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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53화 (53/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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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유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을 생각도 않고, 이를 악물고 원혁을 쳐다봤다.

    원혁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태유준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너를 위해서 잘하고 있다고.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

    “그렇게 살면 안 돼? 그냥 너만 생각하고, 가끔은 날 생각하고.”

    “…어떻게….”

    “난 너만 보면 살맛이 나거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도, 좀비 새끼들 때문에 토악질이 나도. 이상하게 너랑 있으면 이 개 같은 세상에 끝이 있을 것 같아.”

    목소리가 화살이 되어 가슴에 박혔다. 이 악몽에 끝이 있다. 그것은 태유준이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어 하던 소리이기도 했다.

    태유준은 가늘게 턱을 떨었다.

    “…저도…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아니, 믿습니다.”

    희미한 목소리에 떨림이 실렸다. 눈가에 다시 눈물이 차올라 은빛으로 빛났다. 원혁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커다란 손이 태유준의 오른뺨을 감싸고 그대로 끌어당겼다. 태유준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질끈 감았다. 입술이 얽히며 축축하고 뜨거운 기운이 전신을 휘감았다. 마치 깊은 바닷속으로 잠겨 들듯 온몸에 아득함이 번져 나갔다.

    입술은 여러 차례 질리도록 겹쳐졌다. 숨이 모자라 태유준은 원혁의 옷자락에 매달리며 밭은 호흡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 지겨운 시대가 끝난다면, 그때도 당신은 내 곁에 있어 줄 건가요. 태유준은 소리 내지 않고 물었다.

    원혁은 태유준을 숨 막히도록 끌어안으며 키스로 화답했다.

    당연한 걸 묻고 있어.

    * * *

    격정적인 키스 후에 이성이 돌아오자, 태유준은 창피함으로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가까이 오지 마시죠.”

    “아깐 그렇게 좋아 죽더니 왜?”

    “그… 그거는, 자… 잠깐의.”

    “충동이었다고 하기만 해 봐. 다시 뜨거운 맛을 보여 주는 수가 있어.”

    원혁이 짓궂게 말하자 태유준은 입에 풀이라도 바른 듯 조용해졌다. 흠흠, 그는 헛기침을 하며 얼굴을 닦을 것을 찾았다.

    “제 얼굴 지금 엉망이죠?”

    “최상급.”

    “제발 그런 말 좀 그만하세요.”

    “상위 0.1퍼센트.”

    “피랑 눈물 때문에 찝찝한데요. 씻고 싶어요. 옷도 갈아입어야겠고요.”

    “그럼 나랑 화장실 가자. 세수시켜 줄게.”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웬 놈의 세수. 태유준은 이렇듯 원혁이 가끔씩 보여 주는 과보호가 신기하기도 했고, 사실 좀 흥미롭기도 했다.

    “세수를 왜 시켜 주고 싶으신데요.”

    “얼굴 더듬으려고.”

    “하….”

    “나 참, 이라고 하려고 했지?”

    “맞아요.”

    “얼른 화장실 가자.”

    원혁이 태유준을 일으켜 세웠다. 태유준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도 순순히 그를 따라갔다.

    수도에서는 찬물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다행이라면 비누가 있다는 것이었다. 원혁은 태유준의 얼굴에 살살 비누칠을 한 다음 물을 끼얹었다. 손길이 부드러워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 잘하지?”

    “네. 전에 자주 씻겨 주셨나 봅니다.”

    “오, 그렇게 말하다니. 내 과거가 신경 쓰이나 봐?”

    “아니거든요?”

    “이렇게 해 준 사람은 신부님뿐이니까 걱정 마. 물론 질투하는 모습도 깜찍하긴 한데.”

    이 인간 말발에는 못 당한다. 태유준은 더 이상의 논쟁을 포기하고 얌전히 그의 손에 얼굴을 맡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수시켜 준 사람이 자기밖에 없다고 하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힌 후, 태유준은 좀비의 사체를 바깥으로 치우자고 제안했다. 좀비의 체격이 상당했으므로 건물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두 사람 다 힘을 꽤 썼다.

    둘은 성당 앞 도로변에 사체를 내려놓았다. 태유준이 아주 짧게 기도를 올린 후 둘은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가 피정자들의 숙소입니다.”

    아까 맞닥뜨린 좀비가 이곳에 있는 유일한 좀비라고 보장할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은 신중하게 숙소 주변을 살핀 다음 건물로 진입했다.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조인 채 교차로 안전을 검증하고 나서야 비로소 들어선 건물은 별관이었다. 간소하게나마 이불과 베개가 있고, 무엇보다도 잠금장치가 튼튼해 보여 낮 시간을 보내기에 적당해 보였다.

    “그럼 저는 옷 좀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태유준은 실내에 별도로 딸린 욕실로 들어갔다. 가볍게 샤워를 한 다음 티셔츠를 벗어 찬물에 빨고, 물기를 쥐어짜 내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아까의 키스로 가득 찼다.

    어쩌자고 내가 그랬을까. 어쩌면 원혁이란 남자는 간교한 뱀이 아닐까? 아냐. 그렇다고 하기에는 나도 너무 즐겼어. 미친 사람처럼 달려든 건 나도 마찬가지….

    “아. 생각 그만하자.”

