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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고양이가 숨어 있었네.”
아직은 새끼 티를 벗지 못한 노란 줄무늬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원혁을 보더니 하악질 하며 꼬리를 부풀렸다. 제 딴에는 위협을 가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원혁은 닁큼 손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고양이는 맹수처럼 입을 벌려 원혁의 손을 깨물었다.
“아!”
“냥!”
태유준이 원혁의 등 뒤로 다가갔다.
“물렸어요?”
“이빨이 조그만데 아파.”
“안녕, 노랑아.”
“노랑이는 또 뭐야.”
“색깔이 노랗잖아요.”
태유준이 고양이에게 손을 뻗었다. 고양이는 흠칫하면서도 그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태유준이 살살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자, 고양이는 이내 유순해져 긴장을 풀고 팔다리를 자유롭게 폈다.
“뭐야 이 고양이, 사람 차별하네.”
“아마 사람을 알아보는 게 아닐까요.”
원혁은 빈정이 상한 듯 인상을 썼다. 그 모습이 유치하면서도 웃겨서 태유준은 웃었다.
“왜 웃는 건데.”
“형제님,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십니까.”
유준의 웃음이 더 커졌다. 그럴수록 원혁은 못마땅할 뿐이었다.
“밥 줄까?”
태유준이 가방에 있던 통조림을 하나 꺼내서 고양이 앞에 놓아 줬다. 고양이는 그르릉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캔 하나를 먹어 치웠다.
“고양이 잘 다루네?”
“고양이 좋아하거든요. 원래 고양이를 키우고 싶었는데 못 키웠어요.”
“왜?”
“양부모님이 질색하셨거든요. 털 달린 짐승은 다 싫다면서.”
그렇게 말하면서 태유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원혁이 툭 말을 던졌다.
“나중에 키우자.”
“나중에요?”
“어. 이 사태가 끝나면. 내가 한 마리 데려다줄게. 내가 밥 치우고 돌보는 거 할 테니까 네가 놀아 줘.”
유준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눈치 없는 자신이라도 고양이를 ‘같이’ 키우자는 뜻이라는 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디서 키운단 말입니까? 전 집도 없는데요.”
원혁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어디겠어, 마이애미에 있는 내 집이지.”
“그 말씀은….”
“간이 프러포즈랄까. 어, 유준이 너 설마 이 사태가 끝나면 휑하니 도망갈 생각은 아니지?”
“프, 프러포즈라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지금은 좀 그렇고, 내가 나중에 정식으로 할게. 부두 앞 창고에서는 모양새가 안 나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 원혁의 얼굴은 마치 소년같이 빛났다. 태유준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유준은 헛기침을 큼큼, 하며 원혁의 말을 외면하려 했다. 하지만 가슴이 이미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며 자꾸만 상상력이 자극되었다.
마이애미 비치란 어떤 곳일까. 동해 바다보다도 더 넓고 푸르른 곳일까? 거기 가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그곳에서 원혁과 함께한다면, 이 지겨운 세상이 막을 내리고 일상이란 게 찾아와 바닷가에서 따뜻한 햇살과 미풍을 느낄 수 있다면….
그새 통조림을 다 먹은 고양이는 볼일을 다 봤다는 듯, 쏙 하니 작은 구멍을 통해 옆 창고로 도망갔다.
“고양이 도망가는 것 좀 봐라. 꼭 유준이 너 같다.”
“제 어디가요?”
“처음 만났을 때 딱 저랬거든. 항상 도망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어.”
“…그랬나요?”
“그래서 더 쫓아가고 싶었어. 놓아주기 싫었고.”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원혁의 눈에 애정이 가득 차 있었다. 태유준은 많이 부끄러웠다.
“그나저나 말인데.”
“네. 형제님.”
“왜 아직도 나한테 형제님이라고 그래? 이제 슬슬 이름 불러 줄 때 되지 않았나?”
“이, 이름이요.”
“우리 사이에 아직도 형제님, 형제님 하는 건 서운하단 말이지. 원혁아, 는 이상하고 원혁 씨, 도 이상하고. 흠, 뭐가 좋을까.”
원혁은 자기 멋대로 호칭을 고르더니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형은 어때. 혁이 형, 은 발음하기 힘드니까 그냥 형.”
유준의 얼굴이 빨개졌다. 형이라니.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그런 호칭으로 불러 본 적이 없었다.
“형, 형이라뇨….”
“어, 방금 했네. 잘했어. 그렇게 해 보라고.”
“그건 됐고요. 배고프지 않으십니까.”
쑥스러운 마음에 태유준은 필사적으로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까 좀 고픈 것 같네. 어, 지금 말 돌린 거 맞지?”
“아, 아니거든요?”
원혁은 말을 더듬는 태유준이 귀여워서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우리 비상식량도 슬슬 떨어져 가는데, 여기를 수색해 볼까? 물류 창고잖아. 잘하면 먹을 게 있을지도 몰라.”
“맞는 말씀입니다, 형, 아니, 형제님.”
“어. 방금 형이라고 하려고 했어.”
“아니라니까요!”
“알았어. 그만 놀릴게. 나가자.”
두 사람은 셔터를 열고 문밖으로 나갔다. 혹독한 강풍이 온몸을 감쌌다. 어느새 내리기 시작한 싸락눈이 섞여서 바람은 유난히도 차갑고 매서웠다.
“날씨 장난 아니네. 눈도 오니까 배 띄우는 건 무리야.”
“오늘 밤에 안 멎을 수도 있겠죠?”
