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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합니다만 왜요.”
태유준이 묻자 원혁이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뛰어내려서 저 작은 섬까지 헤엄쳐 가자.”
“네? 물에 빠지는 소리가 날 텐데요. 아니, 그건 둘째 치고 바다 수영이라뇨. 이 추위에 무리예요.”
“아냐. 지금 엔진 소리며 발소리 때문에 우리가 내는 소리 정도는 묻힐 거야. 파도 소리도 워낙 크잖아.”
“어… 그건 일리가 있어요. 그런데 지금 형제님이 하는 말에 따르면 저희는 이 찬물에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뛰어드는 건가요?”
“어.”
“심장 마비로 죽으면 어떡해요!”
태유준은 여기서 이렇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걸려서 총 맞아 죽나 심장 마비로 죽나 똑같아. 그럴 바에야 살 확률이 조금이라도 높은 쪽을 택해야지.”
“잠시, 잠시만요. 그럼 준비 운동이라도 할 시간 주세요!”
“준비 운동은 충분히 했다고 봐. 여기서 얼마나 많이 움직여 댔는데.”
원혁이 태유준의 팔을 잡아끌며 선실을 나섰다. 후다닥 달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정신 사납게 오가는 다른 선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아무도 그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원혁과 태유준은 바쁜 척하며 달리다가 순간 방향을 틀어 배의 후미로 직진했다.
“지금밖에 기회가 없어. 뛰어들자.”
원혁의 눈동자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아니. 남가도는 그러면 어떻게 가고요?”
“가만 보니까 저 작은 섬에는 접안할 만한 지점도 있고 민가도 있는 것 같아. 희미하지만 불빛이 보이거든. 일단 저 섬에 가서 이동할 수단을 구한 다음에 남가도로 잠입하는 게 더 안전할 것 같아.”
이 추운 겨울에 바다에 뛰어들라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황당해하는 태유준을 향해 원혁이 손을 내밀었다.
“겨울에 서핑하면 생각보다 안 춥거든? 바다는 두어 달 늦게 기온이 반영돼서 지금은 실제로 10월에 해당하는 온도밖에 안 될 거야.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은 방수 소재라 서핑 슈트나 다름없고.”
“진짜죠?”
“어. 문제가 있다면 파도지. 내가 손잡아 줄 테니까 나만 잘 따라와.”
“저, 저기…!”
둘은 배의 후미에 서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흔들거리는 바닷물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아찔했지만, 지금은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심장 마비 조심해.”
“형제님도요!”
태유준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이 상황에서 도망칠 곳은 없었다. 다시 선실로 돌아가기엔 늦었으니 찬 바다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원혁이 먼저 몸을 던졌다. 풍덩, 소리는 고장 난 모터 소리가 지워 주었다. 태유준도 용기를 내 뛰어내렸다. 순간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귀와 코, 입으로 들어왔다.
10월 수온이라더니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헤엄칠 만한 수온은 절대 아니었다. 팔다리가 냉장고에 들어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서 태유준은 있는 힘껏 발버둥을 쳤다.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도 최대한 빠르게 헤엄을 쳐 나아갔다.
원혁이 태유준 옆으로 와 얼음 같은 손을 맞잡아 주었다.
이 와중에도 약속은 꼭 지키네.
웃고 싶었지만 지금은 너무 추웠다. 태유준은 힘껏 발장구를 치며 작은 섬의 등대를 목표로 전진했다.
* * *
“으으, 추워.”
“얼른 나와. 걸음 멈추면 안 돼.”
막상 바다에서 빠져나와 찬 바람을 맞으니 더 추웠다. 태유준은 제자리 뛰기로 몸의 물기를 털어 낸 다음 부르르 떨었다.
“숨 고르면 더 지치니까 빨리 몸 숨길 만한 데 찾자.”
어둠 속이라 제대로 눈앞이 보이진 않았지만, 등대 근방에 민가로 추정되는 집이 하나 보였다. 둘은 사방을 경계하면서 외딴집으로 향했다.
혹시 이 섬에도 좀비가 있는 건 아니겠지. 태유준은 바짝 긴장하며 원혁의 뒤를 따랐다.
“빈집인 것 같긴 한데, 한번 살펴보자.”
“네.”
원혁과 태유준은 기민하게 집을 살폈다. 집은 전형적인 어촌 마을의 살림집 같았는데, 마당이 각종 농기구와 그물 등으로 어지럽혀져 있고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누가 난장판을 치고 간 것 같은데요.”
썩 느낌이 좋지 않아진 태유준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원혁이 중화도를 품에서 꺼내 쥐고 화장실, 창고, 방 안을 뒤졌다. 어디에도 사람 혹은 좀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긴 한데 또 지금은 텅 빈 것 같아. 버려진 집 같군.”
“여기서 묵어가도 괜찮을까요.”
“일단 날씨가 추우니까 다른 집을 찾기는 무리야.”
“그건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는 태유준이었다.
“옷부터 갈아입자. 집 안에 옷이 있나 볼게.”
원혁은 안방으로 쓰였을 듯한 방으로 들어가 옷장을 열어 보았다. 장롱을 뒤져 보니 남자 옷이 여러 벌 나왔다. 무늬 없는 긴팔 티셔츠와 해진 트레이닝 바지였다.
“다행이다. 이거 입어.”
태유준은 화장실로 가 물을 틀어 보았다. 예상은 했지만 찬물만 나왔다. 방금 바다 수영을 마치고 또 찬물을 몸에 끼얹으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괜찮아? 씻겨 줄까?”
