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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혁은 배 안을 미친 사람처럼 빠르게 달려 조타실을 찾아갔다. 만능 키로 문을 따고 들어가 유람선의 시동을 걸었다.
“마지막 탑승 기회입니다! 얼른 타, 이 새끼들아!”
장비를 가동하자 우렁찬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렸다. 태유준은 좀비들이 정신없이 탑승하는 모습을 지켜본 후, 배와 연결된 닻줄을 찾았다. 유람선 닻줄은 굵은 말뚝에 칭칭 감겨 있었다. 태유준은 서둘러서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배가 서서히 출발했다.
원혁은 조타실을 빠져나와 뱃전에 선 후, 미련 없이 강으로 뛰어들었다. 첨벙! 요란하게 물이 튀었다. 그는 물속으로 깊게 잠수한 다음 선착장 쪽으로 헤엄쳤다. 양팔을 빠르게 휘젓고 다리로는 힘 있게 킥을 찼다. 그러는 와중에 시동이 걸려 있는 유람선은 제멋대로 움직여 그와 반대 방향으로 멀어졌다.
강변까지 헤엄쳐 온 원혁은 덱에 두 손을 올렸다. 태유준이 두 팔을 뻗어 원혁의 손을 잡고 그를 끌어 올렸다. 원혁은 강물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입가에는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태유준은 트럭 짐칸에서 침대 시트를 가져와 원혁에게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이거라도 걸치세요.”
“계기판 보니까 배에 기름이 얼마 안 남았더라고. 멀리는 못 갈 거야. 아마 저대로 한강 위에 둥둥 떠 있겠지.”
“그렇겠네요. 자기들끼리 아비규환을 벌이다가 굶어 죽겠죠.”
진심을 담은 말이었다. 통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지금까지 좀비들을 피해서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면으로 맞서고 나니 승리감마저 들었다.
“이게 다 신부님 아이디어 덕분이지.”
그렇게 말하며 원혁은 상의를 훌렁 벗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유준이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그렇게 벗으시면 어떡합니까.”
“왜? 더러운 한강 물에 젖어서 찝찝하잖아. 아까 먹어 보니까 물맛이 영 아니더라고. 어, 신부님 얼굴 빨개졌다.”
“안 빨개졌습니다.”
태유준은 저도 모르게 버럭 큰 소리를 냈다.
“쉿, 해 떴으니까 조용히 해야지.”
원혁의 말에 유준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얼른 가시죠.”
그렇게 말하며 태유준은 급히 뒤돌아 트럭으로 뛰어갔다. 원혁은 큭큭 웃었다.
다시 차에 올라탄 뒤에는 태유준이 운전대를 잡았다. 흠뻑 젖은 사람에게 운전을 시킬 수 없단 이유에서였다.
“젖은 채로 앉아 있으니까 기분이 안 좋네.”
“표정은 좋으시네요.”
“어. 나 지금 기분 좋아.”
“저도입니다. 그런데 해가 떴으니 얼른 낮 동안 지낼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여전히 상의를 벗고 있는 원혁 쪽을 최대한 보지 않으려 애쓰며 태유준이 말했다.
이곳 잠실은 아파트와 백화점이 밀집한 지역이었으나 태유준은 이쪽 지리를 잘 몰랐다. 어디로 가야 적당히 빈 호텔이나 모텔이 나올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일단 대로로 나가 볼까요, 아니면 엑스코스 쪽으로 빠져서 호텔을 뒤져 볼까요?”
태유준이 묻자 원혁은 대답 대신 대시 보드를 뒤적였다. 그런 다음 자그마한 물건을 꺼냈다.
“이게 뭐죠?”
언뜻 보기에 그것은 신용 카드처럼 보였다.
“마법의 성 입장권.”
“재미없어요. 농담하지 마세요.”
“진지하게 한 말인데 들어 주지를 않네. 잘 봐.”
가만히 보니 카드에는 대기업 호텔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어…?”
“어딘지 알지?”
카드 키에는 호텔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잠실의 랜드마크이기도 한 호텔로 태유준도 알 만큼 유명한 특급 호텔이었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요?”
“왜겠어. 이 엿 같은 사태가 터지기 전에 내가 묵고 있었으니까.”
“뭐라고요?”
“좀비 사태 터지기 일주일 전인가. 나 장 박사 찾아서 진작 한국에 와 있었거든. 이 호텔 스위트룸에서 잤고, 고구마 트럭 대신 젝라렌 타고 다녔어.”
태유준은 입을 떡하니 벌렸다. 유명 제약 회사 사장이라더니, 과연 재벌이 맞았다. 그동안 살아남기 급급한 모습과 저한테 저질 농담을 하는 모습만 봐서 몰랐는데 알고 보니 드라마 속에나 나올 법한 인간이 맞았던 것이다.
태유준은 자신과는 너무나 상반된 원혁의 경제관념과 돈 씀씀이에 놀랐으나, 어쨌거나 잠실에 들어선 이 상황에서는 잘된 일이었다.
“이 키, 지금도 작동이 될까요?”
“당연히 되겠지. 안 되면 뭐, 내 방문 도끼로 따고 들어가면 돼.”
“주유소에서 가져온 도끼요?”
“그럼. 우리도 특급 호텔에서 하루 정도는 쉬다 가야지.”
“좋습니다. 제가 모실게요.”
트럭이 산뜻하게 방향을 틀어 타워형 건물로 향했다. 한강변을 지나는 동안 유람선은 저 멀리 작은 점이 되었다.