“응. 내일까지 기다려야겠어.”
“…춥네요.”
“추워?”
원혁이 트렌치코트 한쪽 자락을 벌렸다. 태유준이 물음표가 담긴 얼굴로 바라보니, 원혁이 코트 자락을 팔락였다.
“안 들어오고 뭐 해.”
“여, 여기 들어오라구요?”
“어, 유준이 너 춥잖아.”
옷 한 겹만 걸치고 있기에 춥기는 더럽게 추웠다. 안 그래도 급격하게 떨어진 기온에 두 팔로 몸을 감싸 안고 있던 참이었다. 유준은 흠흠, 헛기침을 하며 생각했다. 저 안은 따뜻하겠지, 하지만….
이미 입술도 섞은 사이인데도 낯간지러운 행동을 하려니 부끄러웠다.
“얼른 들어와.”
원혁이 태유준을 확 끌어당겨 코트 자락 안에 넣었다. 맞닿은 곳에서 따뜻한 체온이 피어올랐다.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오지만 전혀 춥지 않은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옆 창고부터 하나씩 수색하기로 했다. 셔터가 반쯤 열려 있어서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태유준이 망을 보고, 원혁이 안쪽을 살피기로 했다.
“여기는 꽝이네.”
둘은 다음 칸으로 가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았다. 식품 수출용 창고였던 듯, 안에는 통조림이 가득했다.
“보물 창고인데.”
“그러게요, 한동안 식량 걱정은 없겠어요.”
통조림의 종류도 다양했다. 과일 통조림, 옥수수 통조림 등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쌓여 있었다. 태유준은 가지고 온 가방에 통조림을 쑤셔 담았다.
“아예 통째로 트럭에 실어야겠어. 고구마만 있었는데 이제는 아주 풍족해지겠는데.”
“그럼 제가 차를 이쪽으로 가져올게요.”
“아냐, 같이 가. 혹시 모르니까.”
둘은 통조림을 뒤로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반쯤 열린 셔터 밖으로 무언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방금 여기로 들어올 때는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태유준은 돌처럼 굳었다. 비록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하체의 일부분만 보였지만 저 옷감을 잊어버릴 수는 없었다.
셔터 바깥으로 보이는 것은 점프 슈트의 다리 부분이었다. 태유준의 눈이 커지며 손이 덜덜 떨렸다.
“저, 점프 슈트…….”
원혁도 이미 상대가 누구인지 눈치챈 상태였다. 그는 중화도를 한 손에 들고, 태유준을 자기 뒤로 감추었다.
쾅쾅! 좀비가 셔터를 세차게 두드렸다. 얼마나 힘이 센지 셔터에 주먹 자국이 생길 정도였다. 쇳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진 탓이었을까.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와 셔터 앞에 섰다.
“젠장. 또 다른 놈이 왔어.”
“몰려들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좀비가 세 마리, 네 마리로 불어나더니 이윽고 뒤에 늘어설 만큼 꽉 찼다. 태유준의 머릿속이 공포로 새하얘졌다.
쾅쾅!
수십 마리의 좀비 떼가 셔터 앞을 막아서고 문을 두드리자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물론 언제까지 여기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셔터 한쪽은 구멍이 났고, 놈들은 지능이 있는 개체이니 셔터를 들어 올리는 방법을 곧 깨달을 테다.
그렇지만 태유준의 손안에 있는 물은 겨우 몇 모금 남짓. 이 적은 양의 물만으로 수십 마리를 해치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두뇌를 회전시켰다. 어떻게 해야 성수를 만들 수 있을까. 물만 있으면 되는데. 이 창고 안에 혹시라도 급수 시설이 있진 않을까?
태유준의 눈이 재빠르게 사방을 스캔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참치 캔, 옥수수 통조림 정도가 전부였다.
“음료…… 음료수라도.”
생수가 없다면 다른 액체라도 되지 않을까. 그는 창고를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러다가 찾아냈다.
“사이다!”
청량음료가 박스째로 놓여 있었다. 태유준은 재빨리 한 묶음을 집어 들어 다시 원혁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게 뭐야.”
“사이다요.”
“어쩌려고.”
“이걸로 성수를 만들 겁니다. 도와주세요.”
태유준은 주머니에 들어 있던 가위로 빠르게 묶음 포장을 해체했다. 그러고는 병뚜껑을 하나씩 열었다.
“잡고 있어 주세요. 제가 손 넣을 테니까.”
“알았어.”
원혁이 병을 고정하고 태유준이 페트병에 손가락을 넣었다. 기포가 올라와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다 됐어요. 이제 뿌립시다.”
“내가 셔터를 열게. 저기 자동 스위치가 있어.”
“그럼 놈들이 쳐들어올 거예요. 그때 맞춰서 소화기처럼 뿌려 버리죠.”
원혁과 태유준은 결의에 찬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원혁이 벽으로 뛰어가 셔터 자동 개폐기의 버튼을 눌렀다. 위잉,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셔터가 올라갔다.
“꿰에엑!”
“꾸악!”
좀비 수십 마리가 창고 안으로 쏟아지듯이 달려 들어왔다. 원혁과 태유준은 페트병을 미친 듯이 흔든 다음 입구를 막고 있던 손가락을 뗐다. 탄산이 터져 나가면서 좀비들이 사이다를 맞았다.
“끄엑!”
“께에엑!”
탄산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파스스, 연기가 피어올랐다. 좀비들의 몸에서 뭉게뭉게 연기가 치솟아 창고 안을 자욱하게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