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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배. 하지만 그 배를 빨리 조우할수록 좋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뭔데요?”
“아까 놈들 가방에 서로 통신이 되는 장치가 있는 것 같던데. 핸드폰하고는 다른 특수 교신 장치 같았어.”
“아, 저도 봤습니다.”
원혁이 검은 옷들에게 빼앗아 온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입구를 열었다. 구형 핸드폰 같은 검은색의 기기가 두 개 나왔다.
“이걸 이용하자.”
“저흰 좀 나갔다 오겠습니다.”
“어디 가십니까. 여기 계세요. 바깥은 위험하다니까요.”
“다시 돌아올 테니까 염려 말고 계십시오.”
원혁과 태유준은 지하실을 빠져나와 다시 산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부두 인근에 도착한 두 사람은 통신 장치를 살핀 다음 전원으로 추정되는 버튼을 눌러 보았다. 하지만 지직거리는 소리만 들릴 뿐 딱히 반응은 없었다.
“주파수가 맞아야 하는 것 같은데.”
원혁은 통신 장치를 가지고 이것저것 버튼을 누르며 조작을 해 보고, 주파수 감지 버튼을 다양하게 눌러 보았다. 그러자 이내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PK-02호. 무슨 일인가.
연결이 되자 태유준은 긴장으로 손바닥을 꽉 쥐었다. 원혁은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남가도에서 수확이 있었습니다.”
―그래? 잘됐군. 마침 남가도로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빨리 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자네 목소리가 왜 그래. 평소랑 좀 다르게 들리네?
“남가도에서 수집하던 중에 실랑이가 일어나 물에 빠졌습니다. 그새 감기가 들었나 봅니다.”
원혁이 억지 기침을 쥐어짜 냈다. 어색한 기침이었지만 통신 장치 너머로는 그럴듯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쯧. 알겠어. 그럼 처음 내려 줬던 데로 재료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도록.
“네. 알겠습니다.”
―통신 종료.
무전이 끊겼다. 원혁과 태유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고민에 빠졌다.
“처음 내려 준 데가 어디지?”
“잘은 몰라도 이 섬에는 배를 댈 만한 곳이 많지 않아 보입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해안가로 향하고 있었어요, 그쪽 방향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 그럼 일단 그 새끼들 유니폼 입자. 지금쯤 다 말랐을 거야.”
“네. 그래야 초반에 대처하기 쉬울 것 같네요.”
두 사람은 서둘러 임시 거처로 다시 이동했다. 방에 널어놓았던 검은 바지와 폴라 티가 거의 다 말라 있었다. 평상복에서 검은 옷으로 갈아입고 폴라 티를 올려 얼굴을 가렸다.
다시 바깥으로 나온 두 사람은 해안가로 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해가 다 저물어 가는 바다 저 멀리 불을 밝힌 배 한 척이 보였다.
“저 배 같아.”
“그런 것 같습니다.”
배는 초록색 페인트칠을 한 외관을 갖추었으며, 크루즈급은 아니었으나 큰 축에 속했다. 얼핏 보기에도 백 명 이상은 태울 수 있어 보였다.
“저 정도라면 사람들을 구출해 낼 때 쓰일 수도 있겠는데요.”
“맞아. 무리하면 백오십 명, 이백 명까지도 탈 수 있겠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시죠.”
“면허 딸 때 배에 대해서 배웠으니까.”
얼마 가지 않아 배가 해안가에 접안을 시도했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먼저 내려 무전기를 들었다. 그러자 원혁이 갖고 있는 무전기가 찌직, 하고 울렸다.
―PK-01호, 도착했다. 어디 있나?
“여기다.”
―뭐라고?
원혁이 번개같이 달려 나가 남자의 뒤를 덮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남자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제압당했다.
태유준은 배 쪽으로 달려와 육지와 배를 잇는 가교 아래 잠복했다. 그리고 새로운 두 명이 밖으로 나왔을 때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가교를 흔들었다.
“으악!”
“뭐, 뭐야!”
기우뚱 균형을 잃은 자들이 팔다리를 허우적댔다. 원혁은 그들의 명치를 팔꿈치로 가격하며 가차 없이 공격했다.
둘이 나가떨어짐과 동시에 원혁과 유준은 몸을 날려 가교에 올라탔다. 원혁이 먼저 배 안으로 진입해 선실로 향하는 문을 걷어찼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안쪽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맨 앞에 있는 자는 소총을 들고 있었다. 원혁은 그의 손목을 강하게 내리쳐서 총을 떨어뜨렸다.
“윽!”
남자가 황급하게 몸을 숙여 총을 주우려 하자, 원혁은 잽싸게 총을 발로 눌러 뒤쪽으로 밀었다. 태유준이 백 패스를 제대로 받아 총을 주웠다.
맨몸이 된 남자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원혁의 주먹을 정통으로 맞았다. 그 바로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조끼 안쪽에서 접이식 칼을 꺼내 들었다. 원혁은 그가 칼을 펴기도 전에 그 손을 강하게 걷어찼다.
“으악!”
손마디가 꺾인 남자가 비명을 질러 댔다. 원혁은 보폭을 크게 해 안으로 들어가며 덤벼드는 남자들을 한 대씩 갈겼다. 개중에 용기를 내서 덤비는 놈도 있었으나 원혁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으윽….”
