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protected]
뭐지? 내가 소년 입장에서는 낯선 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저항이 너무 거센데.
원혁도 그 점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가까이 다가와 소년을 살폈다. 그러자 소년이 갑자기 엎드려 빌기 시작했다.
“살려 줘, 살려 주세요!”
태유준이 한쪽 무릎을 꿇고 소년과 눈높이를 맞췄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돼. 우리 나쁜 사람 아니야.”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년은 벌벌 떨며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너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우리가 있는 방 엿보고 있었던 거 맞지? 어?”
원혁이 묻자 소년은 겁에 질린 듯 움츠러들었다.
“겁주지 말아요. 그렇게 무섭게 물어보면 어떡합니까.”
“내가 뭘.”
“가만히 있어 봐요.”
태유준이 다시 소년에게 눈을 맞췄다.
“우리 무서운 사람들 아니야. 그냥 네가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자상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얼굴에 소년은 긴장을 조금 늦춘 듯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는… 그냥 사람… 사람이 있길래 뭔가 하고 봤어요.”
“그랬구나. 여기는 사람이 많이 안 사나 봐?”
“…네. 그냥, 몇 집만 남았어요.”
‘산다’가 아니라 ‘남았다’? 태유준은 소년의 표현이 묘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계속 물었다.
“이름은 뭐야?”
“지… 지훈. 김지훈이요.”
“그렇구나. 몇 살이야?”
“5학년이요.”
아직 어린 나이인데 이렇게 남루한 차림을 하고 혼자 마을을 떠돌고 있던 이유가 뭘까. 태유준은 아이가 안쓰러운 한편 궁금증이 일었다.
“부모님은?”
“…엄마는 집에 계시고요. 아빠는 안 계세요.”
“그렇구나. 이 근처 살아?”
소년이 대답 대신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민가를 가리켰다. 초라하고 낡은 집이었다.
“우리가 데려다줄게. 가자.”
소년이 쭈뼛거리며 일어났다. 태유준이 소년의 옆에 서고, 원혁은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원혁이 다가가면 소년이 흠칫거리기 때문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일행은 소년의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 잠깐 들어오실래요. 물이라도 드릴게요.”
“아, 그래도 돼? 고마워.”
태유준과 원혁이 낡은 대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랫동안 가꾸지 않은 듯한 마당은 너저분했고 또 삭막했다.
“안에 엄마 계시니?”
“네.”
소년이 현관문을 열었다.
“실례합니다.”
대답 대신 쿨럭이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거실 한구석에 낡은 이불을 깔고 누워 있던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쿨럭. 누구… 누구세요.”
여인이 눈을 비비며 일어나다가 태유준과 원혁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꺅! 왜 이러세요, 왜! 이러지 마세요!”
발작 같은 반응이었다. 여인은 겁에 질린 얼굴로 지훈이를 껴안고 벌벌 떨었다. 태유준은 목에 걸고 있던 묵주 십자가를 꺼내 보였다.
“진정하세요. 저는 성직자입니다.”
“성직…자?”
“네. 예비 사제입니다. 절대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인은 십자가를 보고 조금 신경을 누그러뜨린 듯, 지훈이를 놓아주었다.
“그런 분이 여기는 왜….”
“사정이 있어서 이 섬으로 흘러들어 왔어요. 그런데 한겨울에 옷도 없이 지훈이 혼자 돌아다니던데, 무슨 연유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태유준의 물음에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집에 먹을 게 없다 보니 지훈이가 나가서 먹을 걸 구해 오고 있습니다.”
“아이 혼자서는 위험할 텐데… 식량이 전혀 없으신가요?”
“네. 떨어진 지 오래예요.”
태유준은 입술을 깨물고 앙상하게 야윈 두 모자를 살폈다. 과연 며칠간 굶은 흔적이 역력했다. 아까 지훈이가 집 앞을 훔쳐보던 것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아무것도 훔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길 좀 막았다고 격렬하게 반항한 점과, 여인이 자신과 원혁을 보고 혼비백산한 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외간 남자가 집에 찾아왔다 한들 지훈이가 데려온 것인데 이렇게까지 두려워할 일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석연치 않았다.
“죄송합니다만, 이 집… 아니면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나요?”
태유준이 조심스럽게 묻자 여인이 홑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의 표정은 불편하다 못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외지인이신가 보군요. 이 마을은… 점점 사람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네? 사람이 사라지다니요.”
“남자들이 죄다 끌려갔거든요. 우리 지훈이 아빠까지도요.”
여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게 대체…. 누가 사람들을 끌고 갔다는 거죠?”
“저도 몰라요. 아는 거라고는 옷차림뿐이에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동네 남자란 남자는 다 잡아갔어요. 그놈들이 여자와 아이는 건드리지 않기에 살아남았지요. 그 이후로 저희는 이 집에서 지훈 아빠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망을 치자, 어디 다른 섬으로 몸을 숨기자 하는 이웃들도 있었지만 저희는… 지훈 아빠가 혹시라도 돌아올까 봐….”
