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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당연한 이야길 굳이 하시는 거죠?”
“…신부님은 당연해 보이지 않아서.”
“네?”
“방금 신부님한테 그런 느낌이 풍겨져 나왔어. 이제 우리가 한 팀으로 지내는 건 끝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 느껴졌다고. 나한테 벽을 세우는 느낌 말이야.”
태유준은 작지만 확실한 충격을 받았다. 그게 티가 났단 말인가.
만약 원혁이 자신의 이능력에 대해 알게 되면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혹은 거기까진 아니더라도 두려움과 멸시의 대상이 되진 않을까 싶었다. 그걸 상대방이 다 눈치챌 정도로 얼굴에 대놓고 드러내고 있었다니. 태유준은 창피하고, 또 자기 자신이 한없이 나약하게 느껴졌다.
“그… 그게.”
“왜 갑자기 이래? 이젠 나랑 같이 다니기 싫어?”
“그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원혁이 태유준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장난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 안에는 자신을 떠나지 말아 달라는 진심이 어려 있었다. 태유준은 이제 이 남자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 사람은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몇 번이나 좀비로부터 내 목숨을 구해 주고 함께 싸워 준 사람이다. 하물며 좀비에 물렸을 때도 날 공격하지 않았다. 되레 죽여 달라는 내 부탁에 오히려 화를 냈던 사람이다. 그뿐인가. 한번은 호텔에서도 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이 남자의 눈에는 진심이 묻어났다.
태유준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데.”
“…형제님이야말로 이 이야기 듣고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대체 뭐길래.”
“…저는요. 남들과 다른 능력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어릴 때요.”
그 말에 원혁이 몸을 곧추세우며 입을 다물었다. 그가 진지하게 듣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태유준은 조금 용기가 났다. 주먹을 세게 말아 쥐고, 태유준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물이나 불을 자유롭게 다뤘습니다.”
태유준은 한 번 숨을 고른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중력도 제어할 수 있었고요. 그 능력을 억제하려고 굉장히 애썼어요. 양부모님이 기겁하셔서. 그러다가 어느 날 능력은 사라졌고, 지금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어쩌면 그때 그 능력이 좀비한테 물리면서 다른 쪽으로 발현이 된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태유준이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눈을 들어 원혁을 바라봤다.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헛소리나 지껄이는 미친놈 취급하는 건 아닐까. 어떤 대답이 들려올까 긴장이 극에 달할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힘들었겠네.”
“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고 캐묻는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대뜸 힘들었겠다니. 무슨 말인가 싶었다.
“남들하고 다르다는 건 힘든 일이잖아. 남들이 희한한 눈으로 보니까 말이야.”
“아… 그랬죠.”
“그런데, 난 아무래도 신부님한테 다시 반한 것 같아.”
“뭐라고요?”
“초능력 있는 애인이라니. 너무 근사하지 않아?”
“저기요. 애인은 누가 애인입니까.”
태유준이 도끼눈을 떴다. 원혁은 태유준의 뺨을 톡 건드렸다. 태유준은 버럭 화를 내며 원혁의 손을 치워 냈다.
겉으로는 뾰족하게 반응했지만 속으로는 그가 고마웠다. 하지만 묻고 싶은 것도 있었다.
“…제가 징그럽지는 않으십니까?”
그가 그렇게 묻는 것은 당연했다. 이 능력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 그의 양부모가 보인 반응이 그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원혁은 기지개를 켜며 그게 뭐 어떻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 능력도 신부님의 일부분이잖아. 그리고 원해서 가진 능력도 아니고. 그걸 왜 혐오해?”
“…정말이세요?”
“나 빈말 안 하는 거 알면서.”
태유준은 몸무게가 10킬로그램쯤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오랫동안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을 털어놓은 대가는, 후련함이었다. 그리고 원혁의 그 말에 위안을 느꼈다. 이 남자는 항상 생각하지 못한 형태로 자신을 위로해 준다. 지금처럼.
“기분 좀 괜찮아?”
“네?”
“말하고 나니까 기분 괜찮아졌냐고.”
“…음. 네. 그렇습니다.”
“그럼 다행이네. 신부님,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일에 협조 좀 해 줘.”
원혁이 짐짓 심각한 눈빛을 띠었다.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
“여의도 지하도에서 신부님의 힘만으로 좀비를 석화한 게 맞는지, 그렇다면 어떤 메커니즘으로 그렇게 되는지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실험을 해 보자.”
원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실험하겠다는 겁니까?”
“오는 길에 좀비 시체가 많았잖아. 손가락 좀 잘라 와서 시험해 보려고.”
태유준은 식겁했다. 아무리 죽어 나자빠진 시체라 해도 몸을 잘라 낸다는 건 흉측하고 끔찍했다.
“역겹다는 표정이네. 걱정 마. 나 혼자 갔다 올 테니까.”
“혼자는 위험합니다.”
태유준이 일어나 원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원혁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태유준의 어깨를 치워 냈다.
