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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태유준은 필사적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한 번 심호흡을 하며 그는 생각을 정리했다.
이걸 잘 활용한다면 나한테 도움이 될지도 몰라.
태유준은 침을 꿀꺽 삼키며 핸드폰 불빛으로 처녀 귀신 모형과 천장, 바닥을 고루 살폈다.
“아, 버튼.”
바닥에 보도블록만 한 스위치가 있었다. 하중이 실리면 귀신 모형이 자동으로 튀어나오게끔 설계된 듯했다.
태유준은 처녀 귀신 너머까지 건너간 다음, 뒤돌아서서 좀비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예상대로 전부는 아니고 세 마리 정도만이 태유준이 있는 길로 쫓아 들어왔다.
“꾸에엑!”
태유준의 냄새를 감지했는지 놈들이 코를 벌름거리며 펄쩍 뛰었다. 그리고 쾅 하고 지면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처녀 귀신 모형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완연한 사람의 모형에 좀비들은 혼란을 느끼는 듯 발을 멈춰 세웠다.
“께엑?”
“쿠아악!”
태유준의 체취와 온기가 바로 근처에 있기 때문에 놈들의 혼란이 짙어지는 듯 보였다. 결국 좀비들은 처녀 귀신이 인간인 줄 오해라도 했는지 귀신 모형에 엉겨 붙어 살벌한 이빨 소리를 냈다. 귀신의 긴 머리를 뜯어먹고, 소복 자락도 우걱우걱 씹었다. 소름 끼치는 광경이긴 했으나 태유준으로서는 뜻하지 않은 이득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놈. 점프 슈트를 입은 좀비는 그런 멍청한 놈들보다 확실히 지능도 높고 걸음도 빨랐다.
점프 슈트 좀비는 낚시에 걸려든 좀비들을 지나쳐 그대로 맹렬하게 달려왔다. 그리고 태유준을 덮치려는 듯 풀쩍 날아올랐다. 태유준은 과감하게 가위 날을 빼어 들었다.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와중에 강하게 가위를 휘둘렀다.
“껙!”
목을 노린 공격이 유효했다. 점프 슈트 좀비가 힘을 잃고 쓰러졌다.
“하아… 하아….”
얼굴에 튄 끈적한 피를 대충 손등으로 문질러 닦은 뒤, 태유준은 빠르게 입구로 향했다. 두 마리 좀비는 처녀 귀신을 뜯어먹느라 정신이 없어 태유준을 신경 쓰지 않았다.
태유준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그들 옆을 빠져나왔다. 온몸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간신히 입구까지 나온 태유준은 나머지 두 갈림길의 입구를 살폈다. 멀리서 쿵쾅대는 발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나머지도 모형 괴물 등과 살벌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듯했다. 이때 도망가야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태유준은 처음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입구의 차단봉을 넘어서 밖으로 나갔다. 헉헉대는 숨을 고르며 사방을 살피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아까는 어둡기도 하고 정신이 없어 미처 보지 못했던 존재가 있었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벤치에 늘어져 잠든 좀비가 비척이며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태유준은 식겁하며 도망쳤다. 수백 미터를 달리는 동안 그는 사람들을 태우고 회전하면서 시원하게 물세례를 맞게 해 주는 놀이기구에 매달려 자는 좀비와 회전목마에 올라타 자는 좀비를 목격했다.
생각해 보면 이 놀이공원은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좀비 사태가 터지던 날에도 분명 수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아마 그간은 외부에서 유입되는 인간이 없어 대부분은 굶어 죽었겠지만 아직까지 살아남은 놈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있는 것이구나. 태유준은 자칫하다가는 자신이 이들의 잠을 깨우게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바스락.
롤러코스터 레일 위에서 잠자던 좀비들이 태유준의 인기척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이내 비척이는 발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밤이라 그렇게 빠르진 않았으나, 금세 스무 마리 이상으로 불어난 숫자는 태유준의 공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따가 바이킹 앞으로 와.’
원혁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이대로 이들을 끌고 원혁에게 간다면 민폐가 될 것이었다. 차라리 근처에 있는 호수까지 가서 이놈들을 수몰시켜 버려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 호수는 실외에 있어서 긴 통로를 지나야 하는데 이곳 내부 지리에 익숙지 않은 내가 그 일을 해낼 수 있을까. 심지어 가진 조명이라고는 핸드폰 플래시뿐인데 과연.
오만 가지 생각이 태유준을 괴롭게 했다. 하지만 이대로 생각 없이 달리기만 할 수는 없는 법,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수몰을 시도해 보자.
태유준은 굳은 마음을 먹고 뒤따라오는 좀비들의 숫자를 헤아려 보았다. 대충 봐도 서른 마리에 가까웠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그가 호수 방향을 확인하려던 때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팡. 소리와 함께 저 멀리 바이킹 구역에 조명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이내 시끄러운 댄스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귀청을 찢을 듯, 노랫소리는 아주 크고 또 거슬렸다.
“께에…?”
“꾸우, 꾸우…!”
