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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77화 (7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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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박사는 집 안에 비밀 장치를 설계하는 것을 즐겼다. 중요한 수첩을 옷장 뒤라는 기발한 곳에 숨겨 뒀었고, 태유준이 더 어릴 때에는 비밀 문을 만들어 어린 그와 놀아 주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 있겠나 싶은 곳에 바로 정답이 있다고.

태유준은 바로 손을 뻗어 미친 듯이 벽을 더듬었다.

“뭐 하는 거야.”

“문이 있을지도 몰라요. 비상용 문.”

“뭐?”

“혹시 모르잖아요.”

원혁 역시 자기 쪽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해 제대로 보이는 것은 없었고 오직 손의 감각에 의지해야 했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해 보고 이대로 놈들을 마주치느니 이 편이 훨씬 나았다.

“…찾았다.”

태유준의 손에 움푹 파인 홈이 걸렸다. 그 홈을 중심으로 태유준은 위와 아래, 좌우를 더듬어 보았다. 크기로 보건대 이건 문이 확실했다. 벽 색깔과 똑같은 문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는 직접 만져 보기 전에는 결코 보이지 않았을 문. 태유준은 망설임 없이 문을 어깨로 밀었다. 원혁도 가담해 힘을 썼다. 그러자 문이 돌아가며 그들은 새로운 공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조명 하나 없는 방이 휑뎅그렁하게 하나 있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긴급 피난용 문이었다. 아마 지하 2층에 갇힌 좀비들이 탈출하거나 난리를 칠 경우를 대비해서 만들어 둔 공간인 듯했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검은 옷을 입은 사나이들의 발소리가 지척까지 가까워졌다. 태유준은 숨을 멈추고 귀를 벽에 댔다.

남자들이 두 사람이 숨어 있는 문을 지나쳐 복도 안쪽으로 들어갔다. 차마 소리 내 탄식하지는 못했지만, 태유준은 안도했다.

“뭐야. 왜 이렇게 시끄러워?”

“이 새끼들 갑자기 왜 난동이야.”

남자들의 등장으로 좀비들은 더욱 흥분했는지 쾅쾅, 쇠창살에 문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쇠창살을 밖에서 걷어찬 듯, 쾅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좀비가 지르는 끔찍한 괴성이 들려왔다.

“으, 으아악!”

“야. 내가 얘네 자극하지 말랬지.”

고참인 듯한 자가 타박을 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래서 초짜는 안 된다니까. 다를 줄 모르면 스프레이나 뿌려!”

“죄송합니다.”

곧이어 치익- 하고 무언가를 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벽 너머에 있는 태유준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저 스프레이 소리는 좀비 기피제를 뿌리는 소리일 것이다.

“별거 아닌 것 같네. 상황 정리됐으니까 올라가 봐.”

고참이 말하자 “네!” 하는 대답과 함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이내 그들은 태유준과 원혁이 숨은 문 앞을 지나쳐 점점 멀어졌다.

이젠 나가도 되겠지. 태유준이 살그머니 문을 열려던 때, 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뚜벅뚜벅. 느리지만 확실히 이 방향을 향해 다가오는 소리였다.

한 명이 남아 최종 확인을 하려는 거구나.

태유준은 원혁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발소리는 죽이고, 동작은 신속하게 해 다시 비밀 문 바로 옆의 벽에 섰다. 시야의 사각지대였다. 끼익. 낯선 손이 문을 밀었다. 태유준과 원혁은 문이 밀리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아무 소리도, 숨소리조차도 결코 내선 안 됐다.

“흠… 기분 탓인가.”

남자는 방 안을 둘러보더니 다시 문을 닫았다. 이번에야말로 발소리가 뚜벅뚜벅 멀어져 경사로를 타고 올라갔다. 태유준은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숨을 골랐다. 지속된 긴장으로 힘이 하나도 남지 않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아가야 했다.

* * *

두 사람은 비밀 문의 반대편으로 나왔다. 예상대로 지하 3층으로 연결되는 경사로가 나왔다. 이곳은 따로 눈에 보이는 출입구가 없고, 오직 비밀 문만을 통해 내려갈 수 있도록 설계된 곳인 듯했다. 경사로를 타고 가는 도중에는 다른 지하층과는 달리 희미한 빛만이 비쳤다. 자기 손발이나 겨우 식별할 수 있을 만큼의 빛이 전부였다.

태유준은 지금 원혁의 뒷모습에 모든 시각을 집중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손으로 벽을 짚어 균형 감각을 잃지 않도록 노력도 했다.

