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46화 (4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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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이야.”

5번 출구임을 알리는 표식과 함께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이 쭉 뻗어 있는 것이 보였다.

드디어 다 온 건가.

태유준은 떨리는 손을 다른 한 손으로 꾹 붙들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한 손에는 생수병을 들고 한 손에는 가위를 들고 나가 보기로 했다. 아까의 공격이 또다시 유효하다면 이득이고, 아니면 치명적인 실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좀비를 마주쳤을 때 다시 한번 던져 볼 필요가 있었다.

태유준은 원혁의 등을 바라보며 기나긴 계단을 올랐다. 이따금 그는 목덜미의 물린 자국을 매만져 보았다. 그런데 상처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태유준은 의아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물렸는데 벌써 상처가 사라질 수 있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깊게 물려 이빨 자국이 선명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자신은 좀비가 될 만한 조짐을 전혀 보이고 있지 않다. 안구도 멀쩡하고 구강 구조에 변화도 없다. 무엇보다도 이성이 완벽한 상태이며 심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도대체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그는 두렵고 또 궁금했다.

해답을 알고 싶다. 부디, 저 문밖에 단서가 있기를.

계단을 다 오른 원혁이 구식으로 된 잠금장치를 찾아냈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어두운 지하 공간에 울려 퍼졌다. 아주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문소리는 듣기 싫을 만큼 뻑뻑하게 울렸다.

이윽고 문 틈새로 빛이 스며들었다. 분명 어두운 밤에 들어왔건만 어느새 아침이 밝은 것이다. 너무 오랜만에 빛을 봐 그런지 태유준은 눈이 부셨다. 그는 손으로 눈을 가리고 조금씩 빛에 적응하며 눈을 깜빡였다.

열린 문 틈 사이로 원혁이 먼저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좌우를 살피고 태유준에게 말했다.

“좀비 없어. 나와도 돼.”

“네. 알겠습니다.”

태유준이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다. 드디어 여의도에 도착했구나. 그는 흥분과 불안, 초조함과 두근거림에 휩싸였다. 지난한 세월이 주마등처럼 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간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수도원에서의 생활, 원혁과의 만남, 그리고 광화문 벙커에서의 비인간적인 생활. 그곳을 떠나 용산에서 또 다른 인간 군상들을 마주쳤고, 잠실로 우회해 숨을 돌린 후 이곳까지 왔다. 그동안 수많은 살생이 있었으며, 때로는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좀비에 물리고 살아남는 기적까지 일어났다. 이 모든 일은 한 단어로 귀결됐다.

생존.

11월부터 12월인 지금까지, 몇십 일간 태유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를 찾으라면, 역시나 생존이었다.

그러니 지금부터의 한 걸음 한 걸음은 더욱 신중해져야 한다. 겨우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으니 앞만 보고 걸어야 한다.

“여기서 장 박사님 연구소까지는 별로 멀지 않습니다. 저기 73빌딩 보이시죠? 저 근처에 있는 오피스텔입니다.”

“알겠어.”

차를 놓고 와 별다른 운송 수단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걸어가기로 했다. 사람도 차도 다니지 않는 도로는 상당히 을씨년스러웠다. 길 한복판에 좀비의 시체와 인간의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 썩은 악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냄새가 너무 심해 태유준은 자기도 모르게 발길을 서둘렀다.

그런데 원혁이 갑자기 멈추어 섰다. 원혁의 등에 태유준이 부딪쳤다.

“무슨 일입니까.”

원혁은 대답 대신 정면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흡.”

태유준이 퍼뜩 놀랐다. 좀비 서너 마리가 코를 킁킁대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휙, 원혁은 태유준의 몸을 감싸 안고 건물 벽으로 잽싸게 숨었다. 좀비들은 원혁과 태유준이 있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왔다.

“저 좀비 떼를 뚫고 지나가는 게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인데요.”

태유준이 소곤거렸다.

“싸워서 이길 자신이야 있지만, 소란스러워지면 주변의 다른 놈들이 몰려들지도 몰라.”

“어떡하죠?”

“그러게. 여기서 밤까지 기다릴 수도 없고.”

그때였다. 갑자기 찌르르르, 차임벨 소리가 났다. 태유준은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나는 방향을 봤다. 좀비 떼 역시 소리에 급격하게 반응해 모가지를 휙 꺾었다. 소리의 정체는 횡단보도의 시각 장애인용 보행 안내음이었다.

―지금 길을 건너가셔도 좋습니다. 알려 드립니다. 좌우를 잘 살피고 천천히 건너가 주십시오.

아마도 좀비 한 마리가 무심코 횡단보도에 달린 안내 버튼을 누른 듯했다.

“꿰엑!”

“끄아아!”

좀비들은 우르르, 횡단보도 쪽으로 몰려들어 서로 부딪치고 또 나자빠졌다. 한 마리가 크게 자빠지는 바람에 그 위로 또 다른 좀비가 넘어지는 촌극이 연출되었다.

