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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51화 (5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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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혁이 큼지막한 손을 들어 태유준의 등을 쓸었다. 토닥토닥,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는 듯한 손동작이 이어졌다. 태유준은 기분이 몹시도 생경했다. 이 남자를 만난 이래, 이 같은 일이 몇 번 있었다. 스스럼없이 무릎을 베고, 뺨을 쓰다듬고, 몸을 감싸 안았다.

태어나 그 누구도 자신에게 해 주지 않았던 행동들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싫지 않다.

태유준은 눈을 감고 서툰 손길로 원혁의 등을 토닥거렸다. 손길이 너무나 어설퍼 힘을 줬다가 안 줬다가, 그다지 편안한 토닥임은 아니었음에도 원혁은 고른 숨소리를 냈다.

태유준도 곧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어머니, 아버지. 잘못했어요.’

‘넌 끔찍한 아이야! 사탄의 자식이다!’

꿈속이었다. 태유준의 눈앞에 양부모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절 혼자 내버려 두지 마세요.’

‘그 방에서 기도해. 네 안의 악마가 빠져나올 때까지 금식하고 기도해!’

태유준이 팔을 내저어 보지만 양부모는 냉랭하기 그지없다. 부부는 어린 태유준을 방 안에 가두고 바깥으로 나가 버린다. 엉엉. 소리 내 울어 보지만 아무도 자신을 구하러 와 주지 않는다. 모진 말이 상처를 남겨 피가 배어 나온다.

난 나쁜 아이인 걸까. 정말로 사탄의 자식인 걸까. 그렇다면 난…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나.

어린 유준이 엎드려 울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벌컥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트렌치코트를 입은 원혁이 서 있었다.

‘저런 헛소리 듣지 말고 나랑 가자.’

‘네?’

‘시간 낭비야. 얼른 나랑 같이 나서.’

원혁은 태유준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키더니,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태유준은 홀린 듯 원혁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원혁은 이따금씩 태유준이 자신을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어 주었다.

“헉.”

태유준은 퍼뜩 잠에서 깼다. 따뜻한 열기가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이 열기는 뭐지? 보일러도 안 틀었고, 이불도 안 덮고 잤는데….

그다음 순간, 태유준은 열기가 원혁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았다. 아까 등을 토닥이던 자세 그대로 굳어서 잠이 든 것이다.

미쳤구나. 이러고 잠이 들어?!

태유준은 원혁의 품을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돌 같은 품에 갇힌 몸은 절대로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으음. 좀 더 자.”

원혁이 큰 손으로 태유준의 등을 쓸었다. 마른 등줄기에 툭 튀어나온 날개뼈 하나하나를 쓸어내리는 손길이 야릇했다. 원혁은 몇 번이나 그 부위를 더듬더니, 태유준을 더 깊게 끌어안아 그가 숨도 쉬지 못할 지경으로 만들었다.

“숨 막혀요.”

“괜찮아….”

단단하게 밀착된 몸 때문에 태유준은 갑갑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은 편안했다. 이대로 가만히 있고 싶은 충동이 그를 휘감았다.

“더 자도… 되…나요.”

“당연하지.”

결국 태유준은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그대로 계속 잤다. 암흑 같은 잠의 장막에는 양부모도, 상처 입고 굶주린 자신도 없었다. 태유준은 오랜만에 깊이 잠들 수 있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태유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갔지…?

태유준은 방 밖으로 나갔다. 원혁은 거실 소파에 앉아 종이 뭉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뭐 하십니까?”

“아. 깼어?”

“네. 조금 전에요.”

“내가 옆에 없다고 허전해서 깬 거야?”

“아니에요. 그냥 깬 건데요.”

정색하는 태유준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원혁은 큭큭 웃었다.

“이리 와 봐.”

“이게 뭔가요?”

“집에 남겨진 것 중에 볼 만한 게 있는지 찾고 있었어.”

원혁이 손에 들린 서류를 태유준에게 건넸다. 하지만 의학과 화학 쪽으로는 젬병인 태유준 눈에는 어려운 공식과 도식, 전문 용어가 낯설었다.

“요약하자면, 이건 특수형에 대한 연구 결과야.”

“특수형이라면… 점프 슈트 놈들이요?”

“아마 그런 것 같아. 왜냐면 여기 쓰여 있어. 지능은 일반인보다는 떨어지지만 일정 수준 이상임. 신체 능력은 평범한 인간보다 탁월.”

“…그래서 밤에도 우리를 쫓아왔던 놈들이 이상할 정도로 잘 달렸던 거군요.”

태유준은 점프 슈트 좀비들을 떠올렸다. 놈들은 지독하게 빠르고 힘이 셌다. 또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한 놈은 죽은 척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 이 특수형이란 건 일부러 만들어 낸 걸까요.”

“처음부터 작정하고 만들었을 수도 있고, 바이러스가 복제되는 과정에서 변형이 일어났을 수도 있어.”

“하긴. 동시에 만들어졌을지, 돌연변이 진화일지는 알 수 없겠군요.”

원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제가 있어.”

