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66화 (6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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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철저하게 눈치로 행동해야 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원혁과 태유준은 시선을 교환한 다음, 자연스럽게 걸어 남자들 무리에 합류했다. 마침 다시 출항할 때가 되었는지 리더 격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소리 높여 외쳤다.

“어이! 왜 이렇게 늦었어!”

남자가 가리키는 것은 태유준이었다. 순간 놀란 태유준은 심장이 벌렁였으나 이럴 때는 침착만이 답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볼일 좀 보고 왔습니다.”

꿀꺽. 태유준이 침을 삼키며 주먹을 꽉 쥐는데 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진짜 짜증 나게 구네. 말을 하고 갔어야지.”

“죄송합니다.”

태유준이 고개를 숙이자 남자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뒤돌아섰다.

휴. 살았다. 태유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남자들이 하나둘 배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태유준과 원혁도 대열의 꼬리에 붙어 발을 맞춰 걸었다.

안에서 보니 배는 바깥에서 관찰했던 것보다도 훨씬 컸는데 웬만한 크루즈의 절반 사이즈 정도는 됐다. 또한 재질이 견고해 보였으며 녹슬지도 않은 새것이었다. 소유자가 상당히 부유한 자라는 것을 짐작게 하는 대목이었다.

설마 이게 일융제약의 배인가.

태유준은 눈을 돌려 배 안을 은근슬쩍 둘러보며 걸었다. 그렇게 대놓고 새겨져 있지는 않겠지만 혹시 일융제약의 마크나 이 배가 일융과 관련 있단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함이었다.

“왜 이렇게 느려 터졌어! 빨리 좀 걸어라!”

앞에 선 리더 격 남자가 재촉했다. 태유준은 뛰듯이 걸어 적당히 대열에 섞여 들었다. 배 안에는 아까 부두에 내렸던 서른 명 남짓 외에도 다른 인원들이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50명 이상이었다.

곧 부우우-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출발했다. 물살을 헤치며 육중한 쇳덩이가 나아갔다.

배가 출발함과 동시에 남자들 중 일부는 갑판으로 가 뒷짐을 선 채 도열했고, 일부는 잰걸음으로 선실로 들어갔다. 몇 명은 따로 배정된 일이 있는지 2층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탑승한 놈들 뭐 해! 꾸물거리지 말고 원위치로 가!”

“예!”

남자들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신속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태유준으로서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하다못해 가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원혁과 태유준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원혁이 턱짓을 했다. 일단 2층으로 올라가자는 신호였다.

태유준은 다른 남자들과 최대한 속도를 비슷하게 맞추어 보폭을 조절하며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2층으로 올라간 남자들은 일사불란하게 대열을 맞추며 차렷 자세를 취했다. 태유준은 얼른 대열의 끄트머리에 서서 남자들을 흉내 냈고, 그 옆줄에 선 원혁도 마찬가지였다.

곧 남자들 앞으로 한 중년 남자가 등장했다. 시커먼 옷차림에 혼자만 색깔이 다른 헬멧을 쓴 자였는데, 밤이 어두운 데다가 그 역시 태유준이나 원혁처럼 폴라 티를 끌어 올려 입고 있어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이 부대의 우두머리인가 보구나. 태유준은 바짝 긴장하며 남자를 관찰했다.

“오늘 다들 수고했다. 또 한 분대를 육지로 수송하는 데 성공했어. 물론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트럭 기사가 우리 Z에 의해 물렸다고는 하지만 그건 뭐, 적당히 무마될 일이고. 중요한 건 꽤 많은 숫자를 실어 나르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지.”

중년 남자가 대단히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검은 옷의 사내들이 박수를 치길래 태유준도 잽싸게 그들을 흉내 냈다.

“오늘 남가도까지는 기상 악화로 천천히 이동할 예정이다. 네 시간 이상 걸릴 예정이니 그리 알고 평소처럼 근무하도록.”

“예!”

남자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중년은 어딘가로 발길을 옮겼다. 태유준은 기민하게 주변 눈치를 봤다. 남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어떤 놈은 1층 갑판으로 돌아갔고, 혹자는 뱃머리로 뛰어갔다.

우린 어디로 가야 하지? 원혁과 태유준이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갑자기 웬 놈이 둘에게 손짓을 했다.

“너네 뭐 하느라 그렇게 멍하니 있는 거야. 선실 보초 안 가?”

놈이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윽박을 질렀다. 앞뒤 정황은 잘 몰라도 빨리 가야 할 것 같아 태유준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남자의 뒤를 따랐다.

“하여간 요새 기강들이 해이해졌어. 자꾸 이러면 험한 꼴 당한다 너희, 응?”

목소리를 내면 안 될 것 같아 태유준은 고개만 푹 숙였다. 옆을 슬쩍 보니 원혁도 대충 비슷하게 굴고 있었다.

“너희는 밤샘 보초나 서라. 난 휴게실 가서 자고 오려니까.”

남자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더니 선실 안쪽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후임에게 일을 미루고 본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스타일인 듯했다. 그러니 두 사람에게는 천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휴.”

