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protected]
남자가 태유준에게 얼굴을 바짝 댔다. 턱을 뒤덮는 폴라 티를 입고 헬멧을 썼다 한들 가까이서 보면 눈과 콧대가 드러날 터였다.
아무래도 이 남자와 격투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태유준이 이를 악문 때였다. 와장창! 스테인리스 통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소리가 난 방향으로 황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야! 뭐 해.”
원혁의 주변에 온갖 밥통, 반찬을 담을 만한 세숫대야만 한 통, 식판, 주걱과 국자가 쏟아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정리하다가 떨어졌습니다.”
“배식이 당장 한 시간 뒤인데 이걸 엉망으로 만들면 어떡하냐, 어?!”
남자는 흥분한 얼굴로 윽박을 지르며 발을 쿵쾅거렸다. 그의 신경이 원혁에게 쏠린 틈에 태유준은 조리실 문을 나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헉, 헉.”
숨이 가쁠 정도로 정신없이 뛰어 올라온 태유준은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았다. 아까 그 조리 담당이 자신을 수상하게 여긴 이상, 그의 눈에 절대 발각되지 않을 만한 곳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는 갑판에 정렬해 있는 열댓 명의 선원들을 보았다. 교대 시간인지 한두 명씩 새로운 사람들이 다가와 기존에 서 있던 사람들을 보내고 대신 그 자리를 메꾸는 것이 보였다.
바로 저거다.
태유준은 빠르게 움직여 갑판 한복판까지 갔다. 그런 다음 가장 만만하고 어수룩해 보이는 자의 어깨를 쳤다.
“교대 시간이다.”
“아, 내 뒤 타임인가 보네. 알겠다.”
“쉬다 오도록 해.”
태유준은 최대한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애썼다. 그런데 잘 가던 남자가 갑자기 태유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근데 너 어디 있다 왔어?”
태유준은 깜짝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흠흠. 목을 가다듬은 그가 천천히 대답했다.
“어디 있다 오긴. 이전 근무 장소에서 교대해 주러 왔지.”
“그러니까 어디?”
이자, 날 의심하는 건가? 그렇다면 뭐라고 말해야 하지. 태유준의 목이 타들어 갔다.
“아. 알겠다. 너 조리실에 있다 왔구나?”
“어?”
“몸에서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해. 오늘 메뉴는 육개장인가 보네.”
남자가 휘파람을 불며 뒤를 돌았다. 태유준의 이마는 땀범벅이 되었다.
간 떨어지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미치겠네. 그나마 후각은 예민하지만 눈치는 없는 자와 교대해서 다행이었다.
태유준은 속으로 마리아와 예수, 하느님을 번갈아 찾으며 간절히 기도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안 된다. 이 배에서 무사히 도망치게 해 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형제님하고는 어떻게 다시 만나지?
태유준은 초조해하며 30여 분을 보냈다. 다들 정자세로 침묵 속에 보초를 서고 있는데 혼자 대열을 이탈했다가는 시선을 끌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했다. 고민에 빠져 있던 그를 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옆 사람이었다.
“밥시간입니다. 식사하러들 가시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저기 보세요. 교대자들 밥 다 먹고 오네요.”
뒤를 돌아보니 아까 태유준이 빠져나왔던 문으로 남자 열댓 명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태유준이 교대해 준 남자도 포함이었다.
식사 때문에 잠깐 교대해 준 거였구나. 그러면 이제부터는 내가 식당으로 가야 어색하지 않다. 어쩌면 형제님은 거기 계실지 몰라. 하지만 조리 담당이 날 알아보고 수상쩍어하면 어떡하지?
태유준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야. 너는 안 가냐?”
“네? 네. 갑니다.”
일단은 여길 벗어나서 식당에 가야 자연스러울 듯했다. 태유준은 잰걸음으로 남자들의 꽁무니를 따라 식당으로 내려갔다.
조리실로 통하는 복도를 무시하고 계속 직진하니 큼직한 직사각형 테이블이 놓인 단체 급식소 같은 곳이 나왔다. 태유준은 적당히 의자에 앉으며 동태를 살폈다.
“아. 배고파 죽겠네.”
“어젯밤부터 죽어라 일만 하지 않았습니까. 밥을 먹어도 먹어도 배가 금방 꺼져요.”
“그러니까. 좀비 태우는 것도 일이고, 싣고 육지 나오는 것도 일이고…. 어휴. 미치겠다.”
“그래도 프로젝트 끝나면 크게 한몫 챙겨 준다니까 그거 믿고 하는 거죠. 안 그랬으면 그 징그러운 짓을 어떻게 해요.”
식사를 기다리는 와중, 남자들은 쉴 새 없이 떠들었다. 태유준에게는 모두 정보가 되는 말들이었다.
“채집조에 비하면 우리가 나은 거야, 인마.”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자가 떠드는 남자들에게 핀잔을 줬다.
“그건 그렇죠. 그건 진짜 할 짓거리가 못 되니까.”
“저 신입 때 채집조 하루 지원 나갔다 아닙니까. 도저히 눈 뜨고 못 봐 주겠더라고요. 반항을 어찌나 하는지, 으윽.”
“밥맛 떨어져. 그만 이야기하고 밥이나 먹자.”
