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42화 (4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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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야기 한번 들어 봐.”

“네.”

“내 가설은 두 가지로 갈려. 첫 번째. 보편적인 좀비 바이러스가 먼저 생겨났고, 그러던 어느 날 변이가 일어났다. 그래서 더 강하고 빠른 종자들이 생겨났다.”

“두 번째 가설은요?”

“무슨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더 강한 좀비를 일정 개체 수만큼 만들어 냈다.”

태유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유독 빠르고 영리해 보이는 놈들에게 타투가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그 무엇도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첫 번째가 더 그럴싸해 보이네요. 두 번째 가설은 제 생각에… 어, 그게 사실이라면 동기가 부족한 것 같아요. 왜 굳이 더 강한 좀비와 일반 좀비를 나누어서 만들어 내야 하는지,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여요. 만들려면 강한 놈만 만들어야죠.”

원혁은 기어에 손을 올리며 대답했다.

“언제 어디서나 사악한 의도를 가진 자들은 있기 마련이니까.”

“사악한 의도라고 하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걸까요.”

“이 사태를 이용할 수 있겠다 싶어지면 바로 행동에 착수하는 그런 사람, 혹은 세력 말이지. 우리 지난번에 일융제약 이야기한 거 기억나?”

“네. 장 박사님이 마지막으로 협업하셨던 곳이죠.”

“나는 좀비들이 나타난 일과 장 박사가 나한테 신약 설계도를 보낸 일, 그리고 장 박사가 자취를 감춘 일이 다 관련이 있다고 생각 중이야. 논리적으로는 명쾌하게 설명할 근거가 지금은 부족하지만, 적어도 세 가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점이 내 머릿속에서 자꾸만 가설을 이끌어 내고 있거든.”

원혁이 차를 출발시켰다. 어두운 거리를 달리며 태유준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일융제약이 어떤 회사인지 태유준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 원혁의 말에 의하면 비윤리적인 임상 실험을 하는 곳이라는 것과, 장 박사가 최근 몇 년 동안 일융제약이 의뢰한 프로젝트에 매달려 왔다는 것. 그게 태유준이 아는 정보의 전부였다.

“전 모르겠습니다. 좀비도, 박사님의 실종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냉정하게 추론하기가 어려워요. 혼란스러울 뿐입니다.”

“그럴 만도 하지. 그런데 한 가지 확실한 건 말이야, 장 박사를 만나야 이 모든 의문이 해소된다는 점이야. 왜 사라졌는지 무얼 연구 중이었는지 진실을 아는 사람은 장 박사뿐이니까.”

“맞습니다. 박사님을 만나서 여쭤봐야죠.”

태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오직 그를 향해 달려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 * *

그들은 서쪽으로 차를 몰았다. 트럭으로 이동하다가 새벽 5시가 되자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둘은 차를 멈췄다.

“묵을 만한 곳을 찾아보자.”

“이 동네는 마땅해 보이는 곳이 없네요.”

두 사람이 멈춰 선 곳은 평범한 주택가로, 최근에 재개발이 이루어졌는지 곳곳에 ‘재개발 축하’, ‘재개발추진주민위원회’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바로 근처에는 짓다 만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이 보였다. 아래 세 개 층은 상가가 입점할 예정이었는지 창문이 커다랗게 시공되어 있었고, 개중 치킨집 같은 경우는 간판까지 달아 놓은 상태였다. 불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상가가 괜찮을 것 같아요. 보다시피 창문 너머에 좀비도 없고, 문도 있을 테니까 잠그고 자면 되고요.”

“좋은 생각이야.”

둘은 짐 가방을 챙겨 차에서 내렸다. 공구와 벽돌, 시멘트 포대 자루가 어수선하게 널려 있는 공사 현장을 지나쳐 상가 입구로 다가섰다. 다행히 좀비는 보이지 않았고 스산하고 휑한 바람만이 불어왔다.

“사람 사는 동네 같지 않네요.”

“아무도 입주한 적 없을 테니까.”

둘은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갔다. 가끔씩 인부들이 내버려 두고 간 공구가 나와 원혁은 좋다고 그것들을 주워 댔다. 특히 손전등을 여러 개 발견했을 때는 휘파람을 불기까지 했다.

“이렇게 큰 손전등이라니. 마침 필요했었는데 잘됐네.”

“손전등은 많을수록 좋죠.”

“각목도 많아.”

“두 자루 정도 챙길까요. 유용하겠어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이것저것을 챙긴 두 사람은 복도를 한 바퀴 둘러보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문을 열었다. 창문 시공 외에는 도배도 바닥 자재 마감도 되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텅 빈 공간이었다. 바닥은 콘크리트가 훤히 드러난 상태였다.

“바닥은 딱딱하겠지만 이거 깔면 괜찮을 거야. 신부님 써.”

원혁이 태유준에게 모포를 건넸다.

