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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유준이가 내 머리 만져 주면 두통 싹 낫잖아. 그럼 이 상처도 안 아프지 않을까?”
원혁이 피식댔다. 태유준이 생각하기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두통이 나은 건 기분 탓일 테지. 어떻게 피를 멈추고 통증을 가시게 한단 말인가. 하지만 저 남자가 그걸 원한다면 나는 해 주고 싶다.
“혹시 모르잖아. 응?”
원혁이 쓰게 웃었다. 태유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남자에게 가까이 갔다.
“알았어요.”
“진짜 해 주는 거야?”
“그럼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 그의 소원 하나쯤 못 들어줄까.
“똑바로 누워요.”
태유준이 원혁의 등을 받쳐 담요 위에 눕히고 상체를 낮춰 환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 유준이가 나 덮친다.”
“네. 맞아요. 지금 덮치고 있어요.”
원혁은 웃는 소리를 했으나 입가에 경련이 왔다. 눕느라 상처에 통증이 왔나 보다. 태유준은 환부를 만지기가 조심스러웠다. 함부로 손을 가져다 대면 너무 아파하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살짝 거즈를 떼 내어 보니 다시금 상처에는 피가 솟구쳐 있었다.
“나 그거 해 주면 안 돼? 성수 부어 주기.”
“성수요?”
“유준이표 성수.”
“지금 여기 있긴 한데, 그게 무슨 소용….”
“있을지도 모르지.”
태유준은 멈칫했다. 어쩌면 자신의 손을 거친 물은 또 다른 힘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실험을 해 봐서 나쁠 것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원혁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실천해 볼 일이었다.
“알았어요. 아파도 참아요.”
태유준은 가방을 열어 생수를 꺼냈다. 인천에 오기 전 태유준이 만지작거려 ‘성수’로 탈바꿈해 놓은 물이었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물병을 열었다. 그리고 원혁의 환부에 주르륵 물을 부었다.
제발 기적이 일어나길. 이 사람에게 도움이 되길.
태유준은 세상에 태어난 이래 가장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런데 원혁은 뜻밖의 말을 했다.
“어… 안 아파.”
“네?”
“물 부으면 쓰라려야 하는데, 안 아프다고.”
“정말입니까?”
태유준이 황급하게 상처를 살폈다.
“…!”
물에 씻긴 상처가 아까보다 말끔해진 듯 보였다. 단순히 물에 씻겨서가 아니라, 아까보다 출혈이 줄어든 것 같았다.
설마 이거 효과가 있는 건가? 태유준의 손바닥에 축축하게 땀이 차오르고 전신에 긴장감이 돌았다. 만약에 성수가 효과 있다면 자신의 손길은 더욱 쓸모 있을지도 모른다.
“형제님, 제가 지금부터 형제님을 만질 겁니다. 아프면 말씀하세요.”
태유준은 성수로 손을 씻고 후우, 심호흡을 했다. 그는 과감하게 피가 배어 나오는 살갗에 손끝을 가져다 댔다. 원혁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어떤가요.”
“어… 아픈데…. 어… 잠시만.”
원혁의 표정이 미묘하게 가벼워졌다.
“덜 아파. 확실해.”
그는 믿기 힘들다는 듯 말했다. 태유준이 다시 한번 환부를 살피니 상처는 조금 아물어 있었다. 깊게 벌어졌던 붉은 상처가 이제는 분홍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직 피는 흐르고 있었지만 그 양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세상에. 신이시여.
태유준은 탄식했다. 분명히 이 손에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다. 나에게는, 남을 치료하는 힘이 있다. 원혁이 괜한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로 내 손이 닿으면 두통이 나았던 것이다.
더 이상 망설일 것 없었다. 태유준은 고개를 숙여 원혁의 상처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원혁이 움찔하며 태유준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읏.”
태유준은 조심스럽게 원혁의 상처에 입을 맞췄다. 상처에서 배어 나온 뜨거운 피가 입술에 묻었지만 그런 것 따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간절하게, 또 애틋하게 빌며 상처를 입술로 어루만질 뿐이었다.
조금씩 출혈이 줄어들더니 이내 멎었다. 피가 멎은 상처 부위는 아까보다 더 연한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유준은 멈추지 않고 원혁의 상처에 키스했다. 입술을 댈 때마다 조금씩이지만 확실한 변화가 있었다. 태유준은 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놀랐다.
“신부님, 나… 피 멎은 것 같은데.”
“정말…입니다. 멎었어요.”
태유준이 고개를 들어 원혁을 봤다.
“조금만 더 해 볼게요.”
내친김에 이 상처가 다 나을 수 있나 실험해 보고 싶었다. 태유준은 다시 간절하게 기도하며 원혁의 상처에 입을 가져다 댔다. 아주 천천히, 느릿하게 상처는 아물어 갔다. 이윽고 새살이 차오르는 것을 보며 태유준은 가슴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치유되고 있다. 내 힘으로, 내가 이 남자를 낫게 하고 있다.
