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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태유준이 문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냉장고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은 상태였다. 음식 상한 냄새가 훅 끼쳐 올라와서 태유준은 급하게 냉장고 문을 닫았다.
“거봐, 내가 말렸잖아.”
비위가 상한 태유준은 잠시 숨을 골랐다. 원혁은 그 옆에서 달래듯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게 형 말 들어서 나쁠 거 없다니까.”
그 말에 유준은 고개를 휙 들었다.
“형이라니요.”
“내가 형이야.”
“왜요.”
“나 신부님 교적부 가지고 있잖아. 신부님이 스물세 살인 거 알아.”
원혁이 뻔뻔하게 웃었다.
“그쪽이 나이가 더 많을지는 모르지만, 형은 아닙니다.”
“무슨 말이 그래. 그냥 형이라고 부르지.”
처음부터 내 나이 알고 있었으면서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구는 이유가 뭐야? 태유준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사실 자신보다 연상이니 형이라고 부르라면 부를 수 있었지만, 태유준은 자신도 알 수 없는 반발심이 들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능글맞게 구는 원혁이 재수 없었다.
“아니요. 사양하겠습니다.”
“화났어? 화해의 의미로 한잔하자.”
원혁이 와인병을 흔들며 말했다.
* * *
클럽 화장실은 깔끔하고, 화려하고, 쓸데없이 넓었다. 태유준은 머리를 감으면서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사람들 춤추고 놀라고 지어진 건물에서 머리를 감다니. 이건 좀 이상해.
“오.”
수건을 걸치고 나오는 태유준을 보며 원혁이 감탄했다.
“왜 그러세요.”
“왜겠어.”
“…자세히 묻지 않겠습니다.”
왜 목덜미를 힐끔거리고 난리야. 흐뭇해하는 저 표정은 또 뭔데. 지난번에 김은진의 집에서도 그러더니 또 저 집요한 시선이 따라붙는다.
태유준은 원혁을 노려보다가 소파에 앉았다.
“나도 금방 씻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말과 달리 원혁은 한참 지나서야 등장했다. 태유준과 마찬가지로 그는 머리를 감았는지 수건 하나 얹은 차림을 하고 나왔는데, 옷이 조금 젖어 단단한 팔뚝과 튼실한 가슴이 강조되었다.
그래서인지 옷을 다 갖춰 입었어도 민망한 느낌을 줘서 태유준은 자꾸 허공을 봤다.
“신부님. 한잔 줄게.”
어디서 찾아냈는지 원혁은 와인 오프너로 코르크 마개를 땄다. 와인은 탐스러운 붉은 빛깔이었다.
원혁은 자신의 잔에도 와인을 따랐다. 과연 그의 말대로 과일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뭘 위해서 건배할까?”
“글쎄요.”
태유준이 알기로 건배란 축복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으므로, 지금 떠오르는 대상이 없었다.
“그럼 내가 하지. 망한 세상을 위하여.”
“세상이 망했는데 건배요?”
태유준은 예상치 못한 원혁의 말에 피식 웃었다. 와인 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맑았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태유준은 강한 맛에 인상을 찌푸렸다.
“좀 센가? 괜찮아?”
원혁이 물어 왔다. 태유준은 괜찮지 않다는 뜻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원혁이 큭큭 웃었다.
“신부님한테는 좀 셀 거 같기는 했는데. 그래도 일단 계속 마셔 봐. 나름 고급 와인이라고.”
계속 마시면 익숙해져서 맛있게 느껴지려나. 유준은 그 말에 따라 한 모금 더 삼켰다. 비어 있는 배 속으로 와인이 내려가면서 화끈한 열감을 남겼다.
입만 댈 생각이었는데 계속 긴장으로 빳빳했던 몸은 손쉽게 술기운에 잠식되었다. 한번 술맛이 돌자 더 마시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 모금, 두 모금을 반복해 마시다 보니 어느새 태유준의 뺨이 달아올랐다. 원혁의 말마따나 계속 마시다 보니 먹을 만한 것 같기도 했다.