검은 옷이라니. 남가도의 그 남자들인가. 태유준은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농약 통 같은 걸 들고 방독면을 쓴 남자들이었습니까?”
“맞아요. 그걸 어떻게 아세요?”
“…하아. 그랬군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온 나라가 좀비로 난리니 경찰도 소방서도 신고를 안 받잖아요. 거기다가 저희는 섬이기까지 하니 외부의 도움도 요청할 수 없었어요. 그냥 그대로 눈 뜨고 당한 거예요.”
여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태유준의 가슴이 쓰라렸다.
이 여자의 남편은 남가도로 끌려간 것 같았다. 그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의 본거지는 남가도가 틀림없었으므로.
“지훈이 아빠는 어떻게 되었을지….”
여인이 이부자리 옆에 있는 액자를 들어 올려 만지작댔다. 평범하고 꾸밈없는 부부, 그리고 어린 지훈이 함께 찍은 사진이 안에 들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태유준이 생각하기에 지훈의 부친은 그리 좋은 꼴을 당했을 것 같지 않았다. 강제 노역을 당하고 있거나, 아니면 더 악독한 일에 휘말려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가엾은 여인 앞에서 굳이 나쁜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태유준은 울먹이는 여인에게 휴지를 건네고는 짧은 기도를 해 주었다.
“평화를 기도하겠습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섬에서는 언제 나가실 건가요?”
“곧 나가려 합니다. 그리 오래 머무르지는 않을 듯한데요.”
“이런. 쉽지 않으실 텐데요. 이 섬에는 배가 없어요.”
“배가 없다고요? 섬인데 어떻게 배가 없죠?”
여인은 기침을 몇 번 하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놈들이 배를 다 부수고 고장 냈어요. 지금 이 섬에는 탈 만한 배가 한 척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설마 사람들이 도주할까 봐 그런 짓을 벌인 건가요?”
“그렇죠. 도망치거나 아니면 어딘가에 도움을 요청하는 일을 막는 거죠.”
듣던 중 당황스럽고 또 곤혹스러운 이야기였다. 배가 없다면 이 섬을 탈출할 길이 요원한데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태유준은 입 안에 쓴맛이 가득 들어차며 가슴이 답답해지는 기분이었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저기 해안가의 파란 지붕 집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찾아오세요.”
“말씀만으로도 고마워요. 정말로요.”
여인이 힘없이 인사를 건넸다.
두 사람은 지훈이의 집을 나섰다. 원혁은 별말 없이 있다가 모자의 집이 웬만큼 멀어졌다 싶을 때 입을 열었다.
“아이 아버지 말이야. 남가도로 끌려간 것 같지?”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체 무슨 짓을 벌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생각보다 끔찍한 꼴을 당했을 수도 있어.”
“노역 같은 거요?”
“아니.”
원혁이 걸음을 멈춰 세우며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수백 마리 좀비들의 육체, 어디서 왔을지 생각해 봤어?”
“어디서… 왔냐니요?”
태유준이 가볍게 인상을 썼다.
“물려서 옮는 그냥 좀비 말고, 지금 우리가 관심 있는 건 점프 슈트 좀비잖아. 공장에서 출하하듯이 놈들을 생산해 내고 있는데… 그 몸이 어디서 왔냐는 거지.”
“몸….”
태유준이 눈을 깜빡거리며 입가를 굳혔다. 거기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저 처음부터 ‘죽은 자’로서 대했기에, 점프 슈트 좀비들이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보통 좀비들이야 물리는 과정과 좀비로 변화하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봤으니 그 메커니즘을 잘 알았지만, 점프 슈트 좀비의 ‘본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장 박사의 연구 기록에도 ‘그들이 특수형 샘플을 수거해 갔다. 점프 슈트가 찝찝하여 여러 차례 세탁했다.’라는 말만 등장할 뿐, 그 슈트를 입은 좀비 실험체가 어디서 등장했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설마, 죽은 자의 시체에 자극을 줘서 다시 살렸다든가 한 걸까요.”
“프랑켄슈타인처럼?”
“비유하자면 그렇죠.”
“음…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인데.”
“그게 다행이라뇨. 대체 형제님은 어디까지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원혁이 태유준의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좀 더 끔찍하고 구체적인 상상. 무덤 파헤치기보다 더 쉽고 간단하게 인간의 몸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뭔가 생각하고 있었어.”
원혁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아 태유준은 소름이 끼쳤다.
“설마 산 사람을 데려다가 점프 슈트 좀비로 만든단 소리십니까.”
“가능성 있다고 봐. 이 섬에서 남자들이 잡혀갔다잖아.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잡아갔다고 했어. 그리고 그자들의 본거지는 남가도인 게 확실한 상황이고.”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소리였다. 태유준은 그것만큼은 믿고 싶지 않았고, 상상도 하기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