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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안전한 데가 어디 있다고. 새삼스럽군.”
원혁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태유준은 그 어조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맞는 말이다. 세상은 바뀌었고, 어딜 가나 위험은 뒤따른다. 당장 내일, 아니, 몇 시간 후를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거기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몰라도.
원혁은 플래시로 광장 이곳저곳을 비췄다. 시야에 무언가가 걸렸다.
“저쪽에 계단이 또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것 같군요.”
“일단 내려가 보자.”
두 사람은 계단 쪽으로 향했다. 플래시 불빛에 다시 한번 경고문이 비쳤지만 태유준은 애써 그것을 무시했다.
원혁의 발소리와 자신의 발소리가 울려 퍼질 뿐, 두 번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태유준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묘한 기분이었다. 바로 바깥에는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몰아치는데 이곳은 숨 막히도록 정적이다. 오랫동안 가라앉은 공기 특유의 냄새가 났다. 첫 번째 계단을 내려올 때보다도 더 가라앉은 공기였다.
좀비 사태가 터진 이후 태유준은 청각이 무척이나 예민해졌다. 자다가도 부스럭거리는 낙엽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는 일이 잦았고, 원혁이 옆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다시 잠들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공간은 여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방증하듯 지독하게 고요했다. 기분 탓인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오자 이번에는 광장 대신 두 갈래 갈림길이 나왔다. 가운데 벽을 기준으로 두 개의 통로가 있었다. 벽을 플래시로 비춰 보니 숫자가 보였다. 4라는 숫자와 화살표가 위에 쓰여 있었고, 그 아래쪽에는 5라는 숫자와 화살표가 있었다.
태유준은 원혁에게 오른쪽으로 가자고 손짓을 했다. 이곳이 지하 몇 층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방향만은 제대로 잡은 듯했다.
계획대로라면 3번 출입구로 들어와서 내려간 다음 5번 출입구로 올라가야 한다. 5번 출입구는 장 박사의 오피스텔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곳이었다. 지도상으로 봤을 때 3번에서 5번까지 단순 횡단 거리는 4킬로미터 남짓이었으나,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데다가 계단을 내려가고 올라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보기보다는 상당한 거리가 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천천히 이동했다. 태유준은 원혁의 발소리와 뒷모습에 의지해 나아갔다. 다행히도 10분 넘게 걷는 동안, 눈앞에 보이거나 소리가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5번 출구까지 갈 수 있을 듯했다.
정말 다행이다. 잘됐어. 태유준은 끝없이 스스로를 독려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바깥으로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해 장 박사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마침내 목표한 곳 가까이까지 온 것이다.
원혁은 앞장서 성큼성큼 걸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자, 태유준은 조금 천천히 가자고 원혁에게 말을 걸려 했다.
그런데 그때, 태유준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다음 순간 냄새가 느껴졌다. 좀비 특유의 악취가 태유준의 코를 찔렀다. 이건 단순히 눅눅한 지하여서 나는 냄새가 아니었다. 싫지만 익숙한 냄새, 확실한 좀비 냄새였다.
원혁도 낌새를 감지했는지 우뚝 멈춰 서며 태유준을 뒤돌아봤다. 태유준은 주머니 속에서 가위를 꺼내며 원혁과 눈을 마주치고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두 사람은 제스처로 하나, 둘, 셋을 센 다음 한 번에 뛰기 시작했다.
“끄엑!”
“오른쪽이요!”
쿵쾅쿵쾅. 좀비가 그들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태유준은 정신없이 달음박질치면서 생각했다. 손전등이 마구잡이로 뒤흔들리며 불빛이 앞을 비추었다, 말았다 시야를 산란하게 했다.
이 어둠 속에서 저렇게 뛴다는 건, 점프 슈트 좀비가 틀림없다. 그렇다면 가공할 점프력과 힘, 속도를 지녔다는 소리다.
과연 이 어둠 속에서 좀비를 피해 도망칠 수 있을까? 태유준은 두려워졌다. 좀비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터져 나갈 듯 불안해졌다. 불과 수 미터 뒤에 끔찍한 주둥아리를 벌린 괴물이 접근해 오고 있다. 플래시 불빛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또 오른쪽!”
태유준이 외쳤다. 일단 좀비를 따돌리는 게 급선무였다. 태유준은 지금까지 달려온 방향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며 뛰었다. 다시 5번 출입구 방향으로 돌아가려면 잘 기억해 둬야 한다.
원혁이 오른쪽으로 달렸다. 큰 모퉁이를 끼고 날듯이 사라지는 그의 뒤를 태유준도 바짝 쫓았다. 조금만 더 빨리 뛰자. 그는 이를 악물고 뛰었다. 하지만 인간의 육체에는 한계가 있었고, 점프 슈트 좀비는 만만한 놈이 아니었다.
순식간이었다. 뒤에서 뻗어 나온 낯선 손이 태유준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헉.”
