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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혁은 혀를 쯧쯧 차며 전단지를 구겼다. 태유준도 그대로 전단지를 바닥에 버리려 했다. 하지만 기분이 찝찝했다. 좀비들이 판을 치고 있는 시기에 이렇게까지 많은 양의 전단을 살포할 정도면 이 종교의 규모는 상당할 것이다.
이 지역을 어느 정도로 물들이고 있으려나. 조금 걱정이 됐다.
“어서 가자.”
“아, 네.”
원혁의 재촉에 태유준은 다시 걸음을 서둘렀다. 30여 분을 걸은 끝에 그들은 장 박사의 동네 입구에 도착했다. 동네는 마치 개미굴과도 같이 가지가 뻗은 골목길마다 또다시 주택가가 나오고, 거기서 또 길이 갈라졌다. 외지인은 길을 헤맬 수도 있는 구조였다.
“길이 너무 복잡한데.”
“제가 대충 기억하고 있는 건 대문이 남색이었다는 점하고, 그리고 감나무가 마당에 있었어요. 지금은 겨울이라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아, 그리고 바로 옆집 대문은 빨간색이었습니다. 맞은편 집은 소나무를 키우는 꽤 큰 집이었고요.”
몇 가지 단서가 정리되었다. 서로 떨어지면 안 되는 상황이니 붙어 다니기로 하고, 태유준과 원혁은 빠르게 골목을 훑었다. 눈대중으로 소나무부터 확인하고 근처 집의 대문 색깔을 살피자 금방 집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여깁니다!”
태유준이 한 집 앞에서 멈춰 섰다. 태유준의 기억 그대로의 이층집이었다. 대문의 명패는 뜯겨 있었고, 문은 열린 상태였다. 두 사람은 신중하게 문을 밀고 들어섰다. 잔디가 죽은 정원이 작게 자리 잡은 가운데 본채 건물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태유준은 긴장 가득한 손길로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마찬가지로 전혀 잠겨 있지 않았기에 그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장 박사는 평소에 철저하게 문단속을 하는 사람이었으며, 오피스텔 비밀번호도 태유준에게만 알려 주며 주기적으로 바꾸는 등, 철저하게 보안에 신경 쓰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대문도 현관문도 열려 있다니. 이건 무슨 일이 있다는 신호였다.
아니나 다를까. 현관문을 엶과 동시에 태유준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거실부터 난장판이 펼쳐져 있었다.
“…박사님.”
태유준이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응접실 탁자는 엎어져 있었고 의자 같은 집기류는 모두 엉망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시커먼 발자국이 집 안 곳곳을 뒤덮은 모습으로 미루어 보건대 여러 명의 괴한이 이곳에 침입한 듯했다.
“신부님.”
“…박사님이 습격을… 당하신 것 같아요….”
원혁이 태유준을 부축했다. 태유준은 휘청이는 몸을 원혁의 품에 기대며 밭은 숨소리를 냈다.
“2층, 2층에 박사님의 방이 있어요.”
태유준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나무 계단을 올랐다. 2층 복도에는 도자기나 미술품 등이 와장창 깨져 있었고, 장 박사의 방문 또한 개방된 상태였다.
태유준이 앞장을 서고 원혁이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이부자리가 흐트러져 있고, 책상에는 먹다 만 컵라면과 즉석 밥이 올려져 있었다.
“…여기 머물렀던 것 같군.”
“네. 근데 꽤 오래전 같아요. 음식이 심하게 부패해 있습니다.”
“메모 보드에 적힌 글씨도 바랬어.”
원혁이 책상 위의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매직펜으로 알 수 없는 영단어와 일련번호 등을 메모해 둔 글씨가 날아가고 흐릿해져 있었다.
“뭔지 몰라도 찍어 놓자.”
“네.”
태유준이 핸드폰 카메라를 켜서 화이트보드 가까이 다가갔다. 초점을 맞추며 보드 전체를 프레임에 담는데, 거슬리는 글자가 하나 있었다. 장 박사의 글씨체는 맞는데 유독 정갈하지가 않고 날려쓴 것이었다. ‘남가ㄷ’. 그나마도 쓰다 만 단어라, 더욱 눈길이 갔다.
이게 뭐지. 태유준은 눈을 가늘게 뜨며 글씨를 쳐다보았다. 남가당? …남가도인가?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이건 섬 이름일지도 모른다.
“잠깐만요, 형제님.”
“왜?”
“혹시 일융제약 연구소가 어딘지 아십니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섬에 있다거나 하진 않겠죠?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해야 하니까요.”
“연구소라면 보통은 경기도나 서울 같은 수도권에 많이 짓겠지.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손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왜?”
“아니, 여기 섬 이름 같은 게 있어서요.”
태유준이 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원혁이 바로 걸어와 보드를 살폈다.
“남가… 이게 남가도 같다는 말이야?”
“네. 혹시 은밀한 연구를 한다면 외딴섬 같은 곳에 비밀 기지를 짓고 일을 꾸미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원혁이 얼굴을 굳혔다.
“남가도가 실존하는 섬이라면, 장 박사가 힌트를 남기고 간 것 같아.”
“힌트라니요?”
“신부님도 알겠지만 장 박사가 괴한들한테 끌려간 건 확실해 보여. 거실에 나 있는 발자국으로 봤을 때는 최소 서너 명 이상, 남자들이었을 거고 장 박사 입장에서는 속수무책이었겠지. 문제는 이 메모인데, 나는 장 박사가 자신을 끌고 갈 자들이 쳐들어왔다는 걸 알았을 때 이 글씨를 급하게 적은 게 아닌가 싶어.”