“죽진 않을 것 같으니 걱정 마세요.”
이를 딱딱 부딪칠 정도로 차가운 물에 모래와 소금기를 헹궈 낸 다음, 태유준은 재빨리 옷을 입었다. 방으로 들어온 그는 벽장에서 이불을 꺼내 몸에 칭칭 둘렀다. 근본적인 한기가 가시지 않아 뼈마디가 다 아팠다.
“으으….”
조금 기다리자 원혁이 옷을 갈아입고 방 안으로 돌아왔다.
“이 녀석들 좋은 거 입고 다니네. 방수 주머니에 넣은 건 안 젖었어.”
원혁이 총을 꺼내 방 한구석에 놓으며 말했다.
“많이 춥지.”
“네. 많이요.”
“이불 안에 나도 들어가야겠는데.”
“평소라면 질색했겠지만 지금은 반갑네요.”
“어지간히 추운가 봐.”
원혁이 이불 안으로 들어와 태유준의 몸을 감싸 안았다. 물기 어리고 차가운 몸이나마 맞대고 있으려니 안심이 됐다.
“너무 추워요.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 다행입니다.”
“이젠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원혁이 씩 웃으며 태유준을 꼭 끌어안았다. 태유준은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며 원혁의 품을 파고들었다. 한참 안고 있으려니 조금씩 온기가 돌았다. 원혁이 자신의 가슴팍에 기댄 태유준의 입술을 매만지다가 물었다.
“우리 오늘 껴안고 잘까?”
“껴안고 자자고요?”
“감기 걸릴 수 있잖아. 우린 서로 체온이 필요해.”
태유준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 뭐라고 한마디 하려던 때, 원혁이 먼저 태유준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
“싫다고 하지 마. 너도 추운 거 다 알아.”
“그래도.”
“지금도 네 몸 얼음장 같아. 맘 같아서는 다 벗긴 다음에 끌어안고 있고 싶지만 그건 참을게.”
원혁이 소리 죽여 웃으면서 태유준을 꽉 끌어안았다. 태유준은 홧홧하게 열 오른 얼굴을 원혁의 품에 묻고 그의 가슴을 주먹으로 살짝 내리쳤다. 물론 태유준 입장에서는 살짝 내려친 것이었지만 원혁은 일부러 과장되게 억, 하는 소리를 냈다.
“부끄러워?”
“조용히 하세요.”
“유준이가 부끄러움이 많네.”
“놀리지 마시죠.”
원혁이 소리 내 웃었다. 그러면서 태유준의 등을 가만히 쓸어 주었다. 손길을 타고 따뜻한 온기가 올라왔다. 태유준은 표정은 뾰로통했지만 얌전히 원혁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바깥에는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는지 휘이잉, 소리가 불 때마다 빈약한 창문이 덜컹거렸다.
졸리다. 섬을 더 둘러보며 조사도 해 봐야 했지만, 태유준은 지금 자신을 감싸고 있는 원혁의 체온에 빨려들고 있었다. 추위에 고생한 몸은 원혁의 몸을 거의 난로처럼 여기고 축 늘어만 졌다. 점차 눈이 가물가물해지며 수마가 몰려왔다.
어느새 눈을 감은 태유준에게 원혁이 이불을 고쳐 덮어 주었다. 원혁도 벽에 기대어 태유준을 끌어안은 채로 잠에 빠져들었다. 방 안은 두 사람의 규칙적인 숨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다가 바스락, 사람이 무언가를 밟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원혁이 눈을 번쩍 떴다.
타다닥, 뛰는 듯한 소리가 뒤를 이었다. 태유준도 곧바로 눈을 떴다.
원혁과 태유준이 시선을 교환했다. 바깥에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이 좀비든 사람이든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둘은 이불을 걷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혁은 중화도를 챙긴 다음 문가로 살그머니 다가갔다. 최대한 인기척을 죽인 상태로 걸어간 그는 단박에 문을 열어젖혔다.
대문 바깥에 있는 것은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다. 키는 좀 작았으며 몸집이 야위었는데 얼핏 보기에 좀비는 아닌 듯했다. 그는 원혁이 문을 열자마자 후다닥 도망을 쳤다. 달려들지 않고 도리어 달아나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사람이었다.
“사람이었어.”
“왜 도망을 가죠?”
“수상해. 쫓아가 보자.”
원혁과 태유준은 서둘러 집 밖으로 뛰어나와 도망친 자를 찾기 시작했다. 해 질 녘이라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었기 때문에, 저 멀리 도망치는 작은 그림자를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다!”
원혁이 쏜살같이 달려 그림자의 뒤를 추격했다.
“으악!”
쫓기던 자가 돌부리에 걸려 땅바닥에 엎어졌다. 태유준이 그의 앞으로 가 길을 가로막았다. 그런데 가만 보니 넘어진 사람은 키 작은 성인이 아니라 앳된 소년이었다. 열한 살이나 열두 살 정도 되었을까. 남루한 차림새에 겉옷도 없었고 슬리퍼만 신은 맨발은 부르터 있었다.
소년이 잽싸게 일어나 태유준을 뚫고 달려가려 했지만, 태유준이 빠르게 방향을 읽어 그를 멈춰 세웠다.
“이거 놔!”
소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태유준을 밀었다.
“놓으라고! 으악!”
소년은 온 힘을 다해 저항하며 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