인간보다 체온이 낮고 나무토막처럼 딱딱한 손이었다. 그 손의 감각에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태유준도 성인 남성이라 벗어나려 발버둥 치는 힘이 상당했으나, 좀비의 완력은 감히 상대할 수 없으리만치 엄청났다.
“으윽!”
태유준은 앞으로 팔을 힘껏 저으며 발을 굴렀다. 하지만 뒤에 있는 괴물은 그런 태유준의 발버둥이 우습다는 듯, 그를 간단하게 잡아당겼다.
“신부님!”
앞서가던 원혁이 뒤를 돌았다. 곧 그의 눈에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 태유준이 점프 슈트 좀비에게 붙들린 채 목을 물리고 있었다. 좀비는 태유준의 목덜미가 먹음직스러운 음식이라도 되는 듯, 그의 목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태유준의 몸이 무너지며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
눈이 뒤집혔다. 원혁은 해일처럼 치솟는 분노를 느꼈다.
“…형…제, 님.”
태유준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다가 이내 주룩 흘러내렸다. 맹수에게 사냥당한 초식 동물 같은 모습이 무력해 보였다. 이번에는 땅이 꺼지는 절망이 원혁을 휩쌌다.
“으아아!”
원혁이 좀비를 향해 돌진했다. 그의 중식 칼이 좀비의 팔을 수직으로 쳐 냈다.
“꽥!”
좀비가 소리를 지르며 제 뜯긴 팔꿈치를 감싸 쥐었다. 자연스레 풀려난 태유준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가 풀썩 쓰러진 후에도 좀비는 태유준을 물어뜯으려고 무릎을 꿇었다. 원혁은 좀비의 머리채를 잡아 올린 다음 칼을 휘둘렀다. 엄청난 힘에 좀비는 이내 나자빠졌다.
“신부님, 신부님!”
원혁이 태유준의 상반신을 안아 들고 외쳤다. 태유준은 눈을 감고 축 늘어져 있었지만, 아직 의식이 있는지 희미한 목소리를 냈다.
“저… 물렸…어요.”
“제길, 알아. 내가 너 문 새끼 죽였어.”
“물렸… 저 물려 버렸어요….”
태유준의 목소리엔 절망이 가득했다. 어두운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원혁은 누군가 제 가슴에 망치질을 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허무한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 원혁은 태유준을 격렬하게 끌어안으며 그를 불렀다.
“신부님. 신부님…!”
“저 좀… 똑바로 앉혀 주세요.”
태유준의 부탁에 원혁은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아직 몸을 가눌 힘은 있는지 태유준은 주변을 나뒹굴고 있는 제 가방을 가지고 와 세운 다음, 그 옆에 똑바로 앉았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신부님. 무슨 말을 하려고.”
“형제님. 저를… 죽여 주십시오.”
“신부님!”
“인간답게 사고할 수 있을 때, 아는 사람에 의해 처리되고 싶습니다.”
덤덤한 듯 말했지만, 태유준의 목소리는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는 엄청나게 두려운 상태였다. 방금 물렸으니 늦어도 30분 이내에 좀비로 변할 것이다. 그 사실이 그의 가슴을 옥죄었다.
죽음이란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인간답지 못한 모습을 보이고, 흉측한 좀비로 변화하는 것이었다. 그건 태유준의 가치관에 의하면 ‘살아 있음’이 아니었다. 이성도 자아도 잃은 채 남을 해치기만 한다면, 그건 삶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총이 있죠? 그때 보여 주신 거. 그걸 사용해 주세요.”
“내가 널 어떻게 쏴!”
원혁이 울부짖었다. 태유준은 원혁의 두 손을 꽉 붙잡았다.
“저번에 말씀드렸잖아요. 형제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발요.”
이대로 끝이라는 건 너무나도 슬픈 일이었다. 신께서 내게 주신 임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눈을 감는 것도, 장 박사님의 무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로 삶이 끝나는 것도. 가족과도 같은 사람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인생을 끝마친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인가. 태유준은 지금 이 순간 그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리고 원혁과도 영원히 이별한다는 것. 처음에는 낯설고 또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함께 지내면서 수많은 고난을 이겨 내는 동안, 태유준의 가슴 한구석에 원혁은 하나의 뚜렷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비록 아직 태유준에게 있어 원혁이 어떤 존재인지 이름표를 붙이지 못한 상태였지만.
태유준은 눈을 감았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이구나. 눈 깜짝할 새, 단 한 순간이면 끝날 것이다. 작은 총알 하나면, 지금까지 살아온 느끼고 겪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 그 점이 그는 슬프고 또 허무했다.
“못 해.”
원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끝도 떨리고 있음을 태유준은 눈치챘다.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나를 천국에 보내 줄 사람이 원혁이라는 것. 못돼 보였지만 알고 보니 선량한 면이 있고, 장난으로 일관하지만 의연하고 용기가 있는 사람. 늘 철없는 소리를 하지만 이 지옥에서 나를 살려 주기 위해 기꺼이 몸을 던졌던 유일한 사람. 당신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아마 이제는 영원히 알 길이 없겠지만.
“제발, 부탁드립니다.”
태유준의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