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62화 (6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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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당첨?”

“네.”

“다음 방은 내가 열어 볼게. 키 이리 줘 봐.”

원혁이 선택한 방은 207호였다. 그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 안쪽을 살폈다.

“여긴 쾌적함 당첨이야. 객실 정리는 안 되었지만.”

누군가 묵다가 황급하게 튀어 나간 듯 샤워 가운이 바닥에 떨어져 있고 이부자리가 엉망이었다. 빗이나 칫솔 같은 일회용품을 담은 꾸러미도 입구가 열린 채로 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시체만 없으면 전 아무래도 좋습니다.”

태유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가지고 온 가방을 바닥에 내려 두고 신발을 벗자 안정감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일단 한숨 돌리기로 하고 모텔 문을 걸쇠까지 동원해 단단히 잠갔다.

“피가 많이 튀어서 우선 좀 씻어야 할 것 같은데요.”

태유준이 찝찝한 옷가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같이 씻을까?”

원혁이 바짝 다가오며 말하자 태유준이 그를 째려봤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사절이에요.”

“곧 그런 사이가 될걸?”

“그럴 리가요.”

태유준은 원혁을 흘겨본 다음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쿵쿵거리며 들어갔다. 사실 원혁의 말에 제대로 반박하기 힘들었다. 불과 얼마 전에 야릇한 자세로 입술을 겹치는 일을 벌인 데다가, 마음속으로는 그를….

“하아.”

태유준은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은 뺨이 살구색으로 물들어 누가 봐도 부끄러워하는 티가 났다. 더 큰 문제는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쑥스러운 웃음을 숨기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심각하다. 저질 농담에 좋다고 웃는 꼴이라니.

평소의 나라면 진심으로 화를 냈을 텐데, 저 남자와 나의 사이가 너무도 달라졌어. 설마 이러다가 진짜로 같이 씻는 사이가 되어 버리는 건 아니겠지?

태유준은 옷을 벗다 말고 혼자 식겁했다.

안 돼, 세례자 요한. 잡생각 떨치고 빨리 씻기나 하자.

그는 서둘러 맨투맨 티를 벗어 던지고 샤워기 아래에 섰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희미하게 녹이 슨 샤워 밸브를 돌리자 질금질금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물줄기에 손을 가져다 대 보니 차갑다 못해 시린 냉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수 쪽으로 밸브를 돌려 보았지만 미지근한 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보일러 가동이 완전히 멈춘 것이 틀림없었다. 설령 시설이 정상이라 해도 그걸 다시 돌릴 재간이 없다. 카운터를 지키던 남자는 죽어 버렸으니 말이다.

찬물이 쏟아지는 가운데 태유준은 눈을 감았다. 몸을 움찔거릴 만큼 물이 차가웠지만 별수 없었다. 어쨌든 간에 물이 나오는 공간에 있다는 게 감사했고 또 다행이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좁은 욕실 안을 가득 채웠다. 태유준은 여러 번 머리를 감고 온몸에 비누칠을 한 후 헹궈 냈다. 그래도 피 냄새는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는 숙명처럼, 피 냄새는 그를 따라다녔다.

이제는 무던해질 때도 되었건만, 항상 피를 뒤집어쓰고 나면 가슴에 추를 매단 것처럼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건 이 피의 싸움에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긴 세월, 아니, 어쩌면 평생 지속될지도 모를, 지리멸렬한 전투의 끝에 남는 건 필시 허무뿐일 테고.

욕실에서 나온 태유준은 온몸의 한기를 떨쳐 내려 두 팔로 몸을 감쌌다.

“찬물밖에 안 나오네요.”

“그럴 것 같았어. 방도 난방이 전혀 안 되네.”

“보일러를 켜 줄 사람이 죽었으니 어쩔 수 없죠. 오늘은 춥게 지내는 수밖에요.”

“난 추워도 되지만 우리 유준이는 어쩌지.”

원혁이 샤워실로 들어가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나오더니, 슬쩍 태유준의 등 뒤로 다가왔다. 태유준은 그와 몸이 가까워지는 것만으로 가슴이 간지러워져서 숨소리를 죽이려 노력했다. 하지만 원혁이 방 한가운데 널브러져 있던 드라이어를 잡고 다가오자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저 남자가 또 어떤 낯간지러운 짓을 꾸미는 건가 싶었다.

“설마 제 머리를 말려 주시려는 건 아니겠죠.”

“왜 아니겠어.”

“저 혼자서도 머리쯤은 말릴 수 있는데요.”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왜죠?”

“형이 네 머리카락 만지고 싶어서 그렇지.”

원혁이 피식 웃으며 드라이어를 켜고 태유준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헤집었다. 따뜻한 바람이 두피를 스치는 감각과 원혁의 단단한 손가락 끝이 주는 힘이 섞여 기분이 묘했다. 원혁은 머리를 말리는 중간중간 기다란 손가락으로 태유준의 목덜미를 스쳤고, 귓불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태유준의 몸이 움찔거렸다.

“저기요. 너무 만지시는데요.”

“그래서 싫어?”

“절 곤란하게 만드는 게 취미예요?”

“응. 새로 생긴 취미야.”

태유준의 앞쪽으로 돌아온 원혁이 태유준의 뺨을 감싸고 웃었다. 얼굴에는 시커먼 핏자국을 묻히고서 소년처럼 웃다니 반칙이었다. 왜 이런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데. 드디어 내가 맛이 갔나? 태유준은 자꾸만 붉어지려는 얼굴을 감추며 원혁에게 어서 씻을 것을 종용했다.

