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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47화 (4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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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만. 박사님은 절대로 저 뚜껑을 닫아 놓지 않으셔. 드럼 세탁기는 습기가 잘 찬다면서, 저 뚜껑을 열어 놔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셨지.

태유준은 묘한 위화감에 세탁기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안에는 빨랫감으로 추정되는 옷이 들어 있었다.

뭐지. 빨래할 때가 아니면 옷가지를 안에 넣어 놓지 않는 분이신데? 세균이 번식할 수가 있다면서 절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나한테도 신신당부하곤 하셨어.

이번에도 이상한 기분을 느낀 그가 세탁기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 안에 든 것을 보고서, 태유준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형, 형제님.”

“왜.”

어질러진 책상 위를 살피던 원혁이 뒤를 돌았다. 그는 태유준이 손에 쥐고 있는 옷을 보고 얼음처럼 굳었다.

“점프 슈트가… 여기 왜 있죠.”

태유준이 국방색 점프 슈트를 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의 눈에는 의혹과 경악, 공포가 한데 섞여 있었다.

원혁은 빠르게 태유준에게 다가가 옷가지를 낚아챘다. 국방색에 윤기 나는 옷감, 후드가 달린 옷은 틀림없이 좀비들이 입었던 디자인 그대로였다.

“…점프 슈트. 이게 왜 박사님의 집에… 대체 왜…?”

“흠…. 집 안을 좀 더 살펴봐야겠는데.”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태유준은 혼란스러웠으나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잠깐 숨을 고른 후 태유준은 원혁과 함께 거실부터 수색하기 시작했다. 우선은 장 박사의 연구 데스크 위를 살폈다.

대부분의 종이는 찢어져 있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문서들은 커피 혹은 시료로 추정되는 액체에 흠뻑 젖은 상태였으므로 글씨를 알아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거실에는 눈여겨볼 만한 게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박사님이 제 발로 집을 나섰든, 누군가에게 끌려갔든 중요한 문건이 있었다면 함께 사라져야 말이 됩니다. 즉, 거실에는 쓸 만한 물건이 없단 뜻입니다.”

“일리가 있어.”

“그런데 박사님이 늘 소지하고 다니시던 가방이 보이지 않네요.”

태유준이 불안한 눈길로 거실을 훑어보며 말했다.

“가방?”

“겉보기에는 서류 가방처럼 생겼지만 안에는 총이 들어 있는 가방이요. 박사님은 안전을 위해서 집 안에 몰래 총을 숨겨 놓으셨거든요.”

태유준은 거실 수납장에 빼곡히 정리돼 있는 가방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분명 딱 한 개, 그 가방만 사라졌다.

“그럼 장 박사는 무사히 피신했을 확률이 높아. 누군가가 밖에서 총을 쏘고 들어와서 장 박사의 집을 어지럽히고 납치를 시도했지만 총을 가지고 잘 도망쳤다고 보는 게 맞겠군. 그러니 용산 벙커까지 흘러들어 올 수 있었던 거고.”

“네. 부디 그랬길 바랍니다.”

태유준은 작게 성호를 그으며 장 박사를 위해 기도를 바치려 했다. 그때 퍼뜩 연상되는 것이 있었다. 가방 말고도 이 집 안에는 비밀스러운 물건을 숨겨 놓은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준아. 아저씨는 중요한 물건을 바깥에 꺼내 두지 않아.’

‘그럼요?’

‘깊숙한 데 넣어 놓지.’

어릴 적 스치듯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장 박사는 이 오피스텔이 아닌 단독 주택에 살며 지하에 연구실을 꾸렸었다. 당시 호기심 많은 열세 살 태유준은 신기하고 비밀스러운 물건을 보여 달라며 장 박사를 조르기 일쑤였는데, 그럴 때마다 장 박사는 기발한 곳에서 희한한 색깔로 염색된 바이러스 샘플이나 기묘한 모양의 화학 결정체 등을 꺼내 보여 주었다.

서랍장의 맨 아래 칸에 비밀 수납 장치를 만들기도 했고, 벽을 밀면 작은 방이 나오는 구조를 갖추기도 했었다. 어린 태유준은 그게 참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장 박사의 성격상 이곳에도 분명 비슷한 장치를 해 두었을 것이다. 이 연구소를 불순한 목적으로 찾은 누구라 해도 털어 가지 못하도록, 아주 은밀하게.

“방 안에 중요한 물건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침실 안에?”

“네. 느낌이 그래요.”

태유준이 침실로 향하자 원혁이 그의 뒤를 따랐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간 태유준은 안쪽을 가볍게 훑어본 다음 옷장으로 향했다. 겉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오피스텔에 옵션으로 딸린 붙박이장이었다.

“옷장이 수상해?”

“네.”

태유준이 옷장 문을 열고 내부를 꼼꼼하게 살폈다. 옷들을 한 손으로 치워 낸 그는 뒤판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의식을 집중해 살피니 새끼손톱 크기만 한 홈이 보였다. 태유준은 손을 뻗어 그 홈에 손가락을 꽂고 판자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곳에서는 두툼한 수첩이 한 권 나왔다.

