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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78화 (7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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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놈들이 내 안경을 부숴서 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구나. 그래도 목소리를 들으니 알겠어.”

    태유준은 장 박사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렸다. 차갑고, 말랐고, 딱딱한 손. 자신이 알던 장 박사의 손이 아니었되 이것은 장 박사의 손이 맞았다.

    드디어 장 박사를 찾았다. 머나먼 여정의 끝에 드디어 가족 같은 박사님을 찾아낸 것이다. 태유준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끝없이 ‘박사님…!’ 하고 부를 뿐이었다.

    이윽고 눈물이 그치고 한차례 진정이 된 후, 태유준은 장 박사에게 말했다.

    “조명 좀 켤게요. 놀라지 마세요.”

    “알았다.”

    태유준이 플래시를 켜 감옥 안쪽을 비췄다. 장 박사는 눈을 잔뜩 찌푸리며 얼굴을 가렸다.

    그는 초췌하게 마른 데다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폐인 꼴을 하고 있었다. 태유준의 가슴이 미어졌다. 어떤 대우를 받았길래 사람이 이렇게 된 걸까. 마지막으로 본 장 박사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행색이었다. 태유준의 안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사람을 사람 같지 않게 취급하는, 이 악마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눈이 부시구나. 조금만 플래시를 멀리 떨어뜨려 주겠니.”

    장 박사는 겨우 실눈을 떴다. 가까스로 눈이 빛에 익숙해지는 순간, 그는 태유준 너머 시커먼 덩치를 지닌 사내를 보았다.

    “유준아. 네 뒤에, 뒤에 누구냐!”

    화들짝 놀라며 겁을 먹은 장 박사에게 태유준이 다가갔다.

    “박사님. 놀라셨죠. 저한테 동행이 있습니다.”

    “대체 누구냐.”

    “절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 주신 분이에요. 박사님도 아시죠? 크리스 어빙 씨.”

    장 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스터 어빙이라면 제약 회사 ‘노 모어’의 오너였다. 몇 년 전 두통약을 개발할 때 한 번 만나고 다시 본 적은 없었다. 다만 한국계였기 때문에 외모는 정확하게 기억이 났다.

    덩치가 크면서도 인상이 날카로운 미남자. 어둠 속이고 흐린 시야였지만 크리스 어빙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꺼내는 말에서 장 박사는 확신을 했다.

    “저한테 신약 설계도의 반쪽을 보내셨었죠, 박사님.”

    “미, 미스터 어빙…. 당신이 유준이와 같이 다니셨다고요?”

    “네. 장 박사님을 찾는 길에 동행했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결국 찾아내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장 박사는 얼떨떨한 얼굴로 태유준과 원혁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그럼 둘이 여기 경비를 뚫고 들어온 겁니까?”

    “잠깐 잠을 재웠죠. 그렇지만 곧 또 다른 경비병이 올까 걱정이 되는데요.”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입구를 지키는 간수들을 빼면 여긴 아무도 안 와요. 그나마도 하루에 두 번, 식사 시간에만 와서 날 지켜보다가 가곤 했으니까.”

    장 박사의 말을 들으니 태유준은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밝은 조명 아래에서 살피니 장 박사의 얼굴은 온통 울긋불긋했고 눈두덩이가 시퍼렜다.

    “박사님. 그런데 얼굴에 멍이 있어요. 어쩌다가….”

    “실은 그놈들이 날 고문했다.”

    “네?”

    “나한테서 신약 설계 레시피를 캐내려고 별짓을 다 했어. 간밤에도 몇 시간 동안 고문을 당했다.”

    “박사님….”

    태유준은 가슴이 욱신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울먹이며 물었다.

    “박사님. 놈들이란 게… 일융이죠?”

    “그걸 어떻게 알았니. 맞다. 일융제약이 이 모든 짓을 꾸몄어.”

    장 박사의 표정은 침통했다.

    “박사님, 그동안 해 온 연구라는 게 혹시….”

    “그래. 내가… 바로 내가 이 괴물들을… 만들었다.”

    장 박사가 쇠창살을 움켜쥐며 고개를 떨궜다. 쇳소리 가득한 목소리에는 죄책감과 공포, 환멸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었다.

    “모든 게 내 잘못이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일융에 속은 것도 내 책임이지.”

    “박사님….”

    “내가 그랬어. 내가 불로불사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주사를 만들었다. 그걸 일융 놈들이 변형시켜서 산 사람 몸에 주사했고, 좀비가 태어났어. 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 데도 알리지 못했다. 협박을 받고 있어서 무서웠다.”

    장 박사는 가끔 숨을 몰아쉬었고, 이따금 흐느끼기도 했다.

    “일융의 목적은… 대체 뭐였나요, 박사님.”

    “그놈들의 최종 목적은 치료제 독점이었어. 좀비에 물렸다고 해도 치료제만 제때 주입하면 살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난 값을 받으리라고 예상한 거지.”

    장 박사의 말에 태유준은 깊은 허탈감을 느꼈다. 세상을 온통 지옥으로 만들어 놓고, 고작 그것이 돈 때문이었다니.

    “겨우 그런 이유로, 사람을….”

    “내 예상대로군. 약을 독점해서 떼돈을 벌려고 했던 거야.”