두 사람의 조끼 안쪽에 플래시가 있긴 하지만, 잘못 사용했다가는 좀비를 자극할 수도 있었고 아니면 혹시 있을 경비병에게 수상한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철저히 이 어둠에 적응한 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지하 3층에 도착해서 복도를 5분 남짓 걸었을까. 문이 하나 나왔다. 제한 구역임을 알리는 시뻘건 글씨도 쓰여 있었다. 지하 2층과 문을 여는 방식은 같았기에 원혁이 문을 따고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조금 걷다 보니 성인 남자 한 명 들어갈 법한 크기의 쇠창살이 달린 감옥들이 나왔다. 지하 2층과 다른 점이 있다면 쇠창살이 좀 더 듬성듬성 나 있었으며 안쪽에 식판으로 추정되는 은색 그릇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좀비의 악취는 나지 않았다. 그저 습한 장소에서 맡을 수 있는 곰팡이 냄새 정도가 전부였다. 이곳은 무엇을 가두는 곳일까. 식판이 있다는 것은, 좀비가 아닌 사람이 갇혀 있다는 뜻이다. 좀비가 식판을 가지고 얌전히 식사를 할 리는 없으므로.

태유준의 머릿속에 퍼뜩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장 박사님이 연구동이 아니라, 이곳에 갇혀 있을 가능성도 있다.

태유준은 원혁과 시선을 교환했다. 직진하자는 의미였다. 때마침 저 멀리 서 있던 경비병들도 복도를 걸어오는 원혁과 태유준을 발견한 참이었다.

“충성.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다른 구역과 다르게 경비병의 목소리에는 경계심과 의구심이 섞여 있었다.

“교대하러 왔다.”

“교대라니? 명령받은 게 없는데.”

“내가 명령할 거야.”

퍽. 원혁이 말을 걸어온 쪽의 턱을 어퍼컷으로 날려 버렸다. 나머지 한쪽이 으아아, 소리를 지르며 덤벼들었지만 태유준이 발을 걸어 버렸다. 바닥에 철푸덕 엎어진 놈을 해치우는 건 일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기절한 놈들에게서 무전기와 무기를 빼앗았다. 다른 놈들과 달리 이들의 조끼 안쪽에서는 수갑이 나왔다.

“마침 잘됐네.”

원혁과 태유준은 기절한 자들에게 수갑을 채우고 빈 감옥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그들을 그 안에 던져 놓고 밖에서 문을 잠갔다. 아마 경비병들이 깨어나서 소리를 질러도 워낙 지하 깊은 곳인 데다가 안쪽이니 바깥에서는 여간해서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플래시 써요.”

“경비병들은 때려잡았으니 괜찮겠군. 좋아.”

태유준은 쇠창살 문에 가까이 다가가 한 번씩 플래시를 켰다. 안에 누군가 있진 않을까 했는데, 없었다. 텅 빈 공간과 추레한 옷가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없어요.”

“이쪽도 없어. 빈 식판만 남아 있군.”

태유준은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사람을 가두는 데 쓰이는 감옥. 이 안에 과연 장 박사가 있을 것인가.

그들은 기다랗게 난 복도를 따라 걸으며 감옥 수십 군데에 빛을 비추었다. 하지만 수용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냥 빈 공간인 건가? 아냐. 그렇다면 경비병들이 굳이 지킬 필요가 없어.

태유준은 분명히 이 안에 누군가 갇힌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희미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쿨럭.

잘못 들은 것인가 싶었는데, 다시 한번 들렸다. 분명히 사람이 내는 기침 소리였다. 그것도 아주 낯익은 기침 소리였다.

…설마 여기에 사람을 가둬 놨다고. 이런 비인간적인 감옥에, 장 박사님이 계신다고?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소리의 근원을 찾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힌트를 주듯이 다시 기침이 이어졌다. 이 길의 끝에 지하 1층과 마찬가지로 양쪽으로 모퉁이가 있었다. 그중 왼쪽 모퉁이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태유준은 연거푸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감이 가득 찼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걸어 기침 소리가 나던 감옥 앞에 도착했다. 너무 어두워 안에 든 것이 사람인지, 그냥 천 쪼가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내부에 무엇인가가 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플래시를 켤까 하다가 혹시 모를 위험에 자제하기로 했다. 태유준은 대신 용기를 쥐어짜 냈다.

“…박사님, 저예요.”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유준이요.”

적막한 공간이라 태유준의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곧이어 무엇인가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나더니, 쇠창살 너머로 손이 훅 뻗어 나왔다. 태유준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고, 넘어질 뻔한 그를 원혁이 손으로 받쳐 주었다.

쇠창살에서 뻗어 나온 손은 허공을 헤매듯 더듬었고, 이내 나머지 한쪽 손도 나왔다. 화상 자국을 보자마자 태유준은 알아볼 수 있었다. 몇 년 전 연구실에서 위험한 약품을 만지다가 화상을 입은, 장 박사의 손이었다.

“유준이… 유준아?”

잔뜩 잠기고 쇳소리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마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발성을 한 사람처럼. 태유준은 그래도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어린 시절부터 수백, 수천 번 자신을 불러 온 목소리를.

“박사님!”

“유준아, 정말 유준이가 맞는 게냐.”

“네. 저예요!”

태유준은 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장 박사의 손을 잡았다. 그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가득 섞였다.

“유준아!”

“박사님… 박사님.”

장 박사의 잔뜩 긁힌 목소리에도 흐느낌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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