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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 특수한 아이였거든요. 양부모님은 제가 올바르고 평범하고 모나지 않기를 바라셨어요. 서로 바라는 게 맞지 않았던 거겠죠.”
태유준은 초능력에 대한 부분만 얼버무리고, 지나온 삶의 궤적을 짤막하게 정리해 원혁에게 들려주었다. 어떻게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고, 어떻게 길러졌으며, 양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얼마나 아등바등했는지도 설명했다.
하지만 성인이 되자마자 파양당했던 걸 보니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원혁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가 완전히 끝났을 때 태유준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쪽 손해지. 우리 예쁜 신부님을 몰라봤으니까.”
원혁은 태유준을 자신의 품에 가두고 등을 쓸어내렸다. 아주 느릿하지만 힘이 담긴 손길이었다.
태유준은 다 큰 성인 남자의 품에 안겨 보는 게 처음이었다. 양부나 장 박사가 가끔 어깨를 토닥여 주긴 했지만 이렇게 뜨거운 품속에 잠기듯이 안겨 본 경험은 없었다. 같이 손을 잡고 반장난으로 끌어안아 본 적도 있지만 그때와 지금은 기분이 달랐다. 원혁과 제대로 끌어안아 보니 꼭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어떤데.”
“가슴이 뛰고요.”
“그리고?”
“자꾸 졸려요.”
“잘됐네. 자.”
“그래도 될까요.”
태유준이 원혁의 가슴에 고개를 파묻고 중얼댔다. 아늑한 수마가 온몸을 녹이듯 찾아 들어왔다.
“잘 자, 예쁜이.”
“…예쁜이라고 하지 말라니까요.”
“그래. 유준아.”
유준아, 좋은 꿈 꿔.
그렇게 말하는 원혁의 목소리는 낮고 달콤했다.
다음 날, 먼저 일어난 태유준은 옆에서 자고 있는 원혁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눈뜨고 있을 때는 사나운데, 자는 모습은 꽤 순하단 말이야.
태유준은 손을 들어 원혁의 이마를 살짝 쓸어 넘겼다. 칼자국이 움푹 파인 곳은 원래 얼마나 큰 상처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흉이 짙었다.
이건 또 언제 어쩌다가 다쳤을까. 못된 형제들이 괴롭힌 흔적 중 하나이려나.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기 위해 태유준은 고개를 숙였다.
“아팠겠는데….”
태유준이 혼잣말을 하던 때였다. 갑자기 원혁이 움직이나 싶더니, 태유준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으악!”
“예쁜아, 형아를 이렇게 깨우는 법이 어딨어.”
원혁이 태유준의 등과 허리를 더듬으며 속삭였다. 태유준의 온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뭐 하는 짓이에요! 놔주세요.”
“그러는 신부님이야말로 자는 사람 얼굴에 도둑 키스나 하려고 하고, 뭐 하는 짓이에요.”
“도둑 키스라니요! 아닙니다!”
태유준은 억울하고 기가 막혔다.
“그냥 얼굴만 좀 들여다본 것뿐이에요!”
“아하. 얼굴만? 왜? 뭐 하러.”
“그, 그거야….”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태유준이 우물쭈물거리자, 원혁은 대놓고 박장대소를 하며 태유준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태유준은 식겁하며 그의 품에서 도망쳤다.
공사장에서의 하룻밤은 태유준에게 묘한 기분을 남겼다. 태유준은 원혁이 더 이상 무섭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이따금 먼저 손을 뻗어 머리를 만져 주고 싶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라는 것을 공유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어찌 되었든 원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고 해서 원혁에게 솔직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태유준은 죽었다 깨나도 제 심경에 변화가 있었음을 숨기기로 했다. 그래도 가끔씩 원혁에게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 *
둘은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며 느리게 움직였다. 하루라도 빨리 여의도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여기까지 왔는데 위험한 일에 빠지면 의미가 없다는 게 둘의 판단이었다. 원혁과 태유준은 해가 뜨기 시작하면 즉시 은신하고 밤만을 기다려 움직였다.
그렇게 조금씩 움직이면서 잠실을 벗어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두 사람은 여의도 바로 아래 지역인 신길역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여의도로 가는 대로는 차단돼 있었으므로 여기서부터 지하도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지도에서 말한 곳이야.”
“네.”
“드디어 여기까지 왔군.”
늦은 오후부터 조금씩 비가 내리더니 저녁에는 돌풍까지 불었다.
비에 젖은 낙엽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앙상한 가로수에는 좀비 몇 마리가 잎사귀 대신 매달려 스산한 느낌을 더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것들의 낡고 찢어진 옷자락이며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태유준이 조수석에서 내렸다. 머리카락과 수단이 금세 비에 젖었다. 비바람 때문에 시야도 좋지 않았다.