대신, 취기가 돌았다. 몸이 둥둥 뜨는 기분과 함께 나른한 느낌이 찾아들었다.
“신부님, 괜찮아?”
맞은편에 앉은 원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유준이 말을 꺼냈다. 평소에 원혁과 유준은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원혁이 일방적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꺼냈고 유준은 잠자코 듣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술기운이 오른 유준은 저도 모르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당신.”
“당신?”
원혁이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당신 말이야. 뭐 숨기는 거 없어?”
태유준의 물음에 원혁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왜 생판 모르는 사람이, 어? 왜 그렇게 나를….”
나를 구해 주고 자꾸만 도와주는 건데. 나쁘게 생겨 가지고는 왜 착한 일을 해? 자꾸 천국에 자리 예약하겠다고 하냐고.
“나를 뭐?”
원혁이 뒷말을 재촉했다.
“모르는 사람이 왜 나를, 신경 써 주는 거냐고.”
태유준은 발음이 살짝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그만 마셔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어느덧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원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왜겠어.”
또다. 이유를 찾아보라는 듯이 놀린다. 그가 태유준을 빤히 바라봤다.
태유준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원혁과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답을 찾기라도 하듯이.
뛰어난 육체, 빠른 상황 판단 능력, 과감함, 모든 것을 갖춘 남자는 장난스럽게 유준을 가지고 놀았지만 태유준은 그것이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진심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남자는 결코 알기 쉬운 인물이 아니었다. 원혁은 장 박사를 찾기 위해 태유준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먼저 눈을 돌린 것은 태유준이었다. 태유준은 말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 태유준의 입에서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태유준 자신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힘들어.”
작은 목소리에는 약간의 투정이 묻어 있었다. 태유준은 누군가에게 투정 부리는 것에,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장 박사를 만나고 나서 많은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장 박사에게 응석을 부리지는 않았다. 감사한 분, 믿을 수 있는 분. 장 박사의 존재는 유준에게 있어 그런 존재였다.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고 한때 가족이라 여겼던 사람들에게는 불길한 아이라며 버림받았다.
그가 지금까지 의지해 온 것은 신뿐이었다. 신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신께서는 이런 나조차도 구원해 주실 것이다. 유준을 지금까지 버티게 한 것은 어쩌면 자기 세뇌에 가까운 그런 믿음이었다.
그러다가 이 남자가 나타났다. 어느 날 갑자기 유준의 인생에 끼어들어서 지금까지 유준이 느낀 적 없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언제 버림받을지 알 수 없는데, 특히나 이런 혼란하고 잔인한 세상에서는. 깊숙한 곳에는 그런 불안감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꾸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원혁은 별다른 말 없이 손을 뻗어 왔다. 태유준이 움찔했지만 원혁은 개의치 않고 그의 한쪽 뺨을 감쌌다. 거친 남자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손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 손은 태유준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태유준은 조금씩 졸음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남자의 손가락은 위로하듯이 태유준의 뺨을 쓰다듬었다.
…괜찮지 않을까. 한 번쯤은 누군가를 믿고 기대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태유준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때 태유준의 이마에 낯선 감촉이 와 닿았다. 다소 거칠고 미열을 띠었는데도 부드러웠다. 그 아이러니한 접촉의 감각이 무엇인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눈을 떴다가, 태유준은 원혁과 눈이 마주쳤다. 아주 근접거리에서.
몽롱한 정신이라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저 방금 이마에 닿았던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는 감정만이 남았다.
“더….”
태유준은 어리광을 부리듯 속삭이며 눈을 감았다.
