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ail protected]
“자칫 깨웠다가는 골치 아픈 상황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 차를 돌릴 수도 없고…. 강변북로로 가려면 지금 상황에서는 직진하는 수밖에 없는데요.”
“그럼 최대한 조용히 가야지. 밤이 깊었으니까 어지간해서는 안 일어날 거야.”
원혁은 트럭의 헤드라이트를 끄고 희미한 가로등 불에 의지해서 아주 느릿하게 차를 몰았다. 육교 바로 아래를 지날 때 태유준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머리 바로 위에 수십 마리의 좀비가 있다. 원혁과 유준을 보호해 주는 것은 트럭 지붕의 철판뿐이었다. 부디 무사히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숨 막히는 시간이 지나고 트럭은 천천히 육교 아래를 통과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육교에서 한참 더 간 후에서야 그들은 숨을 돌렸다.
“무사히 지나온 것 같네.”
“천만다행입니다.”
“이제 속도를 높이면 되지 않나? …잠깐만.”
기어에 손을 가져다 댄 원혁이 사이드 미러로 고개를 홱 돌렸다.
“무슨 일입니까?”
“젠장. 말도 안 돼.”
“뒤에 뭐가 있어요?”
“육교에서 한 새끼가 뛰어내렸어. 이쪽으로 달려오는데?”
“네? 그럴 리가요.”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사이드 미러로 뒤를 살피자, 태유준도 원혁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뒤에서 팔다리가 꺾이고 점프 슈트로 보이는 옷을 입은 키 큰 좀비가 미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허벅지와 무릎이 완전히 꺾였는데도 마치 운동선수처럼 힘차고 빠르게 달려오는 모습이 지금까지의 밤 좀비들과 달랐다.
태유준은 혼란스러웠다. 좀비는 밤에 극도로 느려진다. 어지간한 자극이 없으면 잘 깨어나지도 않는다. 그 덕분에 원혁과 유준은 밤을 틈타 지금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밤에 저렇게까지 활발하게 활동하는 좀비라니.
트럭이 속도를 높였지만 좀비는 전혀 뒤처지지 않고 미친 듯한 속도로 쫓아왔다. 이래서는 도저히 따돌릴 수 없을 듯했다.
“안 되겠어. 처리하고 간다.”
원혁은 그렇게 말하며 핸들을 꺾어 트럭의 방향을 바꿨다. 끼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퀴가 아스팔트 바닥을 긁었다.
원혁은 기어를 조절해 트럭의 속도를 높이고 직진했다. 좀비가 마주 보고 달려오고 있었으므로, 달리는 트럭과 좀비 간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좀비는 무서울 것도 거칠 것도 없어 보였다.
미친 사람처럼 뛰던 좀비가 펄쩍, 높이뛰기 선수처럼 날아올랐다. 그리고 트럭 창문에 달라붙으려는 순간 트럭은 망설임 없이 좀비를 쳤다.
쾅! 텅 빈 거리에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좀비는 허공을 날아 길바닥에 널브러졌다.
“헉.”
안 움직인다. 죽었나.
“해치운 것 같지?”
“네.”
“그런데 심상치 않아. 어떻게… 이 밤중에.”
트럭 안에 침묵이 흘렀다.
“제가 보기에도 많이 이상한데요. 게다가… 예전에 봤던 좀비랑 옷이 비슷해요.”
“내 눈에도 비슷해 보였어. 내려서 한번 살펴보자고.”
“좋습니다.”
원혁과 유준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무기를 손에 쥐고 트럭에서 내렸다. 살그머니 바닥에 발을 디딘 두 사람은 좀비의 사체를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트럭에 치인 좀비는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이미 죽은 좀비였다. 덕분에 생사 확인을 위해 모험을 할 필요는 없었다.
“겉보기에는 별다른 게 없어 보이는데요.”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너무 빨랐단 말이지, 이 한밤중에.”
태유준은 쭈그려 앉아 좀비를 자세히 살폈다. 고장 나서 깜빡이는 가로등 빛에 의지해서 살필 수밖에 없었기에, 좀비의 몸 구석구석을 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이 좀비에게 특이한 점이 없는지 쭉 훑어야 할 것 같아 태유준은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했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여기 좀 보세요. 로마 숫자가 있어요!”
“로마 숫자?”
원혁이 태유준의 옆에 쭈그려 앉아 그가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바라봤다. 목덜미에 로마자의 일부분이 보였다. 원혁은 식칼로 점프 슈트를 입은 좀비의 옷깃을 더 젖혀 보았다. 그러자 표식이 완전히 드러났다.
“…로마자로 숫자 12.”
태유준이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마음속은 뒤흔들리고 팔뚝에는 소름이 돋아났다. 이와 비슷한 것을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지난번 방산 시장에서도 새벽녘에 등장한 좀비가 있었다. 태유준은 어렵지 않게 그 좀비의 손목 문신이었던 로마자 7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때는 단순한 문신이리라 치부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로마 숫자 문신을 한, 밤중에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좀비가 둘이나 되다니. 그리고 둘의 옷차림이 똑같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인가.
태유준은 원인 모를 위화감과 섬찟함을 느꼈다.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로 보였다.
“일단은 이 문신이랑 옷차림을 찍어 둬야겠어요.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군요.”