“지금이야. 뛰어!”

멘트가 끝나기 전에 놈들을 따돌리고 뛰어야 한다. 원혁도 태유준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모퉁이를 빠져나와 죽어라 앞만 보며 뛰었다.

“여기, 여기예요.”

10분여를 달린 끝에 두 사람은 73빌딩 인근의 오피스텔 건물에 다다를 수 있었다. 공동 현관은 잠겨 있었으나 태유준이 외우고 있던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다행히 문이 열렸다.

오피스텔 1층 로비는 개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썰렁했다. 경비실과 복도는 텅 비어 있었고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위험할 것 같다는 판단에 둘은 7층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원혁은 7층의 스무 개 정도 되는 호실들의 입구를 일일이 살피려 했다. 가스와 전기 계량기도 눈대중으로 봤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요. 이 건물은 공실률이 높은 곳이었으니까요.”

“왜? 위치도 시설도 좋아 보이는구만.”

“터무니없이 비싸거든요. 박사님은 금액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분이라서 여기에 거처를 얻어서 지내셨지만요.”

“그나마 다행이군, 사람이 많은 건물이었다면 좀비를 마주칠 가능성도 높았을 테니까.”

그제야 원혁은 남의 집 앞을 기웃거리는 행위를 그만두고 장 박사의 방 앞에 섰다.

“719호. 여기란 말이지.”

이 안에 대체 누가 있을까. 아니, 사람이 있기나 할까.

태유준은 긴장으로 입술이 말랐다.

김은진의 가족이 전한 바에 의하면 그는 ‘정리할 것이 있다’는 말을 남기며 벙커를 떠났다고 했다. 그 말은 꼭 여의도 연구실로 향하겠다는 소리 같았지만, 장 박사의 연구실에서 울려 퍼졌던 총성과 외국어로 말하던 괴한의 목소리, 갑자기 끊긴 전화를 생각하면 장 박사는 쫓기는 입장 같았다.

그렇다면 굳이 노출된 은신처인 이곳 여의도로 돌아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 문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그를 쫓아갈 수 있으니.

태유준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도어 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가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셋, 둘, 하나. 태유준은 속으로 숫자를 센 다음 문을 열었다.

다음 순간 휘잉-! 맞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태유준의 얼굴을 사납게 할퀴었다. 두 사람은 곧장 집 안으로 발길을 들였다.

“…!”

예상은 했지만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현관문 맞은편에 있는 거실 창문이 깨져 있었다. 그곳을 통해 바람이 들어온 것이다. 그로 인해 방 안에는 종이들이 펄럭거리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또한 책상 위에는 엎질러진 커피 잔이 있었고, 거기서 흘러나온 커피 얼룩이 쓰러진 책을 적시다 못해 꾸덕꾸덕 마른 자국을 남겨 놓은 채였다.

가구며 집기는 모두 개판으로 뒤집어지고 쓰러져 있었다. 한구석에 마련된 비커, 플라스크, 데스크톱 컴퓨터는 당연하게도 와장창 깨진 상태였다.

“털렸군.”

원혁이 혀를 찼다. 태유준은 가늘게 턱을 떨었다.

“이거, 총으로 깬 창문이네.”

“네? 총이요?”

원혁이 전면 유리창을 가리키며 말하자 태유준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총탄에 부서진 것 같아. 그럴 때 나오는 모양이야.”

그의 말에 태유준은 아찔했다. 장 박사와 딱 한 번 전화 통화를 했을 때 들려왔던 굉음. 그것은 총성이 맞았다.

“그, 그러면 장 박사님은….”

“다행히 사람이 맞은 것 같진 않아. 잘 봐, 이 거실 어디에도 핏자국은 없어. 화장실이랑 침실 문도 열어 봤는데 거기에도 혈흔은 보이지 않았고.”

“아….”

핏자국이 없다니 듣던 중 천만다행이었으나, 여전히 막막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장 박사가 습격을 받았다는 사실이 태유준의 숨통을 조여 왔다.

“쳐들어온 인간이 뭐 하는 인간인지는 몰라도 장 박사를 해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야. 데려가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 같아.”

태유준은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은 아니구나 싶어 긴장의 끈이 조금이나마 느슨해졌다.

그는 그제야 침착하게 집 안을 살펴보았다. 몇 번이나 드나들었던 곳이라 물건의 배치 순서도 잡다한 책의 비치된 위치도 다 익숙했다. 그러나 지금 장 박사 없이 혼란하게 어지럽혀진 집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어두워졌다.

“후우….”

태유준은 한숨을 내쉬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그때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거실에 식기세척기와 함께 놓인 빌트인 세탁기였다. 여느 오피스텔에 가나 풀 옵션으로 제공하는 흔하디흔한 세탁기. 그것의 뚜껑이 꼭 닫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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