“아악, 팔이 부러진 것 같아.”
태유준은 널브러진 남자들의 손을 노끈으로 묶었다. 배 안을 뒤지며 소지품과 무기를 수거하는 일도 태유준의 몫이었다.
“수확물이 꽤 되는데?”
“네. 철저하게 무장을 하고 다니네요. 총도 있고 수류탄도 있어요.”
“유용하게 쓸 수 있겠어. 잘 챙기자고.”
태유준은 무기를 잘 갈무리한 다음 배 안을 돌아다녔다. 예상한 대로 저장 식량이 가득 들어 있었다. 참치 캔, 건조 과일, 육포와 건빵이 산더미처럼 나왔다.
“엄청나네. 지들끼리 먹으려고 아주 알차게도 챙겼구만.”
“네. 이거면 마을 사람들한테도 많이 나눠 줄 수 있겠어요. 다만, 둘이서 다 나르기에는 무리겠어요. 마을 사람들한테 도움을 요청하죠.”
“그래. 여럿이서 나르면 금방 나를 거야.”
원혁은 널브러진 남자들의 손을 일부러 꽉 짓밟으며 상자를 날랐다. 그럴 때마다 남자들이 눈을 까뒤집고 몸을 비틀었다.
* * *
두 사람은 교회에 있는 자 중에 박광식을 비롯해 그나마 체력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동원했다. 산길을 걸어 내려와 해안가에 도착한 주민들은 산더미같이 쌓인 식량을 보고 놀랐다. 사람들은 가슴이 벅차고 또 사무치는지 울부짖기도 했고, 멍하니 있다가 후드득 눈물을 쏟기도 했다. 식량 상자를 하나씩 짊어지고 가는 길은 오르막임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는지 콧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교회로 돌아온 사람들은 식량을 늘어놓고 주린 배를 채웠다.
“너 먼저 먹어라.”
“할아버지, 이것 좀 드세요.”
모두가 굶주렸을 텐데도 그 와중에 노약자를 먼저 챙기는 모습에 태유준은 기분이 묘했다. 광화문과 용산 벙커에서 봤던 이기적인 자들의 모습과 너무나 대조되었다.
그때의 그 추악한 자들과 이 사람들은 다르구나. 나누는 마음이 있고, 용기가 있고, 선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구나.
“저기… 어….”
태유준의 허벅지까지나 올까 말까 한 작은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고 해야지.”
뒤쪽을 보니 아이의 엄마가 있었다.
“고맙습니다, 삼촌.”
“인마, 삼촌 아니고 형이야.”
원혁이 아이의 조그마한 머리를 꽤 세게 쓰다듬었다.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부풀어 까치집이 되었다. 태유준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박광식이 태유준 앞으로 걸어와 덥석 손을 잡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목숨도 구해 주시고 식량도 주시고…. 정말 형님들 은혜가 큽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별일 아닙니다. 저희도 마침 배가 필요하던 참이었어요.”
“배고프실 텐데 이쪽으로 와서 같이 드시죠.”
그가 원혁과 태유준을 끌어다가 앉히고 참치 캔과 옥수수 캔을 내밀었다. 소박하다 못해 초라한 식단이었지만 태유준은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잠시간 평화를 느꼈다. 그동안의 험난한 고생이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마을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까르륵거리며 웃었다. 태유준은 흐뭇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원혁이 말을 걸어왔다.
“나갔다 올래?”
원혁이 자기 입술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태유준은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깜빡였다. 평소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인데 왜 입술을 만지며 신호를 주는 것일까?
“바람도 쐴 겸 좋죠. 근데 이 신호는 뭐예요?”
태유준이 원혁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하며 아랫입술을 가볍게 쳤다. 원혁은 큭큭 웃더니 태유준의 손목을 잡고 쪽문을 나섰다.
계단을 올라 어둠이 깔린 야외로 나오자, 태유준은 답답한 숨이 조금 트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있는 한껏 기지개를 켜고 묵직한 어깨를 주물렀다.
“아. 나오니까 좋네요.”
“이거 먹어.”
“이게 뭡니까?”
원혁이 내미는 것은 자그마한 알사탕이었다.
“아까 나쁜 놈들 해치울 때 너 주려고 챙겨 놨지.”
“언제 이런 걸…. 그럴 정신이 있었단 말이에요?”
“우리 아기 유준이 주려고 형이 정신 바짝 차렸지.”
“아기 아닌데요.”
“형이 아기라면 아기인 거야.”
원혁이 사탕 껍질을 벗기더니 새빨간 사탕을 태유준의 입술에 물려 주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보자 태유준은 심통이 났다. 날 어린애 취급하다니 혼 좀 나 봐라.
태유준은 원혁을 놀라게 해 줄 심산이었다. 그는 혀를 내밀어 단단한 손가락 끝을 느릿하게 핥았다. 태유준의 돌발 행동에 원혁이 흠칫하며 손을 빼냈다.
“아기 아니죠?”
이제 나한테 어리다, 아기 같다 소리 못 하겠지. 태유준은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 생각은 후회로 바뀌었다.
“어…?”
“이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