    원혁에 대해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이제는 흐릿하게나마 파악이 됐다. 하지만 지금 그 심연을 엿봤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문득 거울을 보니 꼴이 가관이라, 태유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볼은 상기되어 있고 입술은 퉁퉁 부었다. 누가 봐도 나 무슨 일 있었어요, 하는 듯한 뉘앙스에 질려 태유준은 손바닥으로 거울을 벅벅 문질렀다.

    태유준은 새 맨투맨 티와 바지로 갈아입고 욕실에서 나왔다. 원혁은 장 박사의 집에서 가져온 연구 자료를 읽는 중이었다.

    “다 했어?”

    “네. 씻고 옷도 빨았어요.”

    “그럼 나 머리 만져 줘.”

    “또 머리 아파요?”

    “논문이나 들여다보고 있으니 두통이 심해지는 느낌이야.”

    원혁이 앓는 소리를 하며 인상을 가볍게 찌푸렸다. 태유준은 피식 웃으며 제 허벅지에 원혁을 눕혔다. 원혁은 자연스럽게 태유준의 손을 끌어다가 제 이마에 얹었다.

    “머리 아픈 어린양을 치료해 주세요.”

    태유준은 픽 웃으며 원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남자답게 잘생긴 이마를 만져 주자 원혁은 긴장이 풀리는지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좋으세요?”

    “응. 근데 입술로 만져 줘도 좋을 것 같아. 그 각도에서 바로 내려와서 이마에 키스해 주면 안 될까?”

    태유준이 찰싹, 소리 나게 원혁의 이마를 때렸다.

    “아!”

    “키스는 안 돼요.”

    “아까 열심히 했잖아. 두 번은 왜 안 되는데!”

    “됐고 얌전히 좀 있어요.”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며 이불 위에서 장난을 쳤다. 이상하리만치 평화로운 낮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리자 바깥으로 나갈 시간이 되었다. 두 사람은 짐을 꾸린 다음 담벼락을 넘어 성당을 나섰다.

    “이 길을 통해 고지대로 올라가면 공원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서 다시 내려가는 언덕이 펼쳐져요. 그 언덕 아래에 주택가가 있고, 그중 하나가 박사님의 댁입니다.”

    태유준이 대략적인 지리를 설명해 주었다. 동인천역 옆에 위치한 언덕을 관통해야 빠르게 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였다.

    “집은 한번 보면 바로 찾아낼 수 있어?”

    “제가 기억하고 있기도 하고, 아직 문패를 달아 놓은 집일 거예요, 박사님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마음이 안타까워서 아버님 어머님 문패를 떼지 못하고 계신다고 하셨거든요.”

    그렇다면 집 안을 수색하지 않고도 장 박사의 집을 찾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두 사람은 되도록 오늘 밤 내에 장 박사의 집을 찾아내기로 하고, 트럭에 대부분의 짐을 실었다. 다만 차를 타고 가지는 않기로 했다. 어차피 장 박사의 집이 있는 지역은 골목이 비좁아 트럭이 진입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간만에 걸어가네요.”

    “그러게 말이야. 어서 가자.”

    성당에서 동인천 쪽으로 가는 길에는 당연한 말이지만 인적이 없었다. 텅 빈 길에 바람만이 쌩쌩 불어닥치는데, 이상한 것이 원혁의 눈에 보였다.

    처음에는 눈이 내리나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새하얀 종이 쪼가리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모양새였다.

    “뭐지?”

    “어…… 전단지 같은데요?”

    태유준도 종이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누군가가 살포하듯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전단지의 양은 상당했다.

    “뭘까.”

    “잠깐 보고 갈까요?”

    그냥 지나치기에는 종이의 양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두 사람 다 걸음을 멈추기로 했다.

    전단지를 주워 든 그들은 차례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곧 세상이 종말하고 메시아가 온다…….”

    전단지 구석에 좀비 떼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었다. ‘좀비=종말을 몰고 오는 사탄들’이라는 문구도 큼직하게 쓰여 있었다.

    그 아래로는 성경 구절을 어설프게 짜깁기한 원색적인 문구가 가득했다. 대부분 요한 계시록에서 따온 표현으로, 짐승의 표식이니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니 자극적인 표현들을 기발하게 섞어 그럴싸하게 지어낸 문장들이었다.

    신약 성경 내용을 줄줄이 꿰고 있는 태유준으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내용들이었다.

    “종말론자들이군요. 허섭스레기 같은 내용입니다. 요즘 사회 분위기에 유행하기 딱 좋은 키워드라고 생각해요. 좀비가 종말의 징조다, 뭐 이런 거죠.”

    세상이 환난에 휩싸일 때 돈을 벌기 좋은 직업이 있다. 사이비 종교의 수장이 되는 것이다. 태유준도 종교계가 더럽혀지고 온갖 이단이 횡행할 것임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곧 좀비 떼로 인해 멸망이 올지니, 구원을 원하는 자여 이리 오라. 천신님께서 곧 인천 땅에 내려오신다. 만백성은 엎드려 경배하라!]

    “하, 어이없네. 이 천신이 메시아인 것 같은데 동인천에 상륙할 나타날 날짜까지 정해 놨어. 일주일 뒤래.”

    원혁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요.”

    “뭔 놈의 메시아가 인천에 떠? 그것도 다음 주에? 놀고 자빠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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