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64화 (6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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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방으로 돌아와 작은 테이블 위에 상을 차렸다. 캔을 따고 종이컵에 사이다와 물을 따른 다음 커피용 티스푼으로 음식을 떠먹었다. 덩치가 커다란 원혁이 조그마한 티스푼을 들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태유준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원혁은 의아한 눈으로 태유준을 바라볼 뿐이었다.

“왜 그러는데?”

“아니에요. 식사하시죠.”

태유준은 애써 웃음을 삼켰다.

둘은 계속 창밖의 동향을 살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씩 눈발이 걷히는가 싶더니 바람이 잦아들었다.

“바람이 약해졌어요.”

태유준이 창문 밖으로 팔을 뻗어 날씨를 거듭 확인했다.

“그럼 가 봐야겠네. 준비하자.”

“네.”

태유준은 신발을 신고 옷을 챙겨 입었다. 수단은 가방에 넣고 대신 두툼한 검정 맨투맨 티를 입었다. 남가도에 도착하게 되면 무슨 무리를 마주칠지 모르므로 튀는 복장을 하고 싶진 않았다.

다만 수십 일간 함께한 묵주 십자가만은 함께해야 했다. 그는 십자가를 손에 꼭 쥔 다음 목에 걸고 옷 안으로 잘 감췄다.

원혁은 새 셔츠로 갈아입고 평소처럼 피 얼룩이 가득한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후우. 태유준은 모텔 현관문을 열기 전 심호흡을 했다. 지금까지 수십 번 위험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은 유난히 바깥으로 발을 내딛기 조심스러웠다.

남가도라는 외딴섬은 일융제약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예상되는 곳이다. 어쩌면 장 박사가 감금되어 있을지도 모를 곳이기도 하다. 그곳까지 가는 도중에 어떤 일을 맞닥뜨리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두 사람은 위험의 한복판으로 스스로 뛰어들고 있었다.

“유준아.”

“…네.”

“내가 열게.”

긴장으로 뻣뻣해진 태유준의 손 위에 원혁의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단단하게 굳은살이 박인 손이 태유준의 손등을 꾹 눌렀다. 태유준은 원혁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단단한 확신이 어려 있었다.

“…박사님이 과연 그 섬에 계실까요.”

“그건 모르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곳 외에는 우리가 갈 데가 없다는 거야.”

원혁이 문을 힘 있게 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휘잉,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 * *

트럭은 은밀하게 도로를 달려서 부둣가 근처에 멈추어 섰다. 두 사람은 차에 탄 채로 배를 찾기로 했다. 배가 묶인 곳 앞을 지나면서 두 사람 다 배의 모양과 색깔에 집중했지만, 수십 척의 선박이 어지럽게 정박돼 있는 데다가 가로등도 다 꺼진 터라 시야가 잘 확보되지 않았다. 희미한 달빛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마린 19호라고 했고 빨갛게 도색돼 있다고 했어요.”

태유준이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 정보뿐이었다. 기업형 선박은 아닐 테니 고만고만한 사이즈의 낚싯배나 조금 더 큰 사이즈의 배 중 빨간색 배를 찾기로 하고 두 사람은 기민하게 사방을 살폈다.

“저건가.”

부둣가의 가장 끝 쪽, 원혁이 가리킨 곳에 빨갛게 칠을 하고 19라는 글자를 대문짝만하게 세 군데 박아 넣은 배가 묶여 있었다.

“자아가 비대해 보이는 게 그 미치광이 배가 맞는 것 같아.”

“제 생각에도요. 저런 기괴한 배가 또 있다고 믿고 싶지도 않고요. 어서 타요.”

태유준이 차에서 내리려던 때였다. 차창으로 육지 쪽을 내다보고 있던 원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더니, 그가 태유준에게 손짓을 했다.

“잠시만.”

“왜요?”

“저 창고 말이야. 우리가 어제 좀비 떼랑 싸웠던 그 창고 맞지?”

원혁이 손가락으로 맞은편에 있는 창고를 가리켰다. 셔터가 엉망진창으로 뜯기고 창고 앞에는 핏자국이 눈과 엉겨 있는 꼴이 처참했다.

“저기 맞아요. 근데… 어…?!”

태유준이 흠칫했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어야 할 좀비의 사체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없… 없어요. 좀비 떼가.”

아무리 봐도 그 창고가 맞는데, 안에 좀비가 없다니. 또한 셔터는 태유준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활짝 올라가 있었다.

두 사람이 굳이 셔터를 올리고 움직였을 리가 없다. 황급하게 식량을 챙겨 좀비 떼를 놔둔 채 도망쳤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셔터는 사람이 드나들 정도로만 열려 있었다.

그렇다면 그사이 누군가 저 창고에 다녀갔단 소리밖에 되지 않았다. 굳이 좀비 시체를 수거해 갈, 누군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태유준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누가 왔다 간 것 같아요. 좀비 시체가 다 치워져 있어요.”

