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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원혁은 물티슈를 들고만 있을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왜 그래요?”
태유준이 원혁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원혁은 물티슈로 태유준의 눈가를 닦아 냈다. 희미한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을 뿐, 태유준의 얼굴은 깨끗했다. 남이 닦아 주고 말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혁은 태유준의 깊은 아이홀, 매끈한 콧등, 그리고 장밋빛 뺨을 구석구석 닦았다.
“그렇게 많이 튀었습니까?”
“어. 완전 피를 뒤집어썼네.”
입술에 침 한 방울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며 원혁은 손안에 들어찬 얼굴을 관찰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새까만 보석이 자취를 감추었다 드러나는 것 같았으며, 입술을 다물었다 벌릴 때면 고혹적인 장미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더럽게도 예쁘네.”
“뭐라고요? 더러워요?”
원혁이 작게 중얼거린 소리를 태유준이 잘못 알아들었다.
“아, 핏자국이 좀 지저분해서. 이리 더 가까이 와 봐.”
“네.”
얌전하게 얼굴을 맡긴 태유준은 순한 소동물 같았다. 원혁은 태유준의 입술을 들여다보며 있지도 않은 핏자국을 지우는 척했다.
“다 됐다.”
“감사합니다, 형제님.”
“감사는 무슨. 나 머리나 좀 만져 줘. 간만에 머리 썼더니 머리에 쥐 났나 봐.”
“또 두통이 있으세요?”
“어. 가시질 않아. 우리 엄마도 머리 아프다가 죽었는데 이러다가 나도 이른 나이에 세상 뜨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런 말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태유준은 원혁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서는 그의 이마를 짚었다. 원혁은 하얗고 서늘한 손에 제 머리를 맡기며 슬쩍 웃었다.
“기분 좋아.”
“그렇게 좋으세요?”
“응. 아무리 생각해도 신부님 손에는 특별한 힘이 흐르는 것 같다니까.”
“그럴 리가 없죠.”
“난 진심인데. 신부님 손이 닿으면 죽은 식물이 살아난다든가 그런 적 없었어?”
“그런 일은 없었죠.”
“그래? 보통 손이 아닌데 내가 보기엔.”
원혁이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태유준은 속이 뜨끔했다.
어릴 적 기이한 힘을 발휘했던 기억이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불을 켜고,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하고, 고요한 방 안에 바람을 불게 할 때마다 손을 썼다. 맨손을 이리저리 휘둘러야 비로소 그런 기현상이 일어났었다. 마치 영화 속에서 마법사가 능력을 쓸 때 그러하듯이 말이다.
설마 진짜로 내 손에 무슨 힘이 있는 건가?
태유준은 진지해졌다. 어릴 적에는 초능력이 미움을 받는 원인이었기에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 안에서 터부시되는 기억이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와 돌이켜 보면 그 힘은 이 ‘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은 정말로 원혁의 두통을 낫게 해 주고 있는 중일지도 몰랐다. 원혁의 통증은 미국의 유명 의사들도 증상을 호전시키지 못하는 심각한 것이라고 하니까.
보통의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지만, 어릴 적 전적이 있는 태유준의 생각은 가지에 가지를 뻗어 나갔다.
“무슨 생각 해, 신부님?”
“네?”
“표정이 안 좋아. 내가 머리 아파서 불쌍해?”
“아… 네. 좀 안됐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면 더 적극적으로 쓰다듬어 줘.”
“이렇게 하면 될까요.”
“응. 아주 좋아.”
양부모는 고양이를 불길한 짐승이라 여겼다. 그래서 태유준은 아무리 귀여운 고양이가 있어도 가까이 다가가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몰래 고양이들이 애교를 피우는 동영상은 자주 찾아봤었다. 여느 고양이고 따질 것 없이 고양이들은 주인의 손에 자신의 머리를 힘껏 비비며 골골거리기 바빴다.
…꼭 내가 고양이 주인이 된 기분인데?
태유준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고 원혁을 봤다. 원혁은 행복함 가득한 미소를 짓고 태유준의 손에 제 뒤통수를 문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인간은 귀여운 고양이와 너무 거리가 멀어. 퓨마나 스라소니면 몰라도.
태유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원혁은 태유준의 손을 꼭 붙잡고 자기 좋을 대로 제 머리에 가져다 댔다.
* * *
효험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치 않은 테라피가 끝났다. 원혁은 아이스크림 냉장고 너머로 건너가 점원 놀이를 시작했다. 태유준은 장단을 맞춰 주기 위해 손님들이 서는 위치에 섰다.
“어서 오세요. 무슨 맛으로 드릴까요, 예쁜 손님?”
“예쁜 손님 아니고 그냥 손님이고요. 딸기 맛 주세요.”
“딸기 맛이라, 이유가 있나요?”
“음… 바닐라나 초콜릿 맛하고 다르게 딸기에는 생과일이 들어 있어서입니다. 과일 먹은 지 진짜 오래된 것 같아서 말이죠.”
태유준이 커다란 아이스크림 통을 가득 채우고 있는 딸기 아이스크림을 가리켰다. 군데군데 과육이 콕콕 박혀 있는 아이스크림이 먹음직스러웠다.
“그 생각을 못 했네요. 하긴, 어딜 가나 과일은 금방 무르고 썩어서 구경할 수가 없었지. 하다못해 지금 대형 마트를 털 기회가 있다고 한들 과일은 죄다 맛이 갔을 거야. 그렇지?”
“곶감 빼고는 다 그렇겠죠.”