한 번, 두 번. 다시금 태유준의 이마로 또 검은 머리카락으로 입맞춤이 쏟아졌다. 태유준은 마치 꿈을 꾸는 듯, 알딸딸하면서도 황홀한 감각에 젖어 들었다. 쉬이. 달래는 듯한 목소리가 태유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잘 자. 좋은 꿈을 꿔. 마치 그렇게 위로해 주는 듯 목소리는 낮고 또 그윽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평생토록 마음 놓고 잠들어 본 적 없는 나를 달래 주는 듯한 이 목소리는….
태유준의 의식은 어느새 잠잠해져, 수마와 함께 평화롭게 가라앉고 있었다.
* * *
아, 속 안 좋아.
태유준은 뱃멀미를 방불케 하는 울렁거림과 어지러움에 눈을 떴다. 흡사 바닥이 배의 갑판 같았다.
“으음….”
이대로 더 누워 있어 봤자 몸이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태유준은 억지로 눈꺼풀을 열었다. 그러자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는 미러볼이 달려 있었다.
태유준은 맹세컨대 일평생 이런 천장 아래 잠든 적이 없었다. 어려서는 보육원에서 자랐고 조금 커서는 결벽증이 있던 양어머니의 관리하에 흰 천장 아래서, 그리고 수도원으로 돌아가서는 지극히 금욕적인 회색 천장을 보며 살았으니 말이다.
그럼 여긴 어디야.
태유준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남매를 벙커에 데려다주고… 장 박사님의 자취를 놓쳤다는 사실에 크게 좌절했고 술을 마셨지.
잠깐, 술? 누구랑, 언제, 어디서?
그제야 조금씩 기억이 꿰어 맞춰졌다.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숨소리와 희미한 남자 스킨 냄새 때문이었다.
태유준이 고개를 돌리자, 셔츠 앞섶이 다 벌어져 상체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원혁이 옆자리에 누워 있었다.
“주여.”
태유준은 손을 들어 눈을 가린 다음, 발치를 뒹구는 트렌치코트를 끌어다가 원혁의 몸에 덮었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눈을 떴다.
…간밤에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겠지? 술에 취해서 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든가.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되는데.
태유준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피부를 살폈다. 다행히도 별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힐끔힐끔 가슴과 손목 안쪽 같은 곳을 살폈다. 열심히 스스로를 점검하고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팔이 뻗어 나왔다.
“뭘 그렇게 부스럭거려.”
“헉.”
“왜 남의 잠을 깨우고 난리야.”
원혁은 종이 인형 다루듯이 태유준의 몸을 휘둘러 다시 기다란 소파에 눕혔다. 그러고는 나른한 기운 가득한 손길로 태유준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죠?”
태유준이 의심 많은 눈빛으로 물었다. 원혁은 피식 웃으며 태유준의 뺨을 쓰다듬었다.
“잤어.”
“네?!”
원혁의 말에 태유준은 눈이 튀어나오도록 놀랐다. 뭐가 어쩌고 저쨌다고?
“잠만 잤다고. 나랑 끌어안고.”
“…그… 그러면.”
“순수하게, 애들처럼. 됐어?”
원혁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뜨렸다. 시시껄렁한 농담에 놀아났다는 걸 깨달은 태유준은 도끼눈을 떴다. 원혁은 큭큭거리며 태유준의 뺨을 꼬집으려 들었으나, 태유준은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신부님. 맛있는 거 줄 테니까 화 풀어.”
씻고 나온 태유준의 앞에 믹스넛과 미니 프레첼, 파인애플 통조림이 놓였다. 원혁은 제집이라도 되는 양 여유롭게 바를 털고 있었다.
“이런 거 준다고 화 안 풀립니다.”
“그러면 이런 건?”
원혁이 서랍장 안의 비품을 있는 대로 꺼내어 흔들어 보였다. 전혀 도움되지 않을 듯한 물건 사이로 은근히 유용한 것들이 눈에 띄었다. 종이컵, 수저, 포크, 비닐봉지 등은 쏠쏠한 전리품이었다.
“챙겨야겠네요.”
태유준이 바로 다가가 물건들을 챙기는데, 음악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