“좋은 생각이야. 심상치 않아 보이니까, 기록해 둬서 나쁠 건 없지.”
태유준이 핸드폰 카메라를 열어 좀비의 문신을 클로즈업했다. 좀비의 잿빛 피부 위에 새겨진 문신은 핸드폰 플래시를 받자 더욱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다시 트럭에 올라탄 두 사람은 강변북로 진입로에서 멈춰 섰다. 도로는 버려진 차들로 가득했다. 그 사이를 뚫고 트럭이 나아갈 방법은 없었다.
“아마 이쪽으로 피난 행렬이 이어졌던 것 같군요.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차를 버리고 달아난 것 같고요.”
태유준의 시선이 문이 열린 채로 방치된 차량들, 짐 가방, 버려진 물건들에 가 닿았다. 아마도 피난 행렬 중에 사람들은 좀비와 맞닥뜨렸고, 살기 위해 차에서 내렸을 것이다. 몇이나 살아남았을까. 그리고 그들 중 몇이나 좀비로 변했을까.
물병, 책가방과 함께 바닥에 인형, 로봇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아이의 친구였을 장난감이 지금은 혼자 남겨져 있었다.
“별수 없군. 시가지를 가로지르자.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대신에 잠실로 확실하게 갈 수 있을 거야.”
“네. 그 수밖에 없을 거 같네요.”
시가지를 가로지르면 잠실 대교 북단까지 막힐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을 뚫고 가는 행위이다 보니 언제 어떤 위험과 맞닥뜨릴지 몰랐다. 그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이 와 버린 것이다.
트럭은 역주행해 진입로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시가지로 진입해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먹물처럼 어두운 한밤의 길, 인간이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태유준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인간은 지하에 묻혀 있어야 할 시체들에게 낮을 약탈당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영원토록 햇빛을 탈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 * *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양옆으로 즐비한 길을 달리다 보니 주유소가 하나 보였다.
“기름은 얼마나 남았죠?”
“그다지 없어. 저기서 채우고 가는 게 좋겠군.”
두 사람은 서행하며 주유소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차에서 내린 태유준은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그들 말고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버려진 주유소의 가격판만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태유준이 트럭에 기름을 넣는 동안 원혁이 부지 내를 두리번거렸다.
“이만하면 기름은 충분히 넣은 것 같고 기름통이 어디 있을 거 같은데. 좀 챙겨 가야겠어.”
“같이 찾으러 갈까요?”
“아니, 신부님은 고구마 좀 지켜 줘. 난 좀비 마주치면 이놈으로 처단할 테니까.”
품 안에서 중식도를 꺼낸 원혁이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주유소 안쪽으로 걸어갔다.
혼자 남겨진 태유준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굳은 팔과 어깨를 스트레칭했다. 초가을이라 날이 쌀쌀해 공기가 신선했다. 늘 차 안에, 벙커 안에만 있어 느끼지 못했던 야외의 바람이 시원했다.
“아… 좋네.”
이 와중에 좋다는 말이 나오다니. 스스로가 신기했으나 좋은 건 좋은 거였다. 모처럼 맛보는 날것의 공기였다.
원혁은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통을 찾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계속 트럭 옆에서 원혁을 기다리고 있자니 지루했다. 태유준은 발부리에 걸리는 돌멩이를 걷어차며 시간을 죽였다. 그때 옆쪽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들려왔다.
설마 한밤중에도 가공할 속도로 뛰어다니는 그 좀비가 다시 나타난 것일까? 긴장한 그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아, 뭐야. 사람이 있었네?”
하지만 나타난 것은 좀비가 아니었다. 껄렁한 차림새의 남자들이었다. 키가 크고 꼬챙이처럼 마른 남자와, 키가 작고 덩치가 남다른 남자 2인조였다. 전자의 남자는 공사판에서 쓰이는 삽을 들고 있었으며, 후자는 심지어 손도끼를 들고 있었다. 차 소리가 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여기까지 걸어서 온 모양이었다.
“너, 뭐냐?”
덩치가 대뜸 반말로 물었다. 그의 손에서 도끼날이 빛났다.
“그쪽이야말로 누구십니까.”
좀비가 아닌 것은 십년감수할 일이었으나 이들이라고 해서 느낌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도끼라니, 이건 심상치 않았다. 태유준은 나쁜 예감에 몸을 긴장시키며 남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꼬챙이처럼 마른 남자가 바닥에 탁, 침을 뱉은 후 대답했다.
“알 거 없고, 여기 우리가 찜한 데니까 꺼져.”
“이곳 사장이십니까?”
딱 봐도 주유소 사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일단 확인을 위해 물었다.
“아니. 사장은 무슨.”
남자들은 태유준의 이야기가 웃긴다는 듯 히히덕거렸다.
“그게 아니고 여기 새로운 주인장이라면 알아듣겠냐? 당장 여기서 썩 나가.”
“저희는 기름을 좀 얻어 가려고 왔습니다. 사장이 아니시면 상관 안 하셔도 될 거 같은데요.”
태유준이 말하자 덩치 좋은 쪽이 받아쳤다.
“내가 찜했다니까? 누구 마음대로 기름을 훔쳐, 이 피죽도 못 얻어먹게 생긴 새끼가. 혼나 볼래?”
“기름이 그쪽 소유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 나눠 쓰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 말로는 안 되겠네 이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