“여기서 의문점을 풀고 가야지. 마침 밖에 시체가 널렸고, 여긴 실험하기 적합한 환경이야. 물론 개판 오분 전으로 깨졌지만 실험용 도구들도 몇 개 남아 있고.”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제 일이기도 하니까요.”
태유준이 용기를 내 말했다. 원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같이 나가자.”
* * *
오후의 거리에는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스산한 겨울의 햇빛이 추운 공기를 헤치고 빛줄기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와중에 좀비 몇 마리만이 비척비척 돌아다녔다.
태유준은 건물 벽에 숨어 망을 봤다.
‘지금 가도 됩니다.’
그가 수신호를 주자 원혁이 재빠르게 인도에 쓰러진 좀비 한 마리에게 다가갔다. 그는 품에서 중화도를 꺼내 좀비의 손가락을 얻어 냈다. 장 박사의 주방에서 가져온 랩으로 손가락을 둘둘 싸맨 후, 그는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혹시나 좀비가 내 손가락을 내놓으라고 쫓아오지는 않을까, 본능적인 두려움 때문에 태유준은 몇 초에 한 번씩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두 사람은 무사히 손가락을 가지고 오피스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장 박사의 연구용 데스크에 나란히 선 원혁과 태유준은 랩을 꺼냈다. 원혁이 핀셋으로 손가락을 집어 들어 샬레 위에 놓았다. 태유준은 그 손가락을 쳐다보기가 굉장히 겁났으나, 지금은 물러설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의연해지려 애썼다.
“신부님이 지하도에서 좀비한테 던졌던 물. 그 물은 뭐가 달랐지?”
“그냥 호텔에서 가져온 생수였죠. 물 자체는 평범했어요. 맛도, 색깔도.”
“다시 한번 그때 기억을 되살려 보자. 그 물에 뭐가 섞일 일은 없었어. 맞아?”
“네. 딱히 그럴 일은 없었죠. 그 물이 어쩌다가 나왔냐면… 제가 좀비에 물린 다음에 형제님이 저한테 그 물을 주셨던 것 같은데….”
거기까지 이야기한 둘은 눈을 마주쳤다.
“마시던 물?”
“네. 제가 마시던 물이었죠.”
원혁은 잠시 아래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기는 듯 말이 없어졌다. 그러더니 잠시 후 입을 열었다.
“가설이긴 한데, 신부님과 접촉했다는 것 자체로 물에 변화가 생긴 건 아닐까?”
“네? 설마 그럴까요.”
“지금으로서는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들어. 한번 실험해 보자.”
태유준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한때 자신은 물과 불을 마음대로 다루는 이능력자였다. 어쩌면 어릴 적 발현한 힘의 영향이라면 이능력이 좀비를 퇴치하는 쪽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습니다. 실험해 보죠.”
원혁이 곧 싱크대에서 물을 두 컵 받아 와 테이블에 나란히 늘어놓았다.
“왼쪽 컵은 가만 놔두고, 오른쪽 컵에 든 물만 마셔 봐.”
“네.”
태유준이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원혁은 비커 하나에 태유준이 전혀 손대지 않은 물을 붓고 좀비의 손가락을 빠뜨렸다. 절단된 단면에서 시커먼 핏물이 우러나올 뿐 손가락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좋아. 이건 아무 일도 없어. 그러면 이번에는 마신 물을 부어 보자고.”
원혁이 다른 비커에 태유준이 입을 댄 물을 부었다. 그리고 다른 손가락 마디를 빠뜨렸다. 태유준은 긴장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심장이 떨렸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치솟았다. 그리고 이내 손가락은 돌처럼 굳어 부스러기를 남기는 듯싶더니, 산산이 흩어졌다.
“이, 이럴 수가.”
태유준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지금 이 손가락의 모습은 지하도에서 생수를 맞고 굳어 버렸던 좀비의 모습과 동일했다.
“역시 내 가설이 맞았군.”
“정말로 제… 제가.”
“다른 실험도 해 보자. 입이 아니라 손이 닿는 것도 해당되는지 보자고.”
원혁이 넓적한 접시에 수돗물을 부은 다음 태유준더러 손을 담가 보라고 했다. 태유준은 아주 짧게 손바닥을 적셨다. 그 접시에 좀비의 손가락 한 마디를 넣자, 마찬가지로 연기가 끓어오르며 석화 현상이 일어났다.
“마치 악마를 퇴치하는 성수 같군. 영화에서나 보던 거 말이야.”
“…제가….”
“당황스러운 마음 이해해. 나도 그런데 신부님은 오죽하겠어.”
어떻게 보면 태유준은 이 상황에서 최고의 무기를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좀비에 물려도 전염되지 않는 데다가 좀비를 완벽하게 해치울 수 있는 능력까지 지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유준은 지금의 상황을 기껍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저 얼떨떨하고 멍할 뿐이었다.
내 능력이 돌아왔구나. 어릴 적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조차도 모르는 사이에.
“신부님과 닿은 물을 뿌리면 좀비가 석화된다고 봐야겠군.”
원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총보다 나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