“미리 적어 둔 게 아니고요?”
“응. 왜냐면 이 방은 거실처럼 개판으로 어지럽혀져 있지 않잖아. 여기까지 괴한들이 접근하지 않았단 소리거든. 침입자들이 들이닥친 걸 알아채자마자 메모부터 남기고 장 박사 스스로 1층으로 내려간 것 같아.”
듣다 보니 말이 됐다. 태유준이 생각하기에도 이질적으로 튀는 이 글씨는 분명한 힌트였다. 남은 것은 단 하나, 남가도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곳으로 가서 일융제약 혹은 장 박사의 흔적을 조사해야겠지.
태유준이 핸드폰을 열어 인터넷 연결을 확인했다. 요즘 들어 자주 먹통이 되긴 했지만 아직까지 인터넷 신호가 희미하게 잡혔다.
[남가도]
검색 결과: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옹진군에 속한 무인도. 서가도, 동가도, 북가도와 남가도를 묶어 사가도라 부르기도 하는데 다른 세 섬은 유인도인 반면 남가도에는 확인된 인구가 없다.
“어, 있어요. 남가도.”
“어디 봐 봐.”
태유준이 화면을 보여 주었다. 남가도는 인천항에서 서쪽으로 쭉 뻗어 나간 곳에 위치한 무인도였다. 정식 배편도 존재하지 않았고, 여행 후기나 낚시꾼들이 남긴 정보도 없었다.
“설마 이곳에 일융제약이….”
국가 몰래 불법 시설을 짓고 좀비 실험을 하고 있었다면. 그리고 모종의 이유로 장 박사님이 이 장소와 연루되어 있다면?
“일융 본거지일 수 있어. 장 박사가 남가도로 끌려갔을 수도 있겠군.”
“저도 그 생각 중이었습니다. 일융이 여기서 좀비 연구를 하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나도. 그런데 찾아가려면… 음. 배가 필요하군.”
“그렇죠. 인천항에서 두 시간 가야 한다고 하니까요.”
“배 운전이야 내가 자신 있지만 문제는 배가 없다는 사실이군. 지난번 한강에서야 배 키가 꽂혀 있어서 문제없었지만, 여기도 그러리라는 보장도 없고….”
두 사람이 계속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왔다. 둥둥 울리는 북소리와 노랫소리였다.
“뭐야, 이 밤중에 어떤 미친놈이야?”
원혁이 인상을 구겼다.
“아, 잠시만요. 이거 찬송가 비슷한데요? 멜로디나 가사가 약간 변주된 것 같지만.”
“성가?”
“가톨릭 쪽 노래가 아니라 잘은 모르겠지만 얼핏 듣기로는 그쪽 노래입니다.”
“아니. 이 밤중에 찬송가를 부른다고? 동네 좀비 다 깨우겠네.”
원혁이 짜증 가득한 말투로 욕을 뇌까렸다.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어도 제삼자 때문에 좀비가 꼬여 일을 망친다면 못 참을 것 같았다.
“나가서 좀 조용히 만들자. 그래야 동네 좀비들 안 꼬이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하시게요?”
“일단 말로 해 보고, 안 통하면 적당한 방법으로 닥치게 만들어야지.”
원혁이 손가락 마디를 꺾으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의 태유준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두드려 패지 말라고 할 테지만, 지금처럼 시끄러운 상황은 태유준도 용납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 좀비는 한 마리밖에 마주치지 않았지만, 저렇게 시끄럽게 떠들다가는 여러 마리가 꼬이는 건 한순간이다.
“나가죠.”
두 사람은 바깥으로 나왔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찾아서 걷다 보니 금세 소리의 근원지인 건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근처에 있는 낡은 상가 건물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저기예요.”
반지하층의 선팅된 유리창 너머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동네 좀비 다 깨우겠네. 뭐 하는 짓이야. 미친 인간들인가?”
원혁이 짜증스럽게 말하며 유리창을 노려봤다. 그때 태유준의 시야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선팅 창에 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저거, 아까 그 전단지에 있던 거랑 비슷한 그림인데요.”
“천신인지 뭔지 그거?”
“네.”
태유준은 슬그머니 선팅 창 가까이로 다가가 그림을 살폈다. 거기에는 서툴고 조악한 솜씨로 흉측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하얗고 치렁한 옷을 입은 남자가 좀비 떼를 창으로 찔러 무찌르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었다. 그 밑에는 빨간 글씨로 ‘천신강림교 인천총본부’라고 쓰여 있었다.
“아까 그 전단지, 여기가 본부인가 보네.”
“네. 가만 보니까 천신강림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겠어요. 아마 메시아가 와서 좀비를 무찔러 준다, 대충 그런 교리인 듯합니다.”
“메시아고 나발이고 이 빌어먹을 노래 좀 닥치게 해야겠는데.”
원혁은 진짜 건물로 들어가려는 듯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태유준은 식겁하며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때, 벌컥 상가의 정문이 열렸다.
“헉.”
태유준은 깜짝 놀랐다.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좀비가 아니라 사람이었지만, 충분히 놀랄 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처음 뵙는 분들이네요.”
안에서 나온 남자는 이제 갓 성년이 되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젊었으며, 수수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에는 온통 피 칠을 한 채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대체 무엇의 피인지는 몰라도 소름이 끼치는 외관과 비릿한 냄새에 태유준은 경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