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32화 (3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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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트럼펫을 곁들인 재즈 선율이었다. 원혁이 턴테이블 옆에 서서 바이닐을 세팅 중이었다. 태유준은 아날로그식의 기계를 실제로는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혁이 플레이어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때. 들을 만해?”

“…좋네요. 무슨 곡인가요?”

“냇 킹 콜 곡이야. Unforgettable. 어머니가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즐겨 들었던 노래지.”

태유준은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원혁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무슨 뜻이에요?”

태유준이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그 손을 바라만 보고 있자 원혁이 재차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신청하는 거야. 손잡아.”

“남자끼리 무슨 춤입니까. 그리고 저 춤 못 춰요.”

“신학교에서는 춤 안 배워?”

“불경한 소리 하지도 마세요.”

“그럼 이제부터 배우면 되겠네.”

“아니, 이 시국에 무슨 춤….”

장 박사 찾아가는 길이 구만리다. 한번 길을 나설 때마다 살생에 목숨을 건 도주에,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힘들게 살아가는데 웬 놈의 춤인가. 태유준은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원혁은 끈질겼다. 그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태유준의 손을 잡았다. 악력이 강해 손아귀 안에 온몸이 갇힌 기분이었다. 태유준은 헛기침을 하며 손을 조금 빼내려 했으나, 원혁은 그의 손을 놓아주기는커녕 더욱 세게 쥐어 완전히 옭아맸다.

나만 분위기 묘한가.

태유준은 가까이서 들려오는 원혁의 숨소리도, 희미한 향수 냄새도 다 거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치도록 신경이 쓰였다. 반면에 원혁은 신경이 쓰이지 않는지, 태유준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태유준은 마지막 반항을 해 보았다.

“저 몸치예요. 박치고.”

“그냥 나 따라와.”

원혁의 커다란 손이 태유준의 등을 감싸 안고, 두 사람은 함께 발길을 옮겼다. 태유준은 원혁을 엉거주춤 따라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어느새 스테이지 위에 올라와 있었다. 너무도 낯설었다. 무대라는 공간이. 성전에서 성가를 부르고 복음을 외는 단상이 아닌 사람들이 흥청망청 춤을 추기 위한 무대는 처음이었다.

“그런데 손이 어디에 가 계시는 겁니까?”

태유준이 정색하며 물었다.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신부님은 오른손 내 어깨에 올려. 그리고 가만히 있어.”

“…이렇게요?”

“그래. 잘하네.”

원혁이 시키는 대로 하자 두 사람 간의 간격이 더 좁아졌다.

내가 왜 이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좀비 세상 한복판에서 춤이라니.

태유준은 스스로도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모든 것을 원혁의 손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자신을 감싸던 손. 이 거칠고 딱딱한 손에 이끌린 것이다.

더 이상 깊은 생각은 하기 싫었다. 속도 안 좋고, 술도 아직 덜 깬 것 같고, 빙빙 도는 춤을 추느라 다시 어지럼증이 올라왔다.

두 사람은 템포 있는 곡조에 맞추어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태유준은 인생에 한 번도 이런 춤을 춰 본 적은 없었지만, 원혁이 이끄는 대로 조금씩 몸을 움직이다 보니 요령이 붙는 것 같았다.

“신부님.”

원혁이 태유준의 눈을 바라봤다.

“나는 신부님 안 버려.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원혁은 달콤하게 웃고 있었다. 태유준은 원혁의 부드러운 눈빛에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계속해서 들여다보면 무언가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저는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한 적 없습니다. 우리는 협동하는 관계지 버리고 버림받는 그런 관계가 아니잖아요.”

“너무 냉정하게 말하지 마.”

“제가 냉정한 게 아니라 형제님이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거겠죠.”

“내가 그래?”

“네. 지금 창밖에는 좀비가 가득하고 지금은 아침 9시예요. 누가 이 상황에서 노래 틀고 춤을 춰요?”

원혁이 소리 내 웃었다.

“누구긴. 나랑 신부님이지.”

곡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갔다. 피치가 높아지는 곡조에 맞춰 태유준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문득 이 상황이 너무나 우스워 오랫동안 이 광경을 잊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했다.

벽 너머, 한 층 위의 거리에는 좀비들도 저마다의 춤을 추고 있을 것이다. 나무에서 깨어나, 전신주에 매달려 머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밤을 지나, 또 하루의 스산한 춤을 준비하겠지.