태유준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원혁을 올려다보았다. 원혁은 어느덧 편안해진 얼굴이었다. 그가 손을 내밀어 태유준의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태유준은 그 손끝에 입을 맞췄다. 비릿한 피 맛인데도 하나도 역하지 않았다. 아니, 단 것도 같았다. 그 증거로 태유준은 혀를 내밀어 그 손가락을 핥았다.
“유준아.”
원혁이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로 태유준을 불렀다. 태유준은 멍하니 그를 봤다. 다시 살아난 자신의 구원자를. 자신이 살려 낸 자신의 구원자를.
태유준의 신은 하나였다. 저 하늘에 계신 분. 그렇다면 원혁은 무엇일까. 태유준은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정의할 수 있었다. 원혁은 신께서 태유준에게 선사해 준 구원자다. 태유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사제의 길을 걸어왔다. 이웃을 돕고 살려 내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 그렇지만 생존을 위해 한때 인간이었던 좀비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죄책감과 부채감에 짓눌려 온 가슴은, 지금 해방되었다.
태유준은 자기 자신이 새로운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 특별한 힘으로 세상을 낫게 하리라. 그리고, 내게 있어 갈비뼈 같은 이 남자를 살려 내리라.
원혁의 손길이 제 허벅지에 체중을 싣고 있는 태유준의 상체로 향했다. 그가 태유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주 느릿했지만 확실한 열기를 품은 손이었다. 태유준은 그 열기에 전염당하는 기분이었다. 알 수 없는 흥분감이 그를 휩쌌다.
“유준아, 이리 와.”
“….”
태유준은 멍하니 원혁을 바라보다가 원혁의 몸 위로 올라탔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제 몸을 올린 다음 다가오는 얼굴에 눈을 감았다.
원혁의 입술이 천천히 태유준의 입술에 닿았다. 조심스럽고 다정한 키스였다.
“내 피 맛은 별로네.”
원혁이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두 사람의 숨결이 엉겨 붙어 하나가 되었다.
“전 좋은데요.”
태유준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가 원혁의 목을 끌어안고 자기 쪽으로 당겼다. 입술을 살짝 벌리자 원혁의 혀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깊게 얽히는 혀를 따라서 원혁의 뜨거운 체온이 태유준에게로 전염되었다.
“하아….”
마주 끌어안은 두 몸이 한 치의 틈도 허용하지 않고 달라붙었다.
덜컹덜컹, 매서운 바람에 셔터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깊이 입 맞추고 있는 두 사람에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숨결과 체온, 그것만이 두 사람의 세상을 채웠다.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가, 이내 아쉬워서 다시 붙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원혁은 유준의 목덜미를 쓸더니 그곳에 입술을 짙게 묻었다. 난생처음 느껴 보는 감촉에 태유준이 흠칫했다. 동시에 떨리는 손으로 원혁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원혁은 피식 웃더니 태유준의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었다. 어느새 태유준의 얼굴은 흥분과 불안,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은 좀 이른가, 우리 아기 신부님한테는.”
“아기라뇨!”
유준이 발끈하자 원혁이 큭큭 웃었다. 그는 태유준의 뺨에 가볍게 키스를 했고, 태유준은 속눈썹을 내리깐 채 가만히 그 키스를 받아들였다.
둘은 한참 동안 그대로 끌어안고 있었다. 원혁이 벽에 등을 기대고, 태유준은 모로 눕듯이 자세를 취하며 원혁의 품 안에 제 몸을 기댔다. 원혁이 태유준의 머리카락에 키스를 하며 말했다.
“이렇게 평화로운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야.”
태유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원혁의 체향, 온기, 단단한 품을 느끼자 잠이 쏟아질 만큼 편안했다.
조명은 접속 불량인지 깜빡여 댔고 밖에는 강풍이 휘몰아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보다 한층 거세진 소리였다.
“풍랑이 심하겠는데. 이래서야 배를 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러니까요. 잦아들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나야 뭐 이대로 계속 이러고 있어도 좋지만.”
태유준을 꽉 끌어안으며 원혁이 말한다.
“밖에 나가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태유준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원혁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대로 잠깐만 있다가 나가.”
“그럴까요.”
그때였다. 창고 한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당탕,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도 함께였다.
뭐지? 태유준은 불안한 눈빛으로 원혁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창고에 들어올 때, 너무나 경황이 없어서 수색을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달은 유준이 하얗게 질렸다. 혹시나 좀비가 숨어 있을 수도 있는데 내가 너무 성급했나. 원혁의 부상 때문에 아무것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내 탓이다.
“쉿.”
원혁이 태유준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더니 태유준을 품에서 살짝 떼어 놓았다. 그리고 품 안의 중화도를 꺼낸 채로 소리가 난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 창고의 가장 안쪽 구석, 나무 상자가 적재된 쪽 뒤에서 나는 소리였다. 원혁이 과감하게 나무 상자를 걷어차자 와장창, 빈 창고에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냐옹.”
그림자의 정체는 고양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