“뭔가요?”

“놈들한테 로마 숫자로 번호가 매겨져 있었잖아. 난 그게 일련번호라고 보거든? 특수형들을 관리하기 위해 생산자들이 새겨 넣은 번호.”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끝 번호가 몇 번인지를 모르겠어.”

수십일까, 수백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수가 존재하는 걸까.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 * *

두 사람은 일단 차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여의도 지하도를 다시 관통해서 트럭이 세워진 곳으로 빠져나간 다음, 트럭을 타고 그대로 서쪽으로 내달려 인천으로 향하기로 이야기했다. 지하도는 한 번 지나온 곳이니 요령이 붙어서 처음 왔을 때보다 빨리 통과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그럼 챙길 것들을 챙겨 나가 보죠.”

“제일 중요한 건 물.”

“맞습니다.”

원혁은 장 박사의 주방을 샅샅이 뒤져 생수병 묶음을 찾아냈다.

“여기에 신부님의 성수를 담아 무기화하자고.”

원혁과 태유준은 나란히 테이블에 앉아 분업을 했다. 원혁이 생수 뚜껑을 따 태유준에게 들이밀면 태유준을 손가락을 담갔다 뺐다. 그러면 다시 원혁이 뚜껑을 잘 닫아 가방에 던져 넣었다.

뭔가 우스운 꼴인 것 같았지만 태유준은 나름 마음을 담아 기도하며 성수를 만들었다.

이 물로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열어 주소서. 아멘.

진지하게 기도를 하고 있는데 원혁이 갑작스레 태유준의 젖은 손가락을 잡았다.

“뭐 하세요?”

“신부님은 손가락도 예쁘네.”

“또 그 소리 시작이시군요.”

“왜 칭찬하는 사람을 노려보고 그래.”

원혁이 소리 내 웃었다. 굵직하게 생긴 얼굴에 비해 웃음이 천진난만했다. 꼭 소년처럼 해맑은 웃음을 보자 태유준은 기분이 묘했다.

나 아까부터 왜 이래? 어디 고장 났나.

그는 원혁이 잡고 있지 않은 손가락으로 가슴께를 꾹, 눌러 보았다.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일단 나서자고. 지금 나가면 딱 좋겠어.”

“네.”

태유준은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나서 문을 닫기 전, 태유준의 시선이 집 안을 향했다.

다시 이곳에 올 일이 있을까.

바쁜 와중에도 늘 나를 다정하게 맞이해 주던 박사님. 마음이 허하고 쓸쓸할 때마다 나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곳.

이것들을 뒤로하고 가자니 쉽사리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처참히 박살 나고 망가진 모습에, 장 박사마저 잃어버린 채로는.

하지만 나아가야 한다. 장 박사를 찾아 다른 곳으로 빠르게 걸어가야만 한다. 이 사태에 끝이 오리라 믿으면서. 그것만이 현 상황에서의 유일한 답이리라.

쾅. 오피스텔 문이 닫혔다. 태유준은 후우, 깊게 숨을 들이쉬고 길을 앞장섰다.

해가 저문 거리에는 느려 터진 좀비들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수가 적지 않아, 놈들을 뚫고 가려면 유인 전술이 필요했다.

원혁은 건물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장 박사의 집에서 가져온 빈 맥주 캔을 힘껏 던졌다. 거리 저 멀리에서 챙그랑 소리가 나자 좀비들은 헐레벌떡 그쪽으로 달려갔다.

‘가자.’

두 사람은 입 모양으로 대화를 나누며 발소리를 죽인 채 걸었다. 지하도 5번 출입구 앞에 도착한 두 사람은 재빠르게 문을 열어젖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가라앉고 눅눅한 공기와 고요한 침묵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둘은 한 손에는 플래시, 한 손에는 생수병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번 와 봤던 길이라 그런지 되돌아가는 길은 초행길보다 훨씬 수월했다. 그래도 어둠 속에서 좀비가 불쑥 튀어나올지 모르는 일이므로 태유준은 못내 긴장이 됐다.

혹시라도 이 안에 점프 슈트 좀비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운이 좋았는지 다시 트럭을 세워 둔 곳으로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좀비를 마주치지 않았다.

마침내 지상 출구로 나온 두 사람은 긴장에 젖은 몸을 이리저리 스트레칭한 다음 트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어서 가요.”

“나도 그러고 싶어.”

트럭이 보이자 점차 발걸음이 빨라졌다. 원혁이 앞서고 태유준은 두어 걸음 떨어져서 걸었다. 그때였다.

트럭을 세워 놓은 곳 바로 옆 가로수. 거기에 좀비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가 휘릭, 철봉을 타듯이 몸을 회전해 땅으로 낙하했다. 원혁과 불과 몇 센티미터를 남겨 놓고 코앞에 떨어진 터라, 원혁은 안주머니 속 중화도를 꺼낼 시간조차 없었다.

“꿰에엑!”

좀비가 아가리를 쩍 벌렸다. 판단은 사치였다. 태유준은 생수병을 열어 있는 힘껏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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