“얼른 씻고 나오세요.”

“알았어. 찬물 맞으면서 정신 차려야지.”

“정신은 왜요?”

“나 지금 신부님 만져서 정신이 혼미해.”

“아, 진짜!”

태유준이 벌떡 일어나 원혁을 욕실 문으로 밀어 넣었다. 시뻘게진 얼굴을 손등으로 식히면서 딱딱한 침대 위에 앉았다. 매트리스와 이불에서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쳤지만 불편함에 인이 박여서 그런지 싫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 않았다. 이 정도만 해도 안락한 잠자리였다. 다만 어쩔 수 없이 피곤함이 따라붙었다.

간만에 ‘벙커’ 사이트나 들어가 볼까?

광화문과 용산 벙커를 벗어난 이후로 특별히 ‘벙커’들의 정보가 필요한 건 아니었지만,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정보를 교류하고 있는 곳이 ‘벙커’였기에 태유준은 가끔씩 사이트에 접속했다. 요 며칠간 정신이 없어 접속을 못 했기 때문에 들어가면 뭐라도 정보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그런데 이상했다. 핸드폰을 켜 사이트에 접속하려 했으나 제대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 서버가 작동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오류 메시지만이 브라우저를 가득 메울 뿐이었다. 여러 번 새로 고침을 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완전한 먹통이었다.

혹시 사이트 주소가 바뀌었나? 아니면 일시적인 접속 오류인가.

태유준은 포털 사이트로 빠져나와 ‘벙커’를 검색하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인터넷 창이 접속 불가 메시지를 띄웠다. 이건 특정 사이트의 문제가 아니라 태유준의 핸드폰이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며칠 전부터 신호가 오락가락하더니, 드디어 인터넷이 끊긴 건가.

태유준은 그때서야 통신사 시그널이 사라졌다는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태유준은 잠시 멍하니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통화 메뉴로 들어가 119를 눌러 보았다. 연결 버튼을 눌렀으나 수화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연결이 불가능하다는 멘트도, 통화 중이라는 안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묵묵한 침묵만이 들려왔다.

“….”

태유준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절감. 태유준이 지금 느끼는 감정은 세상과 유리되었다는 답답함과 먹먹함이었다.

그동안은 신호가 약해도 여러 번 새로 고침을 하면 인터넷이 연결되었고, 전화도 터졌다.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는 인터넷 커뮤니티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통신과 인터넷이 복구될 것이라는 희망조차 생겨나지 않았다. 이대로 영영 세상 그 무엇과도 연결되지 않는다면.

주먹 크기만큼 깨진 창문으로 찬 바람이 들어왔다. 태유준은 몸을 웅크리고 무릎을 감싸 안았다. 원혁이 빨리 씻고 나와 주었으면 했다. 그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뭐 해?”

“깜짝이야.”

뒤를 돌아보니 원혁이 티셔츠를 반쯤만 내린 상태로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옷 좀 제대로 입으세요.”

태유준은 원혁이 나오기를 기다렸던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유준이, 지금 형 걱정해 주는 거야?”

“…그렇다고 해 둘게요.”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

“지금 확인해 봤는데 인터넷이랑 전화가 끊긴 것 같아요. 며칠 전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됐네요.”

원혁은 가볍게 인상을 쓰더니 침대 옆 협탁에 올려져 있던 리모컨을 들어 TV를 틀었다. 치직거리는 화면만 나올 뿐, 어느 채널을 틀어도 방송은 잡히지 않았다.

“TV 방송도 마비네.”

“…이젠 재난 상황을 알리는 뉴스도 없겠죠.”

태유준은 잠시 침묵하며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불과 두 달 사이에 이 세상은 무너졌다. 견고하다고 신뢰해 왔던 모든 사회 시스템은 허물어졌다. 하루 또 하루, 최악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거나, 이 위기를 틈타 제 탐욕을 채우려는 자들에게 착취당하고 있었다. 문명사회를 이루고 있던 도로, 화폐, 국방, 치안은 끝이 났다. 그저 좀비들과 싸우며 목숨을 챙기기에 급급할 뿐인 이 전투는… 언젠가 끝이 나긴 할까.

그리고 이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다 한들, 무엇이 보상으로 주어질까. 상흔만이 남겠지.

“유준아.”

“네.”

“우울하지?”

“…조금요.”

“그럼 우리 멍하니 있지 말고 좋은 거 하자.”

“네?”

태유준이 고개를 들어 원혁을 쳐다봤다. 그는 티셔츠를 걷어 배를 드러낸 채 침대 앞으로 걸어왔다.

“뭐 하는 짓이에요!”

태유준은 얼른 손으로 눈을 가렸다.

“부끄러워하긴.”

원혁이 큭큭 웃으며 태유준의 손을 강제로 잡아 내렸다.

“왜, 왜 자꾸 벗으려고 하세요!”

“어? 나 억울해. 난 그냥 상처 좀 봐 달라고 벗은 건데….”

그 말에 태유준은 슬그머니 곁눈질로 원혁의 복부를 살폈다.

“그렇게 보지 말고 가까이서 좀 봐 줘. 난 각도가 안 나와서 잘 안 보이더라고.”

옆구리라서 각도가 잘 나올 것 같은데? 원혁이 하는 말은 빤히 티가 나는 거짓말처럼 보였으나, 태유준은 잘 빚어진 복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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