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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태유준이 일어났을 때 그의 이마는 식은땀에 젖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현실과 꿈이 구별되지 않았다.
빠르게 상체를 일으켜 주변을 살펴봤지만 원혁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거지? 불안해진 태유준이 벌떡 일어나려던 차였다. 원혁이 물 한 잔을 떠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표정이 왜 그래. 나쁜 꿈이라도 꿨어?”
“…형제님.”
한순간에 안도가 되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태유준은 제 옆에 와 앉은 원혁의 허리를 안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진짜 악몽이라도 꾼 거야?”
원혁이 태유준의 등을 쓸어내리며 물었다. 태유준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그에게 괜한 불길함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에요. 그냥 깼는데 옆에 없어서.”
“우리 유준이 형아 없으면 이제 잠도 못 자는구나. 분리 불안이라고 알아? 딱 그거 같은데.”
원혁이 장난스럽게 말하며 태유준의 볼을 꼬집었다. 평소 같았으면 정색을 해야 했건만, 태유준은 원혁의 손길이 좋아 얌전히 얼굴을 맡겼다.
“분리 불안 맞아요.”
“오. 인정한 거야?”
“형제님 없이는 못 살아요.”
“무슨 일이야. 우리 유준이 입에서 별말이 다 나오네. 이러다가 사랑 고백도 하겠어.”
원혁이 기분 좋게 웃으며 태유준의 뺨에 뽀뽀를 했다. 태유준은 싱긋 웃으며 그의 뺨에 뽀뽀를 되돌려 주었다.
어쩌면 정말로 고백할지 모른다.
무사히 돌아온다면. 그때는 진심을 담아 이 감정을 고백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꿈속에서처럼 남가도에서 험한 일을 당하거나 이별하게 된다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지? 다시금 태유준의 심장이 불길하게 뛰었다.
“출발할 준비 하자. 해 거의 다 떨어졌어.”
“아, 네.”
원혁의 말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순간 나쁜 상상이 들려고 했다. 태유준은 구체적으로 험한 생각을 한 자기 자신을 반성했다.
아까 꾼 흉몽 때문이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고 긴장해서 꾼 거지. 너무 의미 부여하지 말고, 감정적이 되지도 말고 그저 치열하게 살아남을 궁리나 하자.
처음 마음먹은 목표 그대로다. 형제님과 함께 장 박사님을 구출해 나온다. 바로 오늘이 그날이다.
태유준은 굳게 마음을 먹고 짤막한 기도를 바쳤다. 세상의 평화와 안전, 그리고 특별히 원혁의 무사를 비는 기도였다.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리니 조금이나마 심적으로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무기는 반반으로 나누자.”
“네.”
원혁과 태유준은 어젯밤 벗어 놓았던 검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다음에는 남자들에게서 빼앗은 물건을 늘어놓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조끼에는 일반 주머니와 방수 주머니, 걸이 등이 많이 달려 있어서 수납이 원활했다. 수류탄과 접이식 칼을 숨겨도 옷의 품이 넓어 티가 나지 않는 점도 좋았다.
태유준은 늘 지니고 다녔던 가위를 품 안에 숨겼고 원혁은 망설임 없이 중화도를 선택했다. 검은 옷들에게서 빼앗은 권총도 반씩 나누어 가졌다. 마지막으로는 늘 가지고만 다녔지 쓰지 않았던 최후의 무기, 원혁 소유의 리볼버 두 정을 하나씩 챙겼다.
“그때도 말했지만 탄약이 많지 않아. 그러니까 유준이 너는 여섯 발이 꽉 차 있는 걸 가져가고, 나는 세 발짜리를 가져갈게.”
원혁은 총을 바꿔 줄 의지가 처음부터 없어 보였다. 태유준은 그의 마음을 알기에 굳이 저항하지 않았다. 다만 집을 나서기 전 원혁의 손에 입을 맞추며 긴 기도를 올렸다.
원혁과 태유준은 수평선으로 해가 다 넘어갈 무렵 해안가에 도착했다. 미리 와 있던 박광식이 다가와 꾸벅 인사를 했다.
“잘 주무셨습니까?”
“정말 같이 가도 괜찮으시겠어요.”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동생만 찾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을 겪어도 상관없습니다.”
거듭 강조하는 그에게, 원혁이 말했다.
“일단 포로인 척해야 하니까 얼굴에 흠집 좀 만들게.”
원혁이 주먹을 치켜올리자 박광식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태유준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어 폭행을 저지했다.
“저기. 그냥 얼굴에 멍 좀 들고 코피 좀 나면 되는 건데 굳이 형제님이 때리셔야 할까요? 제가 때리는 게 나을 겁니다.”
태유준이 황급하게 원혁을 밀어 내자 박광식은 조금 안심하는 눈치였다.
“죄송합니다. 작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때리는 것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는요. 얻어맞고 끌려온 것처럼 보여야 하니 당연히 얼굴에 상처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어서 때려 주십시오.”
좀비가 아닌 보통 사람의 얼굴을 때려 보는 건 처음이라, 태유준의 주먹질은 어설펐다. 검은 옷들을 제압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일반인을 상대로 폭력을 쓰는 것 역시 처음이기에 망설임도 묻어났다. 차라리 눈을 감자 싶어 태유준은 눈을 질끈 감고 퍽, 주먹을 휘둘렀다.