“저 주시면 형제님은 어쩌시려고요.”

“난 신부님 깔고 자면 되지. 폭신하게.”

“아, 진짜!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고요!”

“싫으면 말고.”

질색을 하는 태유준을 어르고 달랜 원혁은 태유준의 옆에 누웠다. 모포를 같이 깔고 누운 두 사람 다 천장을 보고 누워 있었다. 잠이 오지 않는 태유준은 멀뚱히 눈만 뜨고 있었다.

“신부님. 안 자지?”

“…네.”

“이런 데서 자 본 적 있어?”

“그럴 리가요. 공사장에 들어와 본 것도 처음인데요. 누가 공사장에서 잠을 잡니까.”

“난 있는데.”

대충 대답했는데 원혁이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태유준은 살짝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가 어릴 때, 형들 따라서 이름도 모르는 지역에 갔었어. 미국은 10대도 운전할 수 있잖아. 그래서 형들은 아직 학생이었어도 나 태우고 멀리까지 갈 수 있었던 거지.”

“….”

그가 형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뉘앙스가 좋지 않았기에 태유준은 이야기의 시작부터가 불길했다.

“말로는 드라이브라면서 집에서 점점 더 먼 곳으로 가니까 너무 무섭더라고. 그때 나 영어도 잘 못해서 그냥 스탑, 플리즈. 이런 말만 했던 것 같아. 내가 그때는 나이치고 작고 말랐기도 하고, 형들 보기에 동양에서 온 꼬마가 얼마나 만만했겠어. 내 말 듣지도 않고 미친놈처럼 운전하더라고.”

“…그러다가 어떻게 되셨습니까.”

“날 허허벌판 같은 데 내려 주더라고. 내가 하도 스탑, 스탑거리니까 내려 주겠다면서. 그런데 거기가 어딘지 집까지 어떻게 돌아오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버림받았구나. 태유준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어린 소년이 홀로 낯선 땅을 헤맸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안타까웠다.

“하염없이 걷다가 건설 현장을 발견했어. 허허벌판에 그나마 지붕 있고 벽 있으니까 거기라도 들어가고 싶더라고. 그래서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서 웅크리고 하루 잤어. 다음 날 아침 되니까 출근한 인부들이 날 발견해서 난 집으로 돌아갔고 말이야.”

“…많이 힘드셨겠습니다.”

“뭐, 그때 춥고 바닥 딱딱하고 바깥에서 칼바람 부는 건 다 괜찮았는데. 이대로 영영 이곳에서 혼자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심 때문에 무서웠어. 외로웠고.”

“지금은 덜 외로우시죠?”

태유준이 나름의 온기를 담아 말을 건넸다. 지금도 공사 현장의 맨바닥에서 자고 있지만 그래도 자신이라는 동행이 있으니 조금은 나을 것이었다.

“응. 지금은 안 외로워. 그런데 기왕이면 신부님이 나한테 바짝 붙어 주면 덜 외롭겠다.”

원혁이 쿡쿡 웃었다. 이러면 꼭 태유준은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듯이 쏘아붙이며 원혁의 등을 때렸다. 그 반응이 귀여워 일부러 놀리는 것이었기에, 이번에도 태유준의 신경질적인 반항의 멘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태유준은 대답이 없었다. 대신 원혁의 옆에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붙인 다음, 완전히 원혁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리고 손을 뻗어 원혁의 이마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뭐야? 신부님, 지금 자진해서 나 만진 거야?”

“네. 위로해 주고 싶어서요.”

태유준의 손길이 원혁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어둠 속이었으나 원혁은 태유준의 눈빛을 똑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측은지심, 그리고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 특유의 쓸쓸한 눈빛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신부님이 별일이네.”

원혁이 픽 웃으며 태유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두 손이 하나로 합쳐지자 태유준은 묘한 간지러움과 열기가 가슴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둘은 손을 겹친 채로 한참 가만히 있었다.

“신부님은 어렸을 때 어땠어? 외로워 본 적 있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원혁이 입을 열었다. 태유준은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이전처럼 이야기를 자르지 않고, 조금만 제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했다. 모든 것을 낱낱이 이야기하기에는 남부끄럽고, 또 비현실적인 부분도 있었으므로 아마 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초능력 부분은 빼고 말하기로 했다.

이야기는 듬성듬성해지고 엉성해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유준은 원혁에게 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잘 들어 줄 것 같았고, 태유준은 단 한 번이라도 남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놔 보고 싶었다.

“전 늘 쓸쓸했어요. 혼자였거든요.”

“양부모님이 있었다고 했지. 그분들은?”

“…그분들은 신을 많이 사랑했고 주변 사람들의 인정이나 체면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어요. 저를 사랑하진 않으셨지만요.”

원혁은 몸을 돌려 태유준을 마주 봤다. 진지하게 듣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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