“말도 안 돼. 대체 누가.”

원혁의 표정이 유례없이 심각해졌다. 그는 혀로 입 안을 한 번 쓴 다음, 미간을 구겼다.

“이 근처에 누군가 있어. 그게 누군진 몰라도 내가 보기엔 우리랑 사이가 좋을 확률은 낮아 보여.”

“제 생각에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뭘 어떻게 할 순 없어. 우린 일단 남가도로 가야 해.”

원혁이 태유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태유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와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사실이었다.

“이 트럭은 남들 눈에 안 띄는 곳에 세워 둬야겠는데.”

“아무 곳이나 빈 창고 안은 어떨까요? 셔터를 내려놓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좋은 생각이야. 차는 숨겨 놓고 식량이랑 음료수 좀 챙겨서 배에 싣자.”

두 사람이 한참 의논을 하던 중이었다. 저 멀리에서 육중한 소리와 함께 저 멀리 화물 트럭의 불빛이 보였다. 열을 맞춰 움직이는 트럭은 총 세 대였다. 보통 크기가 아니라 마치 공사 현장에서 쓰일 법한 초대형 규모였다.

“저, 저기…!”

원혁은 빠른 속도로 시동을 끄고 태유준의 몸을 숙이게 했다.

“쉿. 빈 차인 척하자.”

어떻게 된 일이지. 이 밤중에 갑자기 나타난 저 차는 뭘까. 태유준의 가슴이 불길하게 뛰었다.

두 사람은 숨소리조차 조용히 낮추고 전면 창을 통해 트럭을 살폈다.

“트럭이 멈췄어요.”

“저기 부두 맨 끝에 배 보여? 사람들이 내리고 있어.”

태유준은 눈을 크게 뜨고 원혁이 말한 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부두 끝에 있던 큰 배에서 네다섯 명가량의 사람들이 내렸다. 그런데 주민들이라기에는 좀 묘했다. 전원이 위아래로 시커먼 옷을 입고 검정 헬멧과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누구길래 저기서….”

“손에 든 것 좀 봐. 분무기 같은 걸 들고 있어.”

그들은 농약을 살포할 때 쓰는 듯한 통을 들고 한 손으로 호스를 쥐고 있었다. 그리고 호스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몸에 알 수 없는 액체를 분무했다. 전신이 흠뻑 젖을 만큼 뿌리는 자도 있었다. 태유준이 보기에는 하루 이틀 이런 일을 해 온 것 같지 않게 능숙해 보였다.

곧이어 검은 옷의 사람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뭐라고 소리를 치자, 배에서 무언가가 줄지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펼쳐진 광경에 태유준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 멀리 바다에서 배가 한 대 접근하고 있었다. 상당히 규모가 큰 배였다. 뿌움-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고, 배에서 깜빡깜빡 빨간색 불이 반짝였다.

갑자기 등장한 배와 트럭들. 대체 이들은 뭐란 말인가.

“지켜보자.”

이윽고 배가 부두에 정박을 했다. 큰 배였기 때문에 닻을 내리고 접안을 하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배와 땅을 잇는 가교가 설치된 다음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여러 명이 내렸다. 그리고, 연이어 점프 슈트 좀비가 내렸다.

“…좀비.”

배에서 좀비가 내리다니,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이었으나 더한 충격은 좀비들이 얌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놈들은 아주 느릿하고 또 얌전했다. 개체 수는 한둘이 아니었는데, 어림잡아 백여 마리는 되어 보였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은 자기들끼리 수신호와 대화를 주고받는 듯 보였는데, 능숙하게 좀비들을 이끌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바로 근처에 정차하고 있는 트럭 쪽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의 인솔에 따라 트럭마다 스무 마리 정도 되는 좀비들이 올라탔다. 사다리를 헛짚는 좀비도 있기는 했으나, 일반 좀비와 다르게 이놈들은 어느 정도 지능이 있기 때문인지 곧잘 트럭 뒤 칸에 올라타 똑바로 섰다.

“공격하지 않고 있어요. 어떻게 된 일이죠?”

“내 말이 그 말이야. 아무도 해치지 않고 있어.”

가장 눈길을 끄는 일은 검은 옷의 사람들은 좀비에게 공격당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가끔 대열을 이탈하거나 킁킁대며 사방을 살피는 좀비가 있기는 했으나, 사납게 뛰거나 인간을 공격하는 좀비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사람을 보면 무조건 공격하는 게 아니었단 말인가? 태유준은 혼란과 충격에 휩싸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10여 분의 시간이 흐르자 세 대의 트럭에 좀비들이 모두 올라탔다. 남은 좀비들은 엉성한 대열을 갖춰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이끄는 대로 한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원혁과 태유준이 탄 차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이리로 온다.”

“고개 숙여요.”

태유준은 작게 소곤거리며 몸을 더욱 웅크렸다. 한 손으로는 가위를 꺼내 들어 꽉 쥐었다. 원혁 역시 품 안의 중화도를 꺼낸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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