호텔 근처에 도착하자 한때 잠실에서 가장 번화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도로 사정은 엉망이었다. 8차선 도로에 각종 잔해들과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어서 도저히 차로는 진입이 어려웠다.
둘은 어쩔 수 없이 트럭을 길에 세우고 도보로 이동하기로 했다. 대형 쇼핑몰이었던 건물의 모퉁이를 도는데 갑자기 좀비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대낮이라 활발하게 팔다리를 휘적이고 있었다.
“쉿.”
원혁이 손가락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소리만 안 내면 호텔까지 진입할 수 있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원혁과 태유준은 눈을 마주친 다음 발소리를 죽여 호텔 정문까지 기듯이 걸었다.
호텔 입구는 전형적인 고급 호텔 출입문다운 모습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좀비들이 회전문을 못 나가고 낀 채로 죽어 있다는 점이었다. 자기들끼리 깔고 깔려서 죽은 좀비가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모습은 비위가 상할 만큼 보기 역겨웠다.
비위가 상한 태유준은 얼굴을 찌푸렸다.
“이리로 들어가긴 글렀군. 그래도 내가 뒷문을 알아.”
“다행입니다. 천만다행이에요.”
“우리 신부님더러 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네.”
뒷문은 주차장에서 연결되는 지점에 있었다. 다행히도 그쪽에는 좀비가 없었다.
태유준은 금이 간 유리문을 밀고 호텔로 진입했다. 역시나 로비를 서성거리는 좀비가 몇 마리 보였다. 원래는 투숙객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복장과 호텔 직원, 주차 요원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복장이 한데 섞여 있었다.
호텔 문을 열고 나갈 정도의 지능도 시력도 없는 것들은 먹잇감이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기만 기다리며 이 안을 헤매고 있었으리라.
태유준은 마치 파트너 없는 춤을 추듯이 허공에 팔을 허우적거리는 좀비들을 살피다가 아주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낮 시간이라 절대로 좀비들을 자극하면 안 되었기에 두 사람은 조용히 엘리베이터 앞까지 갔다.
고급스럽고 세련된 엘리베이터와 상반되는 썩어 문드러진 좀비 한 마리가 수문장처럼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소음이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태유준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쿠쿠궁.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오는 소음이 났다.
“끼에엑…?”
좀비가 모가지를 꺾어 태유준과 원혁을 쳐다봤다. 그리고 코를 벌름거리더니 캬아악 하면서 펄쩍 점프하려 했다. 하지만 원혁은 이미 좀비 가까이 다가가 그의 발목을 건 상태였다.
“꿱!”
좀비는 정통으로 바닥에 면상을 찧으며 넘어졌다. 원혁은 자비 없이 쓰러진 좀비를 처치했다.
그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도착을 알리는 띵,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소음에 로비에 있던 좀비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먼저 탄 태유준이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는 동안 원혁이 뛰어들듯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좀비들이 빠른 속도로 엘리베이터로 손을 뻗으며 다가왔으나, 태유준은 필사적으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와중에 한때 호텔리어였을 여자 좀비가 머리부터 엘리베이터 문에 들이밀었다.
“으, 으윽!”
절대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일념하에 태유준은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그녀의 목이 문틈에 끼려 하는 바람에 태유준은 과감하게 발차기를 해야 했다.
“윽!”
반동으로 인해 태유준의 몸이 기우뚱했다. 원혁은 그런 그의 허리를 받치며 동시에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겨우 문이 닫히자 원혁은 카드 키를 센서에 가져다 댔다.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최상층을 향해 올라갔다. 속도가 너무 빨라 태유준은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하아….”
“카드 키를 대야 움직이는 시스템이라 쫓아오지는 못할 거야. 키가 있는 좀비도 있겠지만 갖다 대는 법을 잊었을 테니까.”
원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내 다다른 101층의 복도는 고요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두 사람은 각각 좌측과 우측을 살피면서 복도를 가로질렀다. 원혁의 방은 코너에 위치해 있었는데, 다행히 이곳까지는 좀비가 도달하지 못한 것인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원혁이 방문에 카드 키를 가져다 대자 띠릭,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휴….”
태유준은 안으로 들어가며 가까스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은 비운 지 오래되었지만 마지막으로 객실 정비가 되어 있었는지 새 방 같았다. 게다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굉장한 뷰를 자랑했다.
“거실이 따로 있군요.”
“스위트룸이라서.”
감탄하는 태유준에게 원혁이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서 건넸다.
“감사합니다.”
태유준은 급하게 받아 마셨다. 너무 황급하게 손을 놀린 탓인지, 물방울이 목을 적시고 후드 티 앞자락까지 흘러내렸다.
“신부님, 물 흘렸네.”
“아. 정말요.”
“옷 갈아입을래?”
“저한테 맞는 옷이 있으세요?”
“바지는 안 맞을 것 같고… 셔츠만 걸치고 있을 거면 하나 줄 수 있어.”
태유준이 정색을 하며 원혁을 쏘아봤다. 원혁은 껄껄 웃으며 태유준을 끌어안으려 했다.
“저 좀 가만히 놔둬요.”
“알았어, 알았어. 욕실은 저쪽이야. 물 잘 나오려나 모르겠네.”
원혁은 태유준을 욕실로 데려간 다음 세면대에서 물을 틀어 보았다. 다행히도 그럭저럭 괜찮은 수압으로 물이 나왔다.
“먼저 씻어요, 자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