태유준과 원혁은 흠칫하며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설마 했는데 진짜로 물건이 남겨져 있었다니.

“제가 열어 보겠습니다.”

태유준이 수첩을 꺼내 겉표지를 대강 살폈다. 아주 두껍고 무거워 거의 책처럼 느껴질 만큼 페이지가 무척 많은 수첩이었다.

“일부러 두고 간 걸까. 아주 비밀스러워 보이는데, 안 챙겼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신부님이 와서 볼 가능성을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군.”

태유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손끝이 떨려 왔다.

만약에 내가 찾아올 경우를 상정하고 깊숙하게 숨겨 놓은 것이라면 이 안에는 많은 비밀이 담겨 있을 것이다. 대체 어떤 내용일까.

그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태유준과 원혁은 거실로 나와 조심스럽게 첫 페이지를 펼쳤다.

[일융제약 프로젝트 기록]

심플하게 제목을 매긴 수첩은 중구난방으로 낙서가 되어 있었다. 대체로 무엇인지 알아보기 힘든 화학식, 연락처, 일정에 대한 메모가 여러 장에 걸쳐 적혀 있었다.

태유준은 몇 장을 더 넘겼다. 순간 멈칫하게 되는 구절이 있었다.

[만약 인간이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는 유전자를 지닌다면 어떨까. 그게 나한테 던져진 과제다.]

장 박사가 휘갈겨 쓴 글씨를 보고 태유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불로불사라면 좀비를 가리키는 의미일 수 있다. 대체 박사님은 좀비와 어떤 연관이 있으신 걸까.

태유준의 머릿속에 회오리가 몰아쳤다.

“불로불사….”

그리고 그 아래에는 영문으로 적힌 논문명이 세 개 있었다.

“신부님. 이 논문들 말이야. 장 박사가 나한테 보낸 신약 설계도의 근간 자료 같은데.”

“그래요?”

“응. 이 논문이 뭐냐면 아주 최근에 국제 저널에 실린 것들이야. 특수 단백질 보유자의 DNA 정보를 이용해서 신약을 만드는 방식에 대한 연구인데, 학계에서는 논란이 뜨거웠지. 그래도 되느냐, 도덕적 해이 아니냐 그런 말이 많았어.”

“그렇군요.”

“그리고 난 장 박사가 개발하고 있던 약이 좀비 바이러스에 대한 치료제라고 생각해.”

태유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장 박사는 일융과 합작해서 불로불사의 존재를 연구했고, 그 결과값은 좀비야. 연구는 좀비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치료제까지 포함해 진행되었어. 난 이렇게밖에 결론을 못 내리겠는데, 신부님은 어때?”

태유준은 머릿속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이 들어맞는 기분이었다. 미스터리에 한 발짝 접근한 듯, 발아래가 일렁이며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전… 저는.”

“이것도 좀 봐야겠군. ‘특수형’이라는 제목을 달고 긴 메모가 써 있어. 3월 1일, 4월 23일, 6월 7일… 그리고 10월 15일이 마지막이군. 일융에서 ‘특수형’ 샘플을 인수해 갔다. 실험을 위해 사용했던 점프 슈트는 오염 물질이 묻어 있을 수 있으므로 세탁했다. 마음이 찝찝해 여러 차례 세탁을 하고, 몇 번이나 건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세탁기 문을 열지 못하겠다.”

10월 15일이면 좀비가 나타나기 불과 며칠 전이다. 태유준의 팔에 가벼운 소름이 돋아났다. 모든 것이 평화롭게만 느껴지던 그때, 이미 이 세상에 점프 슈트를 입은 좀비는 존재했다. 심지어, 그것을 만든 장본인은 장 박사로 추정된다.

“아… 그게….”

“혼란스러운 마음 이해해.”

“….”

태유준은 양손에 얼굴을 묻고 잠시 침묵했다. 숨이 막혀 왔다.

장 박사는 어째서 이러한 괴물을 세상에 만들어 낸 것일까. 불로불사라는 키워드를 위해서? 하지만 이지를 상실하고 그저 숨만 붙어 있는 존재에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신을 믿고, 스스로 그분의 자녀임을 자랑스러워하시던 분이 어째서 이런 미치광이 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태유준은 혼란스러웠다.

“…좀비를 일융제약이 인수해 갔다면, 어떻게 좀비가 확산한 걸까요.”

태유준이 한참 만에 고개를 들었다. 원혁은 휑하니 뚫린 창밖을 내다보며 답했다.

“그것까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 일융제약이 목적을 가지고 고의로 퍼트렸을지, 아니면 실수로 유출된 것일지는 결론을 내릴 수 없어. 하지만 모든 것이 이곳에서 시작된 건 확실해 보여.”

“….”

“잠시 머리 좀 식히자고.”

원혁이 말하자 태유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밀려와서 혼란스럽고 피곤했다. 그가 멍하니 앉아 있는 동안 원혁은 주방 서랍장과 찬장을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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