“어쩌면 이게 이 땅에 남아 있는 마지막 딸기일까?”
원혁이 콘에 아이스크림을 퍼 올리며 자조했다. 태유준은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며 생각했다. 세상이 망했는데 딸기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있었다 해도 지금쯤은 농사를 포기하지 않았을까. 이미 좀비가 이 세상을 점령한 지 한 달도 넘었으니 말이다.
“…그럴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값은 어떻게 치르시겠어요?”
“아까 머리 만져 드렸잖아요.”
“흠, 시시하게.”
“그럼 뭘 어떻게 하자는 거예요.”
원혁은 팔짱을 끼고 실눈을 뜨더니, 제 입술을 가리켰다.
“그 아이스크림 먹고 키스나 한….”
“농담 재미없어요.”
태유준이 도끼눈을 떴다.
“신부님, 난 농담이 아니지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원혁은 쇼케이스 위에 두 팔을 얹으며 나른하게 웃었다.
“나중에는 신부님이 먼저 나한테 키스하게 될 거야.”
태유준은 순간 놀랐다. 아주 가끔씩 원혁의 목울대나 턱선 같은 데 시선이 머물고, 탄탄한 근육이 붙은 등에도 눈이 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태원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춤을 추던 날 입술이 스칠 뻔한 기억도 선명했다.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뛴다는 건 자신만의 비밀이었는데 설마 눈치챈 건가? 태유준은 제 발 저린 사람처럼 화를 냈다.
“지금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고 계신 거 압니까?”
“에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니 너무하네. 두고 봐.”
“그럴 일 없으니 아이스크림이나 먹을게요.”
태유준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크리미한 우유 향과 어우러진 딸기의 달콤새콤한 맛이 끝내줬다.
“맛있다.”
“나도 한 입 줘.”
“제가 먹던 건데요?”
“그러니까 먹으려는 거지.”
원혁은 태유준이 대답도 하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먹었다.
“음. 맛있어.”
“네. 엄청 맛있습니다.”
“신부님이 좋아하니까 좋네.”
“그러세요?”
“응. 다음에는 뭘 해 줄까. 츄러스 어때?”
원혁이 식자재가 들어 있는 냉동고를 뒤지며 물었다.
“츄러스 안 먹어 봤어요. 무슨 맛인가요?”
“오, 이런. 놀이동산의 상징 츄러스를 안 먹어 보다니 안타까워. 이건 외국 애들이 환장을 하는 건데, 계피 맛 나는 튀김 같은 거야. 핫초코 찍어 먹으면 특히 맛있어.”
“그게 맛있다고요? 엄청 달 것 같은데요.”
“기다려 봐. 내가 하나 만들어 줄 테니까.”
원혁은 냉동고 안에서 이것저것을 꺼내 조리대 위에 올려놓았다. 데우기만 하면 되는 완성형 츄러스와 초콜릿 시럽이었다. 그는 전자레인지로 조리를 마치고 가게에서 쓰는 포장지까지 찾아 츄러스를 감쌌다.
“하나씩 먹자.”
원혁은 테이블로 돌아와 길쭉한 스틱 두 개를 내려놓았다. 태유준은 눈을 끔뻑이며 그것을 집어 들었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고맙습니다.”
길쭉한 튀김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태유준은 츄러스를 호호 분 다음 조심스럽게 한 입을 맛봤다. 달콤하고 고소한 반죽에 계피 향이 어우러졌다. 태유준은 츄러스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원혁도 금방 하나를 해치웠다.
“놀이공원표 츄러스 먹은 기분이 어때?”
“어… 뭐라고 해야 하지.”
솔직하게 말을 해도 될까. 태유준은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다시… 먹고 싶어요.”
“하나 더 해 줘? 냉동고에 재료 많이 있던데.”
“아뇨. 그 말뜻이 아니라….”
태유준은 유리창 너머로 시커멓게 죽어 있는 놀이공원을 응시했다. 좀비들로 인해 망가진 롤러코스터, 고장 난 회전목마와 괴물로 넘쳐나는 바이킹. 이 공원은 시체들의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멀쩡하게 살아 놀이공원이라는 곳에 다시 와 볼 수 있을까. 아마도 어려울 것이다. 인간을 살려 달라고, 우리 죄인을 구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지만 희망은 점점 꺼져만 간다. 그러니 이 달콤하고 맛있는 빵도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는 무언가가 아닐까.
“…꼭 다시 와서 먹어 보고 싶은데, 여기가 멀쩡해졌을 때요.”
“괴물이 없어졌을 때?”
태유준은 목이 메어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다시는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까 너무나 두렵고 무서웠지만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신의 자녀니까. 그분을 의심하는 일이 되어 버릴까, 대담한 척만 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도 두려웠다.
“신부님.”
눈가가 빨개진 태유준이 소심하게 원혁을 바라봤다. 원혁은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는 얼굴이라, 태유준은 김이 샜다.
“이거 쓸래?”
그가 내미는 머리띠가 토끼 귀 모양이라 더욱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이건 또 뭡니까.”
“바닥에 뒹굴고 있더라고. 신부님하고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바로 주웠지.”
“뭐가 어울린다는 겁니까.”
태유준은 머리띠를 받아 들고 인상을 썼다. 그러자 원혁이 호랑이 귀를 흉내 낸 머리띠를 쓰고 뻔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먼저 해 봤어. 어때?”
“와, 할 말이 없네요.”
덩치가 호랑이 같은 건 사실이었지만 동물 머리띠는 더럽게 안 어울렸다. 태유준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