발했다.
그러다가 조금씩 속도가 붙어 배는 바다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에 비례해 섬은 조금씩 멀어져 갔다. 태유준은 등 뒤로 조그마한 점이 되어 가는 섬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배에는 원혁도 함께 타고 있었어야 맞는다.
이제는 정말 끝이구나.
태유준은 마음속으로 원혁에게 안녕을 고했다. 하지만 더 깊은 마음속에는 아직 그를 보낼 수 없다는 미련이 덩굴처럼 자라났다. 어리석은 생각인 줄 알면서도, 원혁이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상상을 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내가 그러했듯이 그 또한 살아남는다면 세상에 더 이상 바랄 건 없다.
하지만 배는 무심하게 달렸고 남가도는 저 멀리 멀어져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