두 대 정도 때리자 박광식의 눈두덩이가 붓고 코피가 흘렀다.
“죄송합니다. 아프시죠.”
“저 선생님한테 맞는 것보단 나았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박광식은 일부러 코피를 얼굴 이곳저곳에 묻힌 다음 묶어 두었던 배에 올라탔다. 원혁과 태유준도 무기를 다시 한번 점검하고 총의 위치를 확인한 후에 배에 탔다.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사냥했던 것인지 배는 규모가 무척이나 컸다. 수백 명도 한 번에 운송할 수 있을 듯했다.
원혁은 조종실로 향해 배의 기능을 점검하고 항법 장치를 가동했다. 남가도까지의 항로가 자동 저장 되어 있어 바다에서 길을 잃을 염려는 없어 보였다. 원혁은 무슨 종류든지 탈것을 조종하는 거라면 자신이 있었으므로, 이 정도 체급의 배도 그에게는 껌이었다.
갑판에서는 위장술이 이어졌다. 태유준은 선실 안에서 로프를 찾아낸 다음 그것을 가지고 나왔다.
“좀 묶겠습니다.”
“네.”
박광식을 갑판 한구석에 묶어 두고 배는 출발했다. 겉보기에는 영락없는 남가도 악당들의 채집 광경이었다.
오늘은 풍랑이 비교적 덜한 터라 배는 거의 흔들리지 않고 순조롭게 나아갔다. 태유준은 조종실로 들어가 원혁의 옆에 섰다.
“형 조종 잘하지?”
“네. 잘하네요.”
원혁이 계기판을 가리키며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알려 주었다. 그는 태유준에게 전원 장치, 자동 항법 장치를 켜는 법, 만약의 경우 비상 탈출을 하는 법을 차례로 설명했다.
“구명정 띄우는 것도 알려 줘?”
“…아뇨.”
“왜. 알아 두면 좋은데.”
“방금 알려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만약의 경우라면 혼자라도 돌아와야 할 것 아냐. 잘 배워 둬.”
원혁의 말에 태유준은 속이 쓰렸다. 그런 만약의 경우는, 절대로 겪고 싶지 않았다.
태유준이 뭐라고 입을 떼려던 차였다. 창 너머로 보이는 남가도 해안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뭐지?”
불빛은 두 번 깜빡거리더니, 잠시 간격을 두고 연속으로 세 번 빠르게 깜빡였다.
“뭐죠? 우리한테 보내는 신호 같은데요.”
“섬으로 접근하는 배에 보내는 신호일 거야. 우리도 신호를 보내서 응답해야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걸.”
원혁이 계기판을 훑어본 다음 조명 스위치를 찾았다.
“그런데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아세요? 저놈들끼리 쓰는 암호일 텐데요.”
태유준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실은 나도 몰라.”
“네? 그럼 어쩌시려고요.”
“걱정하지 마. 이럴 때 만국 공통으로 통하는 편법이 있어.”
“그게 뭔데요?”
“똑같이 따라 하기.”
그 말대로 원혁은 조명을 두 번 깜빡인 다음 몇 초 쉬고 다시 세 번 작동했다.
“정말로 이게 먹힐까요?”
“기다려 봐.”
배 안에는 침묵과 함께 긴장감이 감돌았다. 태유준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만약 이 신호가 맞는다면 이 배는 무사히 남가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오답이라면 섬에 발도 못 붙이고 공격당할지 모른다.
틀렸나? 왜 이렇게 반응이 없어.
태유준이 불안한 마음으로 남가도를 응시하고 있을 때였다. 해안가에서 다시 동일한 순서로 불빛이 반짝였다.
“맞힌 것 같지?”
원혁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하아. 아찔했습니다.”
태유준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닦아 내며 갑판으로 이동했다. 박광식을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었다.
원혁은 천천히 감속하며 배를 해안가 가까이로 댔다. 태유준은 갑판에서 바닷가로 밧줄을 던져 고정 장치에 걸고, 개펄로 사다리를 내렸다.
원혁이 제일 먼저 내려 앞장을 서고 태유준이 꽁꽁 묶인 박광식을 붙들어 뒷덜미를 잡아챈 채 걸었다. 그러자 얼마 안 가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저벅저벅 다가왔다. 배를 보고 다가온 경비병인 듯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그럼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태유준이 슬그머니 원혁에게 눈빛을 보냈다. 원혁은 가만있으라는 듯 손짓을 해 보인 다음 경비병들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갔다.
“아, 이번에는 진짜 운이 좋았어. 재료들 씨가 말랐나 했더니 싱싱한 놈이 서가도에 하나 숨어 있었지 뭐야.”
원혁이 능청맞게 말하며 등 뒤에 따라오고 있는 박광식을 가리켰다.
“수고 많았네. 이 근방에는 재료가 다 떨어졌다고 하던데 한 건 하다니 대단해. 그래서 늦어진 거야?”
“그렇지.”
“나머지 대원들은?”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이 배는 셔틀처럼 인근 섬을 순회하는 배로, 원혁과 태유준이 습격했을 당시에도 여러 명이 타고 있었다. 지금은 서가도의 한 창고에 탈탈 털린 채로 갇혀 있지만.
“서가도에 잔류했어. 재료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판단돼서.”
원혁이 잘 받아넘기나 하는 순간이었다. 경비병 중 한 명이 원혁에게 총을 겨눴다. 태유준은 순간 숨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