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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63화 (6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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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좀 봐 드릴게요.”

흠흠. 태유준은 목을 가다듬고 원혁의 오른쪽 옆구리의 흉터를 찾아 시선을 똑바로 향했다. 침대에 앉아 있는 태유준과 원혁의 복부가 얼추 눈높이가 맞았다. 태유준은 원혁의 허리춤을 양손으로 잡고 흉이 진 부위에 얼굴을 바짝 댔다.

상처는 그새 완벽하게 치유되어 있었다. 칼자국 모양의 희미한 흉터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치유해 낸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역시 신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깨끗이 아물다니. 창고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원혁을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이 덜컹거렸다. 상처가 무사히 나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유준은 신께 감사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다 나았어요. 흉터 좀 진 것 빼고는 괜찮아요.”

태유준이 손끝을 내밀어 흉터 자국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고는 원혁을 올려다보며 눈을 맞추자, 원혁이 능청맞게 웃으며 태유준의 눈가를 쓸었다.

“그런 식으로 나 만지면서 올려다보면 안 돼, 유준아.”

“네?”

“나 별로 건전한 놈 아니거든.”

헉. 태유준은 식겁하며 원혁의 몸을 밀쳤다.

“그런 말을 참 뻔뻔하게도 하시네요.”

“어쩌겠어. 네가 좋은데.”

“…이런 말도요.”

태유준은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감쳐물었다. 원혁이 기습적으로 허리를 숙여 태유준의 뺨에 입술을 찍었다.

“형제님!”

“눈 내리깐 게 너무 예뻐서.”

“저, 저는 눈 내리깔지도 못해요?”

“내 생각 하면서 부끄럽다고 눈 내리깐 거잖아. 뽀뽀 안 하고는 못 배기겠는데.”

그 말에 태유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혹시 이 남자는 독심술사인가? 태유준은 순간 원혁 때문에 짜증이 났으나 그보다 더 싫은 건 원혁의 말이 맞는다는 사실이었다. 아, 부끄러워.

“하여간 시간만 생기면 치근거리시네요.”

태유준은 얼굴에 와 닿는 원혁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졌다. 이대로 침대에 있다가는 더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퍼뜩 일어나 TV가 있는 장으로 이동했다. 장을 잘 살펴보니 인스턴트커피와 녹차 티백, 물을 끓일 수 있는 포트, 그리고 생수가 두어 병 놓여 있었다. 커피도 있네요, 태유준이 말하자 원혁이 바로 대답했다.

“믹스커피 마실까?”

“좋죠.”

원혁이 물을 끓이고 태유준이 종이컵에 믹스커피 가루를 부었다. 쪼르르, 물을 부어 커피 가루를 젓자 오랜만에 맡아 보는 커피 향과 온기가 피어올랐다.

“맛있네.”

고급 에스프레소만 마시게 생겨서는 믹스커피도 잘 먹는 원혁의 모습이 새삼스러웠다.

“이게 이탈리아에서 마신 에스프레소보다 더 맛있다.”

“진심이세요?”

“너랑 마셔서 그런가 봐.”

원혁이 커피를 원샷 하고 종이컵을 구겼다. 태유준은 천천히 커피를 식히며 한 모금씩 마셨다. 머릿속으로는 아까 새벽녘에 있었던 교전을 떠올렸다.

“아까 화물 창고에서 본 좀비들이요. 좀 이상했죠?”

“음. 많이 이상하지. 이 동네에 웬 놈의 점프 슈트 좀비가 수십 마리씩이나 나타난 건지 이해가 안 가. 그 전까진 좀비가 거의 안 보이지 않았나? 성당에서 한 마리, 그리고 그 머저리 같은 강림회에서 몇십 마리 마주치긴 했지만 서울에 비하면 정말 적은 수준이었잖아.”

“그리고 거기에 점프 슈트를 입은 놈은 없었죠.”

그런데 마치 일개 부대처럼 나타난 점프 슈트 무리라니.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태유준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때 원혁이 말을 꺼냈다.

“아까 그놈들 번호 봤어?”

“로마 숫자로 된 번호요? 얼핏 보기에… 어, 잠시만요.”

태유준이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떠올리려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거, 엄청나게 길었어요. 로마자 여러 개가 얼굴 한복판을 가로지를 만큼 길쭉하게 새겨져 있었어요.”

태유준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본 좀비들은 한 자리 수, 아니면 두 자리 수의 일련번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르는 수의 좀비가 있다. 그 말인즉슨 최소한 수백 마리의 점프 슈트 좀비가 존재한다는 소리였다.

“내가 확실하게 본 건 CCC라는 문자를 새긴 놈이 많았다는 거야. 대부분 이마에 새겨져 있어서 눈에 띄었거든.”

“CCC…?! 그거, 삼백 단위를 가리켜요.”

“뭐? CD도 있었는데 그건 또 뭐야.”

“그건 사백 번대요. 우리가 맞닥뜨린 놈들 번호가… 무려 삼사백 번 대….”

태유준의 말에 원혁은 인상을 구겼다.

“어쩌면 거기 있던 놈들이 다 연속된 번호였을지도 모르겠군.”

