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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먹을 만한 게 좀 있네. 커피류가 정말 많아. 인스턴트 수프랑 냉동식품도 많고.”
“네. 연구 때문에 툭하면 밤을 새우셨으니 레토르트 식품을 자주 드셨죠.”
“내가 수프라도 데워 줄게.”
원혁은 개판이 된 주방으로 들어가 쓰레기와 가구의 파편을 발로 툭 차고 자신이 설 공간을 만들었다. 찬장 안의 그릇을 뒤지면서 그가 태유준에게 물었다.
“장 박사한테 실망했어?”
“…명확하게 예나 아니요로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긴.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기 어렵겠군.”
“장 박사님은 저를 평생에 걸쳐 돌봐 주신 고마운 분이시고, 이 사태의 원인이 되는 연구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장 박사님이 의도한 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동시에 장 박사님이 연구하지 않았더라면 이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원혁은 다 깨진 그릇 중 그나마 멀쩡한 볼을 꺼냈다. 하지만 그놈도 이가 나가 있는 그릇이었다. 흠결이 없는 그릇을 찾기란 불가능해 보여, 그는 그냥 그 그릇에 가루 수프와 물을 붓고 전자레인지를 돌렸다.
전자레인지가 일을 하는 동안 원혁은 눈을 내리깔고 핏기 없는 입술을 깨물고 있는 태유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걱정과 염려 가득한 얼굴 앞에 수프 그릇을 놓은 다음 태유준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신부님 말이 맞아. 하지만 일융제약은 장 박사가 아닌 다른 누구라도 시켜서 이 연구를 했을 거야. 신부님이 가장 잘 알잖아. 장 박사가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수프 그릇에 손을 가져다 대자 따끈한 온기가 피어올라 태유준의 몸을 덥혀 주었다.
신부님이 가장 잘 알잖아.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태유준은 수프를 떠먹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우고, 태유준은 원혁이 타 준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정도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그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마음을 알기에 원혁은 그를 가만히 놔두었다.
커피 잔이 비면 다시 커피를 채워 주었고, 따뜻한 물도 한 잔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집 안에서 담요를 찾아다 무릎에 올려다 주었다. 태유준은 그것을 덮고 몸을 웅크렸다.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힌 태유준이 컵을 씻고 테이블로 돌아와 원혁을 똑바로 바라보자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형제님. 그 신약 설계도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 특수 단백질을 지닌 사람이라는 건 뭐고, 그 단백질을 이용해서 약을 만든다는 게 무슨 이야기인지 잘 와 닿지가 않습니다.”
“그건 내가 간단하게 설명해 줄게.”
원혁이 검지를 쫙 편 다음 태유준을 쿡, 찌르듯 가리켰다.
“예를 들어 신부님한테 심장병을 강인하게 이겨 내는 유전 정보가 있다고 치자. 이건 신부님의 고유의 특징이고, 부모님께 물려받은 선천적인 유전 인자야.”
“네.”
“그런데 내가 심장병이 있다면 어떨까. 난 그런 유전 인자가 없으니까 인공 치료제가 필요하겠지.”
원혁이 이번에는 자신을 가리켰다.
“그렇겠죠.”
“그때 아무 약이나 먹어서는 소용이 없다고 쳐 봐. 절망에 빠진 나는 신약을 찾겠지. 그런 환자들이 신부님의 DNA를 응용해서 만든 약을 먹는다면 효과가 아주 좋지 않을까? 이런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연구가 바로 아까 그 논문에 실린 내용들이야. 쉽게 말해서 환자 스스로가 심장병을 이겨 내는 체질인 것처럼 항체를 몸에서 만들어 내서 질병을 극복한다는 거지.”
“아… 이해가 됩니다. 나한테는 결핍된 유전 인자를 타인한테 복제해 온다는 소리네요.”
“맞아. 그렇지만 난 이해가 안 가는 게, 좀비는 일융에서 만들어 낸 인위적 존재잖아. 이 좀비 바이러스를 이겨 내는 유전 인자를 누가 지녔는지 어떻게 알지? 그런 사람이 처음부터 존재하고, 그 사람의 유전 인자를 보유하고 있어야 치료제를 만들든지 말든지 할 텐데. 그건 좀 미스터리야.”
원혁이 고개를 저으며 수첩을 휘리릭 넘겼다. 그의 눈에는 영어로 된 부분도 화학식이 등장하는 부분도 이해가 잘되었기에 수첩 넘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어…?”
그러다가 원혁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다. 한 피험자에 대해 오랜 기간 추적해 온 관찰 결과가 기록된 부분이 나온 것이다. 메모는 아주 빼곡하고 치밀했으나, 연구 대상이 누구인지 이름과 성별, 나이는 나와 있지 않았다.