“잠깐만이라도 좋으니까, 아무 생각 하지 마.”

원혁은 마치 태유준의 생각을 읽은 듯 낮게 속삭였다. 태유준은 잠시 원혁의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러니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이구나. 당장 내일 좀비에게 물어뜯길지 모르고, 며칠 내로 이 세상은 완전한 좀비 지옥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내 몸은 나의 것이고 마음대로 움직이며 춤을 출 수 있다.

태유준의 정신은 과거에 붙들리지도 않고, 먼 미래를 향하지도 않았다. 그저 현재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지금 눈앞에서 자신과 눈을 맞추고 있는 한 존재. 원혁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았다.

그 기분이란 말로 형언할 수 없이 기묘했다. 이 망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와 소통하고, 말을 하고, 서로의 목숨에 신경 쓰는 존재.

목적이 같다는 이유로 동행하고 있으나 그와 자신은 완전한 타인이었다. 원혁을 경계하고 날 선 태도로 그를 대하던 자신이, 지금은 함께 스텝을 맞추고 손을 맞잡고 있다. 이제 원혁이라는 남자는 자신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단순한 동행이 아닌, 여정을 함께하는 파트너로.

원혁이 더욱 세게 태유준의 손을 잡고 등을 단단히 받쳤다. 마치 계속해서 손을 잡고 오래오래 춤을 출 것처럼, 두 사람은 굳게 손을 잡았다.

음악이 가라앉아 여운을 남기는 곡조가 흘러나올 때쯤이었다. 원혁이 태유준을 당겼다. 예상치 못한 템포에 태유준의 스텝이 꼬여 버렸다.

“아.”

거의 넘어질 것처럼 그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이런, 조심해.”

원혁이 그의 몸을 받쳤다.

“고맙습니다.”

태유준이 고개를 들며 말하다가 흠칫했다. 두 입술이 지나치게 가까웠다. 이 상황에서 둘 중 하나가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입술이 닿는 건 일도 아니었다.

원혁이 태유준을 빤히 쳐다봤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눈이 아니라 입술이었다. 그 시선을 읽어 낸 태유준은 재빠르게 원혁을 밀어 냈다.

“이상하게 쳐다보지 마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가슴이 쿵쾅거리는 건 태유준이었다. 원혁은 그런 태유준을 보며 피식 웃었다.

“왜 쳐다보면 안 돼?”

태유준은 등을 휙 돌리며 입을 다물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뭐야. 나 왜 이래.

이렇게 갑자기 다가오면 당황스럽잖아. 태유준은 남 탓을 하며 열 오른 얼굴에 손부채질을 했다. 하지만 뛰는 가슴은 오랫동안 가라앉지 않았다.

* * *

두 사람은 앞으로의 경로에 대해 회의했다. 어스름이 깔리자 슬슬 다시 바깥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 그러려면 두 손이 묵직해야 한다는 게 그들의 공통 의견이었다.

그들은 클럽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다. 다행히 좀비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다시 트럭에 오르는 일뿐이었다. 차를 바로 앞에 세워 놨으므로 태유준이 생각하기에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태유준이 먼저 문을 열고 나가 차를 찾았다. 바에서 갖고 나온 물건이 묵직했기에 짐칸에 생수며 각종 비품, 손바닥만 한 타월들을 먼저 실으려 했다. 무심코 품 안의 물건을 짐칸으로 올리려던 태유준이 굳었다.

“…읍.”

원혁이 뒤에서 태유준을 감싸며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좀비 한 마리가 짐칸에 큰대자로 누워 있었다. 움직임이 적고 가끔씩만 뒤척이는 걸로 봐서 잠이 든 듯했다.

태유준은 숨을 삼켰다. 아마도 낮 동안에 짐칸에 기어올라 간 것이리라. 그대로 박스를 내려놓았더라면 좀비를 깨울 뻔했다.

“내가 처리할게.”

원혁이 입 모양으로 말한 다음 태유준을 놓아주고 조심스럽게 차로 다가갔다. 원혁이 손을 조금만 뻗으면 박스를 하나 쥘 수 있었는데, 그 안에는 식자재 마트에서 털어 왔던 식칼이며 가위, 돈가스 고기를 찧는 망치 같은 무기가 담겨 있었다.

바로 골로 보내려는 거구나. 태유준은 숨을 죽이며 원혁을 관찰했다. 그런데 식칼을 빼어 든 원혁이 좀비 앞에서 가만히 있다가 다시 태유준에게 돌아왔다.

