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50화 (5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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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유준은 그 말에 작게 위로받았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이제는 원혁을 믿고 의지해도 좋지 않을까. 혼자만 간직해 오던 치부 같은 것도 다 드러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어떤 모습을 봐도 놀라거나 욕하지 않아 고마웠다. 날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 사람.

태유준의 시선을 느꼈는지 원혁이 눈썹을 까딱거렸다.

“뭐야. 이 뜨거운 눈빛은? 신부님, 나한테 반했어?”

“무슨 소리예요. 누가 반했다고 그러십니까?”

태유준이 바로 정색했다. 원혁은 태유준의 그런 모습조차도 귀여워 웃음을 참지 못했다.

원혁은 황폐한 거실 구석, 넝마가 된 소파에 덜퍽 앉으며 말했다.

“여의도까지 온 게 소용없지는 않았네. 먼저 치료제 부분. 장 박사가 나한테 보낸 치료제 설계도가 좀비 바이러스에 대한 것이라면 이건 대단한 성과야. 지금 이 사태를 한 방에 잠재울지도 모르는 게임 체인저라고. 그러니까 장 박사를 찾아서 설계도의 완성본을 얻어 내야 해.”

태유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비 감염을 확산하지 않으려면, 더 이상 인류가 고통받지 않으려면 치료제만이 답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신부님에 대해서 알게 된 것. 신부님은 좀비에 물려도 좀비가 되지 않아. 그리고 신부님이 가진 석화 능력은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어.”

“이론적으로는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무기화하죠?”

“내 생각을 들어 봐. 일단 무기, 편의상 성수라고 부를게.”

원혁의 말에 태유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성수라니요. 제 손에 닿거나 제가 마셨던 물을 그렇게 부르시는 겁니까? 그건 좀 신성 모독적인 용어 사용인데요.”

“이봐, 이봐. 나는 신자가 아니니까 상관없잖아. 이 시국에 그만큼 강력한 무기라면 나한테는 악마를 퇴치하는 성수급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부르는 거야.”

“…음. 알겠습니다. 방금은 제가 너무 화를 냈네요.”

원혁은 아까 태유준이 마셨던 물컵을 들어 꿀꺽, 삼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좀비를 마주칠 때마다 급하게 물을 마시거나 손을 적셨다가 뿌릴 순 없어. 그건 시간이 많이 걸려. 그러니까 미리 준비해 두자. 내 생각에는 신부님이 손을 담근 물을 생수병에 넣어서 소지하고 다니면 어떨까 싶어.”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면 나도 같이 공격에 활용할 수 있으니 도움이 될 거야.”

“네. 그건 그런데….”

태유준이 말을 멈췄다. 그는 문득 원혁을 쳐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제부터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좀비의 발생에 대해서도, 그 배경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얻었다. 일부나마 좀비에 대항할 수단도 갖췄다. 하지만 두 사람은 아직도 장 박사가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장 박사님을 찾아가야 하는데. 전 그분이 어디 계신지 여전히 모릅니다. 좀비에 대해 알게 되었어도요.”

태유준의 가슴이 뻐근해져 왔다. 너무도 괴로웠다.

주여, 우리는 어디로 가나이까.

갈 곳을 잃은 어린양이 된 듯, 고장 난 나침반만을 손에 쥔 듯 태유준은 막막했다. 그렇지만 원혁은 가볍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태유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함께였다.

“다시 찾아야지.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여기까지 온 것 아니야.”

“…그러면.”

“나는 꼭 장 박사를 찾아낼 거야. 신부님하고 같이.”

“….”

“좀비 치료제 팔아서 떼돈 벌자. 어때?”

태유준이 피식 웃었다.

“성직자는 개인 재산을 가질 수 없습니다.”

“아, 그래? 그럼 안타깝지만 돈은 내가 벌게. 신부님은 즐기기만 해. 내가 다 사 주고 먹여 주고 입혀 줄 테니까.”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일어나.”

원혁이 태유준에게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태유준은 그의 거친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토론을 벌였다. 장 박사가 여기서 도망쳐서 갈 만한 곳. 수습할 문제가 산적한 곳은 과연 어디를 뜻하는가.

“짐작 가는 곳 없어?”

“여의도 말고 몸을 숨길 만한 데라면….”

태유준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장 박사는 워커홀릭으로 연구실 겸 집인 이곳 외에는 드나드는 곳이 없었다. 그 외에는 종교 활동을 위해 성당을 다녔는데, 원래는 태유준의 수도원에 포함된 영동성당을 다녔으나 그마저도 최근에는 발길이 뜸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연고지뿐이었다.

“박사님 고향이 인천이긴 해요.”

“인천?”

“네. 인천 토박이셔서 아직도 부모님과 거주하셨던 집을 처분하지 않았다, 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인천 어딘데?”

“번지수까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시내 쪽이 아니라 아니고 바닷가 쪽입니다. 인천 교구에 유명한 성당이 그 근처에 하나 있어서 박사님이랑 피정을 가다가 그 집에 가 봤어요.”

“그럼 그 동네에 가면 집 찾을 수 있어?”