“너무 어두워. 잘 안 보이는데.”
“여기 어디쯤 있다고 한 것 같은데….”
빗발이 들이치는 데다가 주변이 어두워 김은진이 말한 변압기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평범한 모양의 변압기와 구분할 수 없다고 하니 태유준은 더욱 걱정이 컸다.
태유준은 플래시를 켜고 더듬더듬 나아갔다. 비바람이 몰아쳐 그마저도 쉽지 않았지만, 지도상의 위치와 가장 흡사한 곳까지 다가가 가로수가 조성된 길가를 꼼꼼히 살폈다. 가끔 실수로 플래시로 좀비를 비추기도 했는데, 빨래처럼 나뭇가지에 널려 있는 놈들을 보자니 토악질이 나기도 했다.
아. 여기다. 비밀번호를 몰라도 들어갈 수 있는 지하도의 입구.
김은진의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전쟁 때 한강을 근거로 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몰래 파 두었던 이 지하도에는 총 열 곳의 출입구가 존재했다. 그중 다섯 곳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들어갈 수 있고, 다섯 곳은 변압기를 통해 진입할 수 있다. 지금 두 사람이 들어가려는 입구는 변압기를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태유준은 핸드폰을 열어 다시 한번 파일을 확인했다. 지도상으로는 바로 이곳이 여의도로 진입할 수 있는 3번 출입구였다.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변압기, 이 안에 비밀 통로가 있다니. 태유준은 소름이 끼쳤다.
“비밀번호가 없다고 했어요. 대신 키패드에 아무 숫자나 입력하기는 해야 한다는군요.”
두 사람은 변압기로 다가갔다. 키가 큰 원혁이 기기의 뚜껑을 살피자 그곳에는 아주 작은 숫자 키패드가 있었다. 원혁이 대충 숫자 네 자리를 눌렀다. 그러자 곧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변압기 내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원혁과 태유준은 눈을 마주친 다음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플래시를 비춘 태유준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성인 남자 한 명이 허리를 굽히면 내려갈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계단이 아래로 쭉 이어져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이런 시설이 있다니. 이 위에 건물을 짓고 살아가던 사람들은 발밑에 이런 세상이 있는지도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여의도를 걸어 다녔을 것이다. 태유준은 위화감을 느꼈다. 악의도, 비밀도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고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구나. 그의 팔에 가벼운 소름이 돋아났다.
“이게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겠군요.”
“꼭 지옥으로 향하는 입구 같네.”
원혁의 말을 들은 태유준의 머릿속에 단테의 신곡 한 구절이 떠올랐다.
이곳을 지나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정말로 이곳은 지옥의 입구일까. 아니면 장 박사님에게 닿을 수 있는 희망의 입구일까.
“여의도로 향하는 입구이니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죠. 조명 시설이 없다고 했어요. 가는 길이 어두컴컴할 겁니다. 조심하세요.”
“신부님도. 그럼 내가 앞장설게.”
태유준은 원혁을 뒤따라 암흑의 공간으로 발을 내디뎠다. 태초의 어둠같이 짙은 암흑, 그리고 고요함이 공간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태유준은 발을 헛딛지 않도록 주의해서 계단을 밟았다.
성인 한 명이 지나갈 정도로 폭이 좁은 계단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이윽고 계단이 끝나는 지점이 되었다.
원혁은 공사장에서 손에 넣은 플래시를 켰다. 핸드폰 플래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력한 빛에 뜻밖의 장소가 드러났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마치 작은 광장 같은 공간이 나타난 것이다. 광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조명도, 수도 시설도 존재하지 않았다. 광화문이나 신용산 벙커와는 달랐다. 그저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만이 존재했다.
“아무것도 없네요.”
“그러게. 여기서 끝일 리가 없는데.”
두 사람은 플래시로 이곳저곳을 비춰 보다가 한쪽 벽면에 붙어 있는 경고문을 발견했다. 원혁과 태유준은 경고문에 가까이 다가갔다.
경고문은 손 글씨로 쓰여 있었다. 요즘의 경고문과는 달랐다. 마치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 사람이 손 글씨로 공고문 등을 쓰던 시대에 만들어진 것 같은 모양이었다.
경고문에 쓰인 문구는 짤막하고 단순했다.
[이 아래로 내려가지 마시오.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 짧은 경고문이 주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게 여겨지지 않았다. 이 아래로 무엇이 있단 말인가. 김은진도 모든 지하 통로를 다 살펴본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그녀가 알고 있는 범위는 이 거대하고 미로 같은 지하도의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태유준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떨림을 진정시키기 위함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두려웠다. 특히 어둠 속에 고립되어 있는 이 상황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