“왜 그러십니까.”

태유준이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그러자 원혁이 트럭을 가리키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저기서 죽이면 트럭에 피가 튀잖아. 잘못하면 고구마 상자에도 튈 거고.”

“네?”

“나는 그 꼴은 못 보겠어.”

“그럼 좀비 태우고 출발이라도 하자는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 가만히 있어 봐.”

원혁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트럭으로 다가가 짐칸 구석을 나뒹굴고 있는 확성기를 집어 들었다.

뭘 하려는 거지, 설마 저걸로 좀비를 깨울 생각인 건가? 그랬다가는 이 부근의 다른 좀비를 깨울지도 모르는데?

당황한 태유준은 어서 원혁을 말려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태유준의 생각은 빗나갔다. 원혁은 확성기를 크게 휘둘러 좀비의 머리를 팍, 내리쳤다. 잠들어 있다가 불시의 일격을 당한 좀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꿰…?”

그다음 원혁은 짐칸으로 휙 뛰어 올라가더니, 어리둥절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좀비를 뒤에서 걷어찼다. 그러자 좀비가 땅으로 고꾸라졌다. 떨어지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쳤는지 좀비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얼른 타!”

원혁이 운전석으로 뛰며 외쳤다. 태유준은 그때까지도 얼이 빠져 있었다. 고구마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태유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고구마가 그렇게 소중하십니까?”

“몰라서 물어? 당연한 소리를. 저건 내 희망의 상징이라고.”

태유준은 가까스로 진정되었던 머리가 다시 아파 오는 기분이 들었다.

“머리 아파? 두통약 줄까? 머리가 아플 때는 다안탁스!”

“…괜찮습니다.”

술에 취해서 머리가 아픈 건지, 이 남자 때문에 골치가 아픈 건지 모르겠네.

두통과는 무관하게 차는 어둠을 뚫고 큰길로 나아갔다.

“잠실 대교로 가려면 강변북로를 타는 게 빠르겠어요. 그게 최단 거리니까요.”

“각 대교가 다 막혔는데, 강변북로같이 큰길은 안 막혔을까?”

“일단 가 봐야죠. 여기서 강변북로는 멀지 않으니까 여차하면 다시 올라와서 시가지를 가로지르면 되고요.”

“좋아. 그렇게 하지.”

원혁은 트럭의 속도를 늦추더니 품 안을 뒤져 ‘다안탁스’ 약통을 꺼냈다.

“또 머리 아프십니까?”

“응. 하나 먹고 가야겠어.”

그렇게 말하더니 원혁은 갑자기 동작을 멈춰 세웠다. 그러고는 태유준을 빤히 봤다.

“사실 신부님이 만져 주는 게 최고긴 한데. 약보다 백배는 효과가 좋아.”

“그러십니까.”

태유준은 여상하게 말했다.

“진짜라고. 말 나온 김에 저번에 약속한 이마 무제한 만져 주기, 나 그거 아직 안 썼다?”

그러고 보니 창영과 효영 남매를 벙커에 데려다줄 때, 그런 조건을 제시한 적이 있었다.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군. 태유준은 모른 척하고 싶었다.

“하하, 운전 중이시잖아요. 집중하시죠. 그리고 그때 한 번 만져 드렸잖아요.”

“흠, 아쉽네. 하지만 그건 무제한은 아니었다고.”

원혁은 툴툴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두 사람은 큰길을 따라 강변북로로 방향을 잡았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강변북로 진입로가 나올 터였다. 그런데 원혁이 속도를 갑자기 줄였다.

“무슨 일입니까, 이마 짚어 달라고요?”

“아니. 아니야. 앞을 봐.”

“앞이요…?”

“길바닥 말고 정면에 육교.”

원혁이 조용히 말했다. 그가 말한 대로 시선을 옮기던 태유준은 등줄기에 오한이 돋아났다. 약 300여 미터 앞에 위치한 육교에 다닥다닥 좀비들이 붙어 있었다. 난간이 쇠로 되어 있어 빈틈이 있었는데, 그 칸마다 좀비가 한 마리씩 들어차 거꾸로 매달린 모양새였다.

소름 돋는 광경에 태유준은 순간 눈을 질끈 감으며 신을 찾았다. 하지만 다시 눈을 떠도 육교에는 마치 동굴 속 박쥐처럼 좀비들이 떼 지어 매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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