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36화 (3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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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요?”

“농담. 그냥 씻어, 신부님.”

“한강에서 세례 받으신 형제님이 먼저 씻으셔야죠.”

태유준은 이를 악다물며 욕실 문을 닫아 주었다.

잠시 뒤 원혁이 샤워 가운 차림으로 나왔다. 가운이 너무 작고 타이트해 그의 가슴 근육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태유준은 민망했으나 원혁은 아무렇지 않은 모습이었다.

“흠흠. 그럼 저도.”

태유준은 잽싸게 욕실로 들어갔다. 그는 샤워를 하면서 수도원 기도실보다도 넓은 욕실을 구경했다. 욕조는 성인 두 명이 들어가도 될 정도로 컸으며, 창이 나 있어서 바깥으로 한강이 보였다.

간만에 몸이나 담가 볼까.

공중목욕탕에 다니지 않는 태유준은 욕조에 몸을 담그는 일이 잘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고급 대리석으로 꾸며진 욕조가 보이니 절로 몸을 담그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을 콸콸 틀어 바닥을 막고, 태유준은 널찍한 욕조 안에 나른하게 늘어졌다. 옆에는 프랑스어로 라벨링된 배스 솔트까지 갖춰져 있어 한 꼬집 집어서 물에 풀어 보았다. 기분 탓인지 근육의 피로가 풀리는 듯했다.

쫓기고 도망치며 매일 밤 다른 곳에서 자는 삶.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24시간. 점점 살이 빠지고 신경이 예민해져만 갔다. 하지만 이렇게 따뜻한 물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꼭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바깥세상이 평화로운 듯한 착각이 들었다.

“…좋네. 잠깐만 눈 감고 있자.”

태유준은 깊게 심호흡하며 눈을 감았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며 곧 컴컴한 어둠이 그를 감싸 안았다.

* * *

“…음…?”

눈을 떴는데 몸이 똑바로 눕혀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찰박거리는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몸은 보송하게 말라 이불에 폭 싸여 있었다.

“뭐야.”

태유준은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일으켰다. 사방을 둘러보니 자신은 침대 위에 누워, 깃털 베개와 바디 필로우에 둘러싸인 상태였다.

“미, 미친.”

몸을 더듬어 보니 다행히도 샤워 가운을 입고 있었다. 휴. 한숨을 내쉬는데 머릿속을 퍼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만, 나 이거 내 손으로 안 입었는데? 그렇다는 건….

“아악!”

태유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침대를 굴렀다. 곧 거실 쪽에서 지극히 말짱한 셔츠와 슬랙스 차림을 한 원혁이 걸어 들어오며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신부님. 일어났어?”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저 지금 해명이 필요해요. 당신이 저를 욕조에서 꺼내서 여기 눕힌 겁니까? 네?”

“해명이라니. 찬물에 몸 담그고 있으면 해롭잖아. 안쓰러워서 건져 준 것뿐인데.”

“꺼낼 게 아니라 저를 흔들어 깨웠어야죠!”

“너무 잘 자고 있었는데 어떻게 깨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고.”

원혁이 태유준 가까이 다가와 침대맡에 앉았다. 태유준은 이불로 몸을 가리며 몸을 물렸다.

“자는 모습이 아주 아기 천사가 따로 없던데.”

“천사 모욕죄입니다.”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어디까지 봤어요.”

“다.”

오 마이 갓. 태유준은 이마를 짚고 대자로 쓰러졌다. 이대로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었다.

“창피해?”

“…말 시키지 마세요.”

“남자끼린데 뭐 어때.”

“평상시에 절 희롱하시던 분이시잖아요. 설마 이상한 짓 하신 건 아니죠?”

“섭섭하네. 나 그 정도까지 변태는 아니야. 약간만 변태야.”

“말이라도 못 하면…!”

태유준은 몸을 벌떡 일으켜 베개를 움켜쥐고 휘둘렀다. 원혁은 요령 좋게 베개를 피하며 피식거렸다.

“그러지 말고 이거나 좀 먹어 봐.”

“뭔데요.”

태유준이 쟁반 안을 살펴보았다. 사실 아까부터 맛있는 냄새가 나서 호기심이 동하던 중이었다. 탄산수와 생수와 함께 있는 것은 인스턴트 파스타였다.

“어…? 파스타!”

“여기 전자레인지랑 냉장고가 있거든. 다행히 유통 기한 한참 남았더라고. 따뜻할 때 먹어.”

“이런 걸… 저 줘도 돼요?”

“왜 안 돼?”

“식량이 귀하잖아요.”

“나는 두 그릇 먹었는데?”

원혁은 자기가 말하고도 재미있다는 듯 또 소리 내 웃었다. 태유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포크를 쥐었다. 고급 호텔 식기답게 은으로 되었는지 굉장히 묵직했다.

포크로 돌돌 파스타 면을 말았다. 이런 행동이 너무 오랜만이라 태유준은 손동작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또한 음식에서는 모락모락 김이 났다. 김은진의 집에서 해 먹은 밥 이후로 온기가 있는 음식은 아마도 처음이었다.

“와, 맛있어요.”

“끝내주지? 한국은 편의점 음식이 제일 맛있더라고.”

“네. 진짜로 맛있어요.”

새빨간 토마토가 잘 으깨어진 데다가 매콤한 맛이 살짝 배어 있어, 파스타는 정말로 맛이 좋았다. 하지만 그보다도 태유준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타인이 자신을 위해 준비해 준 음식이라는 점이었다.