그저 피험자의 영양 결핍을 조사하던 중 혈액에서 특이점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후 매년 1회씩 채혈을 해서 DNA 분석을 했다는 내용만이 남아 있었다.
“신부님. 어떤 실험 대상자에 대한 내용이 있어. 개인 정보는 없고, 영양 결핍을 연구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피험체다, 매년 피 검사를 할 때마다 특수 항바이러스 인자가 꾸준히 발견되고 있다, 라고만 적혀 있네.”
“…특수 항바이러스 인자요?”
“이건 나도 조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인데, 이 피험자는 현존하는 모든 바이러스에 항체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고 쓰여 있어. 이런 체질이 가능한가? 하지만 매년 새롭게 테스트를 해 봐도 늘 같은 결과가 나왔다는데.”
태유준의 입가가 조금씩 굳어 갔다.
“혹시 최초로 채혈한 연도가 언제입니까?”
“지금으로부터 8년 전.”
8년 전이라면 태유준이 양부모에게 능력을 들켜 처음으로 푸대접을 당하던 그 당시의 연도다. 그때 장 박사는 앙상하게 마른 태유준의 건강을 챙겨 주겠다며 채혈을 했었다. 그리고 적절한 영양제 처방을 해 줬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마지막으로 채혈한 시기는요?”
“올해 9월 15일.”
맞다. 9월 15일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이곳에 와서 피를 뽑았던 그날이다. 피를 뽑은 며칠 후, 장 박사는 매년 그랬듯이 결과를 이야기해 줬다. 건강에 별다른 이상은 없다는 말뿐이었다.
“신기한데? 이 리포트대로라면 이 피험자는 좀비에 대해서도 면역력이 있을 확률이 99퍼센트래. 사실 바이러스라는 게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될 만큼 기본 구조가 비슷하거든. 그렇다면 이 추측은 일리가 있어.”
원혁이 수첩을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태유준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신부님. 표정이 왜 그래?”
“…이거 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태유준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원혁이 되물었다.
“날짜며 특징이 일치해요. 8년 전 여름… 영양 결핍 상태를 체크하기 위해 처음 채혈을 시작했다는 부분이요. 그때 사실 양부모님이 식사를 제때 주지 않아서….”
태유준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치부를 드러낸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이 마지막 채혈 일자, 제가 이곳에 마지막으로 왔던 날짜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원혁이었다.
“그렇다면 설명이 되네.”
“뭐가요?”
“신부님이 물리고도 멀쩡한 이유.”
“아….”
또 하나의 퍼즐이 풀렸다. 태유준은 놀라면서도 안도했다. 이 연구 자료대로라면 자신은 좀비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항바이러스 인자라는 것 덕분에.
태유준은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긴장의 끈이 확실히 풀려, 몸이 느슨해졌다. 원혁은 거의 테이블로 엎어지려는 태유준을 한 팔로 받쳐 주었다.
“고맙습니다.”
“고맙긴. 그런데 아직도 설명이 안 되는 게 하나 있어.”
“뭐가요?”
“신부님이 좀비로 변하지 않은 건 납득이 돼. 그런데 좀비가 돌로 변한 사건 말이야. 그건 대체 뭐지?”
태유준과 원혁의 눈이 마주쳤다. 맞는 소리였다. 단순히 몸속에 항체가 있다는 것만으로 좀비를 석화할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 그게.”
태유준은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자신도 그 이유에 대해 짚이는 바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이능력. 한동안 잠잠했던 능력이 원인이지 않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안 그래도 좀비 사태를 맞이하고 나서 혹시 그 능력이 튀어나오지는 않을까 정신을 집중해 본 적도 몇 차례나 있었다.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이 좀비 바이러스 때문에 다시 능력이 깨어난 건 아닐까? 그것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던 형태로 깨어난 것이라면?
태유준은 갈등이 됐다. 원혁에게 이능력을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할까? 물론 자신의 생각은 그저 짐작일 뿐이었고 어떠한 과학적 근거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별난 인간’이나 ‘괴물’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었다. 원혁 또한 양부모처럼 자신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면 어떡하나. 태유준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다.
“신부님.”
“네?”
생각에 잠겨 있던 태유준은 퍼뜩 놀랐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초조하기도 했다.
“신부님, 지금 딴생각하지.”
“아… 아닙니다.”
“그래? 그러면 나 부탁 하나만 들어줘.”
“뭐… 뭡니까.”
태유준이 소심하게 물었다. 원혁은 진지하게 태유준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그의 손을 잡아 왔다.
“원래 우리 여의도까지만 동행하기로 했었잖아. 그런데 장 박사 없으니까 계속 그 사람 찾을 때까지 동행해야 돼. 알겠지?”
“아, 뭐 그런 이야길.”
태유준은 맥이 풀렸다. 대체 왜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지? 조금 어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