“확인해 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가서 시체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텐데요.”

태유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찝찝했다. 놈들의 일련번호가 백 단위인 것도 문제지만 그게 완벽하게 일련된 번호라면 그게 시사하는 바는 더 컸다.

“만약 그게 다 일련번호라면… 그건 누가 관리하고 있다고 봐야겠지.”

“네. 저도 그 생각입니다.”

“흠. 만약 그렇다면 일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군. 한두 마리만 있어도 위험한데 수백 마리 규모의 좀비를 누군가 관리하고 있다니.”

원혁은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골인시키고 머리 뒤로 깍지를 꼈다. 태유준은 테이블 위에 흘린 커피 방울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누군가가 좀비 군단을 세상에 풀고 있는 것이라면, 그건 왜일까. 그리고 그 주체는 누구일까. 설마 일융제약일까?

머릿속에 새로운 의문이 생겨났다.

어느덧 해가 완연하게 떠올랐다. 두 사람은 커튼을 쳐서 찬 바람을 막고 잠잘 준비를 했다. 암막 커튼 덕분에 방 안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항상 침대가 하나인 방에 당첨된단 말이지. 이렇게 예쁜 유준이랑 같이 누울 수 있다니 난 참 운이 좋아.”

“조용히 하고 누우세요.”

태유준이 먼저 침대에 올랐다. 그는 모로 누워 원혁에게 등을 보였다.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을 하는 원혁을 외면하려 애쓴 것이다. 하지만 단단한 팔이 슬그머니 몸 위로 올라온다 싶더니, 곧 원혁은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태유준을 끌어안았다.

“…놓아주실래요.”

“아니. 싫은데.”

숟가락 두 개가 겹쳐지는 자세로 태유준은 원혁의 품 안에 갇혀 버렸다.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아, 신경 쓰여 죽겠네.

“춥잖아. 붙어서 자자.”

원혁이 태유준의 턱 아래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준 다음 태유준을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솔직히 따뜻해서 기분은 좋았지만 가슴이 뛰는 바람에 편안하게 잠들 수는 없을 것 같아 태유준은 슬쩍 원혁을 밀어 내 보았다. 하지만 돌 같은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곧 원혁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조용해졌다. 태유준은 점점 몸이 더워지며 심장 박동이 빨라져 쉬이 잠들 수 없었다.

나만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자기는 편하게 자네?

태유준은 살짝씩 몸을 비틀어 뒤돌아 누웠다.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있는 원혁이 얄미웠다.

흥.

태유준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원혁을 째려본 다음, 살짝 고개를 들어 원혁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댔다. 쪽. 가벼운 입맞춤 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에이, 망했다.”

잠이 더 안 오잖아.

태유준은 눈을 질끈 감고 원혁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심장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원혁은 잠결에도 제 품을 파고드는 태유준을 꼭 끌어안았다. 누구 것인지 모를 심장 박동 소리가 몸을 타고 전해졌다. 태유준은 심장 박동 소리에 맞춰 하나, 둘, 숫자를 세다가 어느새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깊게 잠든 태유준을 깨운 것은 원혁이었다. 시야도 가물가물하고 정신이 없는 와중, 원혁이 태유준의 귓불을 잘근 깨물었다.

“신부님. 이렇게 날 꽉 껴안고 있었어?”

“헉.”

이대로 잠든 거야? 미쳤다. 태유준은 원혁의 품을 빠져나오려고 용을 썼지만 원혁이 그를 놓아줄 리 만무했다.

“형이랑 마주 보고 자고 싶었구나. 귀여워라.”

“아니거든요.”

“솔직해져도 되는데. 너도 나 좋아하지?”

“그런 이야기가 여기서 왜 나와요.”

“혹시 나 잘 때 몰래 뽀뽀한 거 아니야?”

“그, 그럴 리가요.”

뜨끔한 태유준은 원혁의 쇠사슬 같은 팔을 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알았지? 혹시 자는 척하고 있었던 거 아냐? 태유준은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민망함에 달아오른 뺨을 식히기 위해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어 보니 바람은 여전히 매섭게 부는 중이었다. 눈발도 조금씩 휘날리고 있었다.

“눈 오네요. 진눈깨비는 아니고 확실히 눈이에요.”

“눈? 그럼 바로 출항하기 힘들겠는데. 자칫하다가는 사고가 날 수 있어.”

“아직 눈발이 굵진 않은데…. 지켜보다가 날씨 좋아지면 출발하는 걸로 해요.”

“그래야겠네. 바닷가 날씨는 이러다가 금방 좋아지기도 하니까.”

원혁이 침대를 벗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나저나 배 안 고파?”

“좀 고파요.”

“트럭에서 먹을 것 좀 가져올게.”

“저도 같이 나가요.”

태유준은 원혁을 따라 207호 바깥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와 카운터 앞을 지나갈 때는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숨을 멈췄다. 평안을 빌어 주긴 했지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람 시신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편안하게 지나가긴 어려웠다.

지하 주차장에 세워 둔 트럭으로 다가간 둘은 참치 통조림 몇 개와 옥수수 캔 두 개, 생수 몇 병과 사이다 페트병 하나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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