“오. 육개장이다!”
남자들 앞으로 식판이 하나씩 놓였다. 그런데 어딘지 익숙한 생김새의 손이었다. 태유준이 고개를 돌려 보니 식판에 밥과 국을 퍼서 테이블에 늘어놓는 사람은 원혁이었다.
“…!”
태유준과 눈이 마주친 원혁이 살짝 고갯짓을 했다. 그 옆에 선 조리 담당은 마른반찬을 떠 식판에 놓고 있었다. 그는 아직 태유준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지만, 그래도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니 긴장이 됐다.
“뭐 해. 밥 안 먹고?”
때마침 옆자리 남자가 말을 걸었다. 목 폴라를 내리고 입을 드러낸 그가 태유준의 턱에 손을 가져다 댔다.
“입을 열어야 밥을 먹을 거 아냐. 답답한데 좀 내려.”
그가 태유준의 턱을 가린 옷감을 잡아 내리려 했다. 그때 짤막한 비명 소리가 났다.
“아, 뜨거워!”
원혁이 가장 가까이 있던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팔뚝에 육개장 국물을 쏟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야! 국물 다 튀기면 어떡하냐. 너 아까부터 사고만 치네. 어?!”
조리 담당이 원혁의 등을 퍽퍽 때리며 야단을 쳤다.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그쪽을 향했다. 태유준의 턱을 드러내려던 남자도 쯧쯧거리며 원혁을 욕하기 바빴다. 조리 담당이 욕을 씨불이며 주방으로 완전히 들어가는 것을 보고, 태유준은 황급하게 옷자락을 내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가 끝나자 남자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태유준도 일단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지나가는 복도에서 곁눈질로 주방을 보자 원혁이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텅. 일부러 소리 나게 빈 페트병 하나를 쳤더니 원혁이 바로 고개를 돌렸다. 태유준은 손가락으로 바로 위를 가리켰다. 원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태유준은 남자들의 대열 가장 끝에 서서 천천히 걷다가 그들과 거리가 생긴 틈을 타서 급하게 벽으로 몸을 숨겼다. 남자들은 태유준이 사라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태유준은 식당에서 수직 방향에 있는 선실 중 불이 꺼진 곳을 골라 들어갔다.
그리고 숨죽여 대기하기를 20여 분. 고무장갑을 낀 원혁이 등장했다.
“하아.”
“후우.”
두 사람 다 진이 빠져 한숨을 내쉬었다.
“미치는 줄 알았어요.”
“난 일까지 했어. 30인분 조리에 설거지까지. 지금도 화장실 가는 척하고 몰래 빠져나온 거야.”
“고생하셨습니다.”
태유준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아 말했다. 쌀 포대도 가뿐하게 들어 올리는 그를 주방에서는 옳거니 싶어서 아주 유용하게 부려 먹은 모양이었다.
원혁은 고무장갑을 벗어 던지고 절레절레 고개를 젓더니, 선실 밖 작은 창문을 내다봤다.
“아까 조리사한테 들은 건데 남가도 근처에 서가도라는 섬이 있대. 거기서도 뭔 짓을 벌이는 모양이던데… 그게 아마 저 섬 같아.”
태유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두운 밤바다를 뚫어져라 관찰했다. 가까이에 조그마한 섬이 하나 눈에 들어왔고, 그 너머로 비교적 더 큰 섬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항로를 찾을 때 봤던 서가도와 남가도가 바로 저것들인 듯했다.
“지금 바로 서가도 옆을 지나고 있군요.”
“응. 서가도를 지나면 남가도까지는 30분이면 간대.”
그들이 손가락으로 섬을 가리키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일순간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멈춰 섰다.
“어?!”
이윽고 이곳저곳에서 사람 말소리가 들리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 등이 들렸다.
“뭐지.”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바깥의 기척에 집중했다.
“엔진 고장인 것 같습니다.”
“에라이, 망할. 바다 한복판에서 멈춰 서면 어쩌자는 거야!”
“고치려면 시간 좀 걸리지 싶습니다.”
“어떻게 좀 해 봐, 빨리!”
버럭하는 소리 뒤에 연이어 무전기 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 본부 들리나? 여기는 NG-01호. 선체에 문제가 생겨 복귀가 지연되고 있다. 위치는 서가도 북측 해안 500미터 인근이다.”
대화로 미루어 짐작건대 배에 결함이 생긴 듯했다. 태유준은 선실 창문으로 복도 쪽을 내다봤다. 남자들이 우르르 달려가며 무전기로 바삐 소통하고 있었다.
“우리도 나가서 뭐라도 하는 척해야 할까요?”
태유준이 심각하게 말했다. 원혁은 창에 붙어 바깥을 살피더니, 눈을 가늘게 좁히며 물었다.
“내 생각은 좀 달라.”
“네? 어떻게 하시려고요.”
“지금 얘네가 되게 정신이 없단 말이야. 아까처럼 낯이 익네 마네, 교대를 하네 마네 할 상황이 아니야.”
“그건 그렇죠.”
“지금 도망치자.”
“네? 어떻게요. 구명정이라도 띄우시게요?”
태유준이 당황한 목소리로 되묻자 원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에 띄니까 구명정은 무리지. 그보다, 신부님 바다 수영 할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