    원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장 박사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치료제를 일단 만든다 해도 최대한 늦게 시장에 풀려 했다는 사실이야. 지금이 12월이지? 일융은 내년 여름쯤에 약을 판매하는 걸 목표로 하고 있다.”

    “네? 어째서요.”

    “그때 팔아야 가장 비싼 값에 팔 수 있다고 계산을 한 거지. 그래서 치료제 레시피를 갖고 있는 나를 일찌감치 이곳에 잡아 가두려 했고, 나는 설계도 반쪽을 미스터 어빙한테 보낸 다음 잠적한 거다.”

    태유준은 허탈함과 함께 인간에게 배신당한 기분을 맛봤다. 얼마나 썩어 빠진 영혼들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간 다음에야 약을 판다는 것인가.

    “그렇게 된 거였군. 이 썩을 새끼들 공장을 폭파하지 않고는 못 견디겠는데.”

    원혁이 말했다. 태유준도 공감하는 바였다. 단순히 장 박사만 빼내 가는 걸로 일을 마무리해선 안 된다. 어차피 장 박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순간부터 추격이 붙을 것이고, 일융이 좀비 공장을 운영하는 한 이 세상에 평화란 없다.

    “그러려면 여기서 계속 시간을 보낼 수는 없지. 일단 어서 박사님을 빼내야 해.”

    원혁이 말했다. 하지만 태유준은 현실적인 걱정이 앞섰다.

    “잠깐만요. 어떻게 빼낸다 해도 이 건물 전체에 놈들이 너무 많아요. 곳곳에 경비병이 깔려 있으니 박사님을 데리고 탈출하는 게 쉽진 않을 거예요. 게다가 놈들은 장 박사님 얼굴을 알고 있을 거고요.”

    셋은 잠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다가 원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여기서 셋 다 탈출할 방법.”

    “어떻게요?”

    “난리를 치자. 이 새끼들 정신이 쏙 빠질 만큼.”

    “난리요?”

    태유준은 원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혁 역시 태유준이 당황할 것이라는 것쯤은 이해할 수 있었기에,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도 위험할 수 있어. 하지만 박사님을 한시라도 빨리 구해 내려면 과감하게 행동해야 해.”

    “얼마나 과감한 행동을 하자는 건가요.”

    “폭탄의 뇌관을 건드려야지.”

    “폭탄의 뇌관이라면 설마….”

    “어, 좀비들.”

    대체 무슨 계획이란 말인가. 장 박사와 태유준은 얼이 빠진 채 원혁의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의 계획은 다음과 같았다. 좀비들이 밖으로 출하되기 전 보관되는 장소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수백 마리 좀비 떼를 자극해 난리를 유도한다.

    좀비들이 아비규환을 만들어 검은 옷들을 공격하면 그 틈을 타 지하 감옥에 대기하고 있던 태유준이 총으로 감옥의 잠금장치를 부순다. 그리고 장 박사에게 검은 옷을 입혀서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 후 해안으로 달려가 타고 온 배에 몸을 싣는다.

    “그럼 우리가 따로 행동하자는 소리인가요?”

    “넌 장 박사님 챙겨야지. 각자 움직여야 그게 가능해. 내가 좀비를 맡고 네가 박사님 탈출을 맡아.”

    “아니죠. 좀비들이 우글거리는 한복판에 어떻게 형제님 혼자 던져 넣습니까? 말이 안 됩니다. 같이 움직여야 해요.”

    “그럼 박사님은 어떡하고?”

    태유준은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원혁 혼자 위험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가 강한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이곳은 적진의 한복판. 검은 옷과도 싸워야 하고 좀비도 상대해야 한다.

    “저기, 내가 한마디 해도 되겠나.”

    가만히 있던 장 박사가 쉰 목소리를 냈다.

    “네. 박사님.”

    “내 생각엔 자네들 둘이 같이 다니는 게 맞아. 좀비도 좀비고 여기 놈들은 아주 위험해. 그러니 둘이 서로 보호하면서 다니고, 난 적당한 타이밍에 알아서 문고리를 부수고 나오겠네.”

    “가능하시겠어요?”

    “그러니 나한테 총 한 자루만 주고 가.”

    태유준과 원혁은 잠깐의 생각 후 장 박사에게 총을 건넸다. 경비병에게 빼앗은 자동 권총이었다.

    “박사님, 사격하실 줄은 아시죠?”

    “미스터 어빙. 한국 군필자를 우습게 보지 말아요.”

    장 박사가 비로소 피식 웃었다. 태유준은 쇠창살 너머로 그의 손을 꽉 잡았다.

    태유준은 마음속으로 짧게 기도를 올린 후 일어났다. 장 박사도 눈을 감고 태유준과 함께 기도를 올렸다.

    “그럼 유준이는 나랑 같이 가고, 장 박사님은 적당한 타이밍에 총 쏘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여기 무전기요.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하세요.”

    원혁이 경비병들에게 빼앗은 무전기 중 하나를 장 박사에게 건넸다. 원혁의 것과 주파수를 맞춘 뒤, 장 박사는 결연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배는 해안가에 있는 초록색으로 채색된 큰 배입니다.”

    태유준은 원혁의 말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마치 태유준이 배를 몰아서 장 박사와 단둘이서만 탈출할 것이라는 뉘앙스이지 않은가.

    함께 탈출하지 않는 방안을 생각 중인 사람 같기도 해서 태유준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따져 물으려는 순간 원혁과 장 박사가 태유준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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