“네.”

이야기를 정리해 보니 장 박사는 인천에 갔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행적이 묘연한 지금. 기댈 곳이라면 인천밖에 없었다.

“네. 위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어요. 분명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좋아. 인천으로 가자.”

원혁이 태유준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태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그런데 신부님.”

“네.”

“지금 해 떨어지기 전이니까 한숨 진하게 때리자. 어때?”

“좋죠. 어… 그런데 거실에선 도저히 쉴 수 없을 거고요. 침실이….”

태유준의 시선이 침실을 향했다. 당연하게도 그 안에 침대는 하나였다.

대부님의 집에서 남자랑 침대를 써도 되나? 태유준은 잠시 심각해졌다. 그러다가 고개를 퍼뜩 저었다.

건전한 의미로 자는 거니까 괜찮아. 뭐 어때.

“그럼 좀 씻고 자 볼까?”

원혁이 몸을 일으키며 스트레칭을 했다.

“신부님 먼저 씻을래?”

“아뇨. 먼저 씻으세요. 전 나중에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원혁이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후 쏴아 쏟아지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태유준은 괜스레 욕실 문을 한 번 힐끔거렸다가 애써 눈을 돌려 다른 곳을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욕실 안에서 원혁이 맨몸을 드러내고 물을 맞는 모습이 자꾸만 상상되어서였다.

왜 자꾸 저 안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는 거지? 어디에 쓰려고.

태유준은 가슴께에 작은 십자가를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씻는 소리에 집중할수록 죄의식이 몰려드는 것 같아, 아예 욕실 근처를 떠나 주방 식탁에 가 앉았다. 이제 좀 침착해졌나 싶어질 무렵, 욕실에서 나온 원혁은 상의를 입고 있지 않았다.

“헉.”

그의 조각 같은 근육질 몸매를 여과 없이 보게 되자 태유준은 고개를 돌렸다.

“옷, 옷은 어쩌시고 맨몸으로 나오십니까!”

“나? 바지 입었는데.”

“상의 말입니다!”

태유준의 말에 원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신부님. 혹시 나한테 흑심 품은 거야? 왜 이렇게 날 의식해.”

“아, 아닙니다. 흑심이라뇨.”

“난 흑심 환영이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태유준은 그렇게 말하며 딴청을 피웠지만, 그의 귀 끝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원혁은 그 점이 못내 만족스러웠다.

사심을 품어서는 안 돼. 허튼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태유준은 자신 안에 생겨난 변화를 거부하고 부정하고 싶었다. 저 남자가 뭐라고 시도 때도 없이 심장이 발작을 일으키나. 태유준은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싶지 않았으며,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지금은 그랬다.

“저도 씻고 나오겠습니다.”

태유준은 서둘러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찬물 샤워라도 해야지 싶었다.

* * *

두 사람은 장 박사의 옷장에서 입을 만한 옷을 찾았다. 장 박사보다 키가 조금 더 큰 태유준은 그럭저럭 트레이닝복과 반팔 셔츠를 소화해 냈지만 문제는 원혁이었다. 그는 거의 정강이까지 껑충 올라온 바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아니잖아.”

“웃기긴 하네요.”

태유준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원혁이 느닷없이 태유준의 얼굴로 손을 뻗어 입꼬리를 쓸었다. 단단하고 거친 손가락의 감촉이 얼굴에 오롯이 전달되었다.

“혀, 형제님?”

“예쁘네. 자주 웃어.”

그러면서 원혁이 한쪽 눈을 찡긋했다. 태유준은 약간의 짜증과 약간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결론은 또 휘말려 들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장난 좀 치지 마세요.”

“알았어. 그럼 이제 얌전히 누울게.”

막상 누웠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태유준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옆에 누워 있는 남자의 숨소리가 신경 쓰여 잠이 안 왔다.

그 뒤척임을 느꼈는지 원혁이 몸을 돌려 누웠다. 바로 눈이 마주치자 태유준은 머쓱해졌다.

“안 자?”

“안 졸려서요.”

“내가 자장가 불러 줄까?”

“아뇨! 절대 필요 없습니다.”

뭔 놈의 자장가란 말인가. 태유준은 진심으로 정색했다.

“싫으면 토닥여 줘?”

“그것도 별로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네?”

“등이 타들어 가겠더라고.”

“제, 제가 언제.”

쳐다보는 줄 알았구나. 태유준은 너무 창피해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원혁은 그게 뭐 어떻냐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내 등이 좀 잘났긴 하지.”

“그… 그게.”

“우리 서로 등 토닥여 주기로 하자. 신부님은 내 등 만지고, 나는 신부님 등 만지고. 서로 좋잖아.”

“서로 좋다뇨.”

“아닌 척하지 마.”

원혁이 태유준을 품으로 끌어당겼다. 강한 악력에 태유준은 속수무책으로 너른 품에 빨려 들어갔다. 심장이 쿵, 쿵 뛰는 소리가 얇은 옷감 너머 노골적으로 들려왔다. 꼭 맞닿은 가슴뿐 아니라 전신에 진동이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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