“고마워요.”

“뭘. 신부님 위해서라면 이깟 파스타 열 번도 더 데워 줄 수 있어.”

“진짜예요?”

“나 의외로 거짓말은 안 해. 내가 지금까지 신부님한테 사기 친 적이 있던가?”

“음….”

“내가 신부님한테 한 말들을 되짚어 보자. 신부님 예뻐, 내 이상형이다. 나 신부님 안 버려. 딱 그 정도인 것 같은데.”

“….”

“아까 신부님 알몸 훔쳐본 것도 다 말했잖아. 감기 걸릴까 봐 물에서 건져서 닦아 주고 말렸어. 나 있는 대로 다 말하는 스타일이야.”

“…제 벗은 몸을 본 것 빼고 다 감사드립니다.”

“으흠. 그래.”

원혁은 대단히 잘난 일이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태유준은 파스타 그릇을 다 비우고 물을 들이켰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얼음이랑 콜라도 있는데 마실래?”

“좋습니다. 마시면서 회의하죠. 앞으로 어떻게 이동할 건지 체크 좀 해야 할 것 같아요.”

두 사람은 호화로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얼음 컵에 콜라를 따랐다. 그리고 태유준의 핸드폰으로 지도 앱을 열어 현재 위치로부터 여의도까지의 모의 경로를 띄웠다.

“일단 한강 이남으로 내려오는 건 성공했어. 그렇지만 여의도까지 가려면 또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지.”

“중간에 좀비 떼를 마주치거나 선착장에서처럼 위험한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요.”

“음… 그렇지. 그래서 하루 이틀 만에는 가지 못한다고 봐야 할 것 같아.”

태유준은 비즈니스호텔들이 밀집해 있을 법한 번화가들을 하나씩 표시하며 서쪽으로 향하는 경로를 체크했다. 그러다가 생각이 다른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말이죠,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뭔데?”

“문신이 있던 좀비들이요.”

“아. 그놈들. 7번하고 12번.”

“그놈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 좀비들하고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가면서 밤에도 활동하는 좀비가 있다면 숫자 문신이 있는지 확인하면 좋을 것 같아요.”

“왜? 위험하잖아. 물론 관심이 가는 건 이해할 수 있는데….”

태유준은 잠깐 망설였다. 장 박사가 무사했을 때,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이 자꾸만 머리를 맴돌았다. 그 이야기를 이 남자에게 털어놓아서 유리할 게 있을까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기에는 찝찝하기도 했거니와, 일단은 서로 정보를 합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만 장 박사님은 이 좀비 사태를 예견하고 계셨던 게 아닌가 싶어요.”

“뭐?”

원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태유준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사태가 터지기 일주일 전쯤이었을 거예요. 평소처럼 통화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불로불사의 몸을 가진다면 어떨 것 같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불로불사?”

원혁의 얼굴이 굳었다.

“저는 그건 신의 섭리를 반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대답했습니다. 산 자에게는 신이 부여한 수명이 있고 그 수명을 거스르는 것은 대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 즉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음… 마치 좀비 이야기처럼 들리네. 늙지도 않고 목을 베지 않으면 죽지도 않을 테니까. 좀비란 원래 숨이 붙은 시체잖아.”

“네. 이미 한번 영혼이 나가 버렸기 때문에…. 사실 좀비는 가만히 놔두고 먹을 것만 공급하면 영원히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이론적으로 아는 좀비란 그런 존재예요.”

장 박사가 말한 불로불사의 존재가 만약에 좀비라면, 대체 그는 왜 좀비를 연구한 것일까. 평범한 의학자이자 약학자인 그가, 왜.

태유준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원혁이 제법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장 박사가 협력해서 일했다는 일융제약 말이야.”

“네?”

“내가 듣기로는 불법 임상 시험을 하고 있었다고 해. 내가 그쪽에 스파이를 심어 놨었거든. 이 난리 통에 다 연락이 두절되었지만, 사태가 터지기 직전까지만 해도 수상한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윤리적으로 허락받을 수 없는 그런 실험 말이지.”

“수상한 실험이요?”

“시신을 가지고 실험을 했대. 일반적인 시신 기증을 통한 의학 연구 말고, 불법으로 구한 시체를 가지고 시체 부활 실험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있어.”

“뭐라고요?”

태유준은 경악했다. 죽은 사람의 시신을 가지고 되살릴 시도를 하다니. 그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행위였다.

“말이 안 됩니다. 어떻게 죽은 자의 시체를 살리죠? 신이 노할 행위인 것을 떠나, 과학적으로 말이 안 돼요.”

“신학도면서 과학을 믿어?”

“믿고말고요. 신학과 과학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습니다.”

“흠. 그렇다면 좀비들은? 죽은 놈들이 살아 움직이는 존재의 궁극인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었다. 태유준은 아주 조금씩 몰려드는 오한을 느꼈다.

“…죽은 자가 살아 움직이는 존재… 맞네요.”

두려웠다. 태유준은 아주 끔찍한 진실의 문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태유준은 장 박사가 일융제약과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몰랐다. 그저 그들이 과제를 주었고, 장 박사가 시간 내에 임무를 완수해야 돈을 받을 수 있는 골치 아픈 상황에 놓여 있었다는 것만 안다. 태유준이 아는 건 거기까지였다.

“…머리가 복잡하네요. 불로불사, 좀비, 일융제약. 모든 게 다 엉망진창으로 섞여서….”

태유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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