태유준이 한숨 돌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원혁이 그의 옆으로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오늘 밤은 꼼짝없이 졸병인 척해야겠는데.”

“네. 그럴싸하게 연기를 해야 할 듯합니다.”

“여기 가만히 있지 말고 배를 둘러보자. 시간 있을 때 조사를 해야지.”

“동감입니다.”

두 사람은 휴게실 안쪽을 살짝 들여다보고, 남자가 간이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은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선실 바깥으로 나왔다.

후미지고 어두운 곳으로 이동한 둘은 소리를 낮추고 대화를 시작했다.

“아까 들었지? 낮에도 좀비를 싣고 온 놈들이 이놈들 같아.”

“이쯤 되니 좀비 몸에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남가도에서 번호를 새긴 다음에 싣고 오는 거였어요.”

원혁이 끄덕였다.

“남가도에 도착하면 무슨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지 몰라. 어떤 미친놈들이 희한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을지 모른다고.”

“그러게요. 일단 장 박사님을 잘 찾아낼 수 있을….”

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선실 바깥에서 누가 큰소리를 쳤다.

“야. 두 명 어디 갔어. 이 새끼들 어디 갔냐고.”

아까 원혁과 태유준더러 보초를 서라고 명령했던 자의 목소리였다. 원혁과 태유준은 말을 멈췄다. 이대로 남자와 맞닥뜨리게 되면 문책이 이어질 것이고, 자칫하면 정체가 탄로 날 수 있다.

물론 원혁이 저 남자 하나쯤은 두드려 패서 제압할 수 있겠지만, 그럼 소란이 일어나 일이 커진다.

태유준은 일을 키우느니 다른 길을 찾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망망대해 위였고 상대는 거의 수십여 명이었다. 처음부터 게임이 안 되는 싸움이니 어떻게든 충돌을 피하는 게 상책이다 싶었다.

“형제님, 큰일입니다. 빨리 사람들 틈에 섞여서 일하는 척을 해야겠습니다.”

“제길, 다른 데로 이동하자.”

두 사람이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마침 눈에 띄는 문이 있어 원혁이 앞장을 섰다. 빠르게 문 안으로 들어온 둘은 정신없이 철제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오자 좁다란 복도가 펼쳐졌는데 열기와 함께 습기, 음식 냄새가 확 풍겼다.

“여기 조리실인가 본데.”

“들어가죠.”

아까 그 남자가 굳이 조리실 구역까지 추격해 올 것 같지는 않으리란 생각에, 태유준은 의연하게 마음을 먹고 복도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예상대로 시끌벅적한 소음 가운데 무언가를 튀기고 굽고 끓이는 소리와 사람 말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살피며 걷고 있는데 한 남자가 그들을 발견하고 대뜸 삿대질을 했다.

“어이. 거기 뭐 하냐. 멍하니 있지 말고 쌀 좀 가져와!”

“네.”

조리 담당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태유준은 여기서 시간을 때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원혁에게 눈을 찡긋해 보였다. 원혁도 눈을 찡긋거렸다.

“쌀 저기 있잖아. 왜 바로 못 찾아.”

“죄송합니다.”

쌀이 어디 있는지 알 게 뭐야. 원혁은 속으로 구시렁거렸지만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으며 구석에 쌓인 쌀 포대를 들어 올렸다. 커다랗고 무거운 쌀 포대를 척척 나르자 조리 담당은 그제야 잔소리를 멈췄다.

“거기 너는 국 좀 저어라.”

“네? 네.”

남자가 태유준에게 커다란 국자를 쥐여 주었다. 태유준은 다소 당황스러웠으나 절대 어색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으므로 조용히 국이 끓고 있는 초대형 냄비 앞으로 다가가 국자를 쑥 집어넣었다.

“더 팍팍 저어. 눌어붙잖아.”

“알겠습니다.”

태유준은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 열심히 국물을 휘저었다. 그러자 남자가 태유준을 힐긋 봤다.

“너 목소리가 낯설다? 원래 새벽조였어?”

하마터면 헉 소리가 나올 뻔했다. 태유준은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저… 저는 원래 오후조였습니다.”

“아, 그래? 어쩐지 목소리가 낯설더라.”

“네. 새벽조는 처음입니다.”

남자를 잘 속여 넘기기 위해 태유준은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그나마 놈들의 시스템 중 일부를 알고 있는 게 다행이었다. 태유준이 다시 국 통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였다. 남자가 턱, 하고 태유준의 뒷덜미를 잡았다. 태유준의 눈이 커다래지며 몸이 뻣뻣해졌다.

“야.”

“네?!”

“너 진짜 오후조였던 거 맞아?”

순간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지금 이 남자를 국 통에 담그고 격투를 벌여야 하나. 이 조리실 안에 칼과 가위는 어디에 있을까. 원혁은 지금 어디에 있지?

긴장과 아찔함 속에 태유준의 머리는 미친 듯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도 지난달까지 오후조였거든. 근데 아무리 들어도 네 목소리가 낯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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