태유준의 등 뒤를 따라오던 좀비 무리가 고개를 바이킹 쪽으로 돌렸다. 그들은 홀린 듯, 일제히 바이킹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노래는 쿵, 쿵. 땅바닥에 진동을 울릴 만큼 소리가 컸기에 인근에 있는 좀비들은 다 그리로 몰려갔다. 태유준 주변에 있던 좀비들뿐 아니라 아마도 이 공원 내의 모든 좀비가 총출동한 듯, 삽시간에 바이킹 앞은 원래 현실 세계에서 그런 것처럼 장사진이 늘어섰다.
“꿰엑!”
“끼아악!”
좀비들은 쿵쾅거리는 음악에 맞춰 흥이 났는지 펄쩍펄쩍 뛰었다. 어떤 놈들은 바이킹에 올라타 승객 흉내를 내기도 했고, 대다수는 바이킹 뱃머리 근처에 서서 주변을 맴돌았다.
그때 바이킹이 흔들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
태유준은 경악했다. 바이킹에 타고 있던 좀비들은 인정사정없이 구르기 시작했다. 점점 진폭이 커지면서 이번에는 바이킹을 붙들고 놀던 놈들이 휘잉, 멀리 날아갔다. 바이킹 뱃머리에 두드려 맞고 날아가는 좀비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리와 요란함에 이끌린 좀비들은 그럴수록 더 바이킹 앞으로 몰렸고, 여지없이 한 대씩 얻어맞았다. 한밤중의 서커스가 따로 없었다.
“어떻게 이런….”
넋이 나간 태유준이 좀비들의 자멸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태유준은 식겁하며 공격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상대는 원혁이었다.
“쉿.”
“형제님!”
“무사했네.”
원혁은 태유준의 얼굴에 남은 핏방울을 닦아 주며 진심으로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는 괜찮았습니다…. 근데 바이킹 저거 뭡니까.”
“놀이공원이잖아.”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미소를 지으며, 원혁이 대답했다.
“나 쫓아오던 놈들 해치우고 나니까 다른 좀비들이 보이더라고. 어떻게 일망타진할까 고민하다가 놀이기구 하나 태워 주기로 했지.”
“유인이 제대로 된 것 같군요. 지금도 달려드네요.”
좀비들이 괴성을 지르며 너도나도 바이킹을 타겠다고 다툼을 벌였다. 운 좋게 탑승한 녀석들은 원심력에 의해 바이킹 내부를 구르다가 떨어지거나 날아갔고, 못 탄 녀석들은 배에 얻어맞아 곤죽이 되었다. 이제 거의 다 소탕이 된 모습이었다.
“정말 대단한 작전입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재미있어 보이지?”
원혁이 바이킹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
“우리도 같이 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태유준은 원혁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아프게 때리며 타박을 줬다.
“아, 아파. 생명의 은인한테 이러기야?”
“저기 타자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알았어. 그러면 우리 회전목마나 하나 타고 갈까?”
“아까 오다가 말 위에서 자고 있는 좀비 봤습니다.”
“이런, 선점당했네. 그럼 말이지.”
“네?”
“내가 괜찮은 디저트집을 알아냈는데 거긴 어떨까?”
원혁이 바이킹과 반대 방향에 있는 식당가를 가리켰다. 반쪽으로 절단 난 카페테리아 간판이 보였다. ‘츄러스&아이스크림’이라는 글자에 간헐적으로 빛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전기가 제대로 작동하는 집 같았다.
“저 안에도 들어갔다 나오셨어요?”
“응. 저기 안에는 좀비 없더라. 아이스크림 냉장고는 멀쩡하게 가동 중이고. 츄러스 반죽도 냉동고에 있어.”
“진짜요?”
“놀이공원 왔으면 츄러스에 아이스크림 정도는 먹어 줘야지.”
원혁은 팔자 좋은 사람처럼 휘파람을 불고서 태유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태유준은 좀비들을 사정없이 굴려 놓고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가자는 남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오랜만에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기는 했다. 원혁과 있다 보니 자신조차도 조금씩 이상해져 가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좋습니다.”
“오케이. 데이트 분위기 내 보자고.”
“…데이트요?”
“얼른 가자, 신부님.”
원혁은 태유준의 손목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태유준은 그를 쫓아 달리며 댄스 음악과 멀어졌다.
“헉. 헉.”
“내가 너무 빨리 달렸나?”
“달리기 속도 하나는 끝내주시네요.”
카페테리아 안으로 들어온 둘은 문부터 걸어 잠그고 숨을 골랐다. 매장은 의자가 죄다 넘어져 있고 비품이 바닥을 구르는 등 엉망이었다. 바닥에 냅킨과 물티슈가 나뒹굴고 있어, 태유준은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내가 닦아 줄게.”
“괜찮습니다.”
“피 많이 튀었어. 내가 해 줄게.”
“괜찮대도요.”
“어허. 형아 말 듣자.”
“형아요?!”
태유준은 어처구니없는 호칭에 코웃음을 쳤다.
“내가 형인 거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아. 얼른 얼굴 이리 대.”
“…거울이 없어서 부탁드리는 것뿐입니다.”
“좋아, 좋아. 얼른 이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