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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유준은 순간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의 끈이 탁 잘리는 기분이었다. 허무함과 막막함이 동시에 밀려들어 왔다.
장 박사님이 바로 여기에 계셨다고. 며칠만 일찍 왔다면 만날 수 있었다니.
머릿속이 혼란해 미칠 지경이었다.
“무슨 일이야.”
“장 박사님이… 박사님이 바로 이 벙커에 계셨대요.”
“뭐? 여기 있었다니?”
“엊그제 밖으로 나가셨다나 봐요. 불과 며칠 차이로 놓친 거죠.”
태유준이 허무함을 담아 말했다. 원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박사님이 밖에 계시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그렇긴 한데, 돌이켜 보면 장 박사가 꼭 자기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으리란 법도 없었어. 연락이 안 되니까 찾아가 보자는 게 우리 생각이었을 뿐이지.”
“여의도 벙커도 아니고 여기 신용산 벙커였다니, 하필이면.”
태유준은 얼굴을 감싸 안고 무너져 내렸다. 허탈함과 무기력이 가슴 안에서 회오리쳤다. 동시에 미칠 듯한 답답함이 북받쳐 올랐다.
장 박사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었으며, 왜 연락이 되지 않는 건지 알고 싶었다. 설령 난리 통에 핸드폰을 잃어버렸다 한들 그는 필히 태유준의 번호를 외우고 있을 것이었다.
남의 핸드폰이라도 빌려 연락할 수 있는데 왜 연락 시도를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건 아마도 말 못 할 속사정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에요. 박사님 뒤를 쫓아야 돼요.”
“어디로 갔을지 어떻게 알고.”
“그건 그렇지만.”
원혁과 태유준이 대화하는 와중이었다. 김은진의 오빠가 조심스레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기, 그 중년분을 찾고 계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만.”
“어… 혹시 제가 들은 이야기라도 괜찮으시다면 말씀드릴까요.”
태유준은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김은진의 오빠는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말씀해 주십시오. 뭐든지 좋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그분이 뭐라고 하셨냐면, 위험해도 돌아가야 한다고 하셨어요. 두고 온 것들을 다 제거해야 한다고. 깨끗하게 치워 버려야 뒤탈이 없다고요.”
“돌아가야 한다고…?”
“그래서 제가 여쭤봤었거든요. 이렇게 위험한 시국인데 벙커에서 나가실 거냐고요. 그러니까 자기한테는 정리할 일이 있다면서 꼭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하셨어요.”
태유준의 머리에 번뜩 스치는 가설이 있었다. 여의도의 총성 소리, 장 박사가 전화를 걸어 왔을 때 섞여 들려왔던 낯선 남자의 목소리, 신용산까지 대피해 왔다는 장 박사. 그리고 며칠만 머무른 다음 다시 원래 장소로 되돌아가겠다는 그의 말.
퍼즐 조각들이 맞춰져 갔다. 태유준은 결론을 내렸다.
장 박사는 여의도에서 총을 든 괴한에게 습격당해 이곳 신용산 벙커로 도망쳐 왔다가, 다시 여의도 연구소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그가 반드시 수습해야 할 과제가 존재한다.
그리고 장 박사는 지금 신체가 멀쩡한데도 태유준에게 총성이 있던 날을 제외하고는 개인적인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다.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럼 다시 여의도에 갔을 확률이 높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연락을 안 하는 데는 분명히 사연이 있을 거고.”
“그게 박사님을 위협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원혁과 태유준이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말씀 감사합니다. 가족분들을 위해 기도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은진이 소식 전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태유준은 창영과 효영 남매에게도 작별 인사를 했다. 남매는 아쉬워하면서 무사를 빌어 주었다. 벙커를 나서는 길에는 김은진의 오빠가 입구까지 나와 원혁과 태유준을 배웅해 주었다. 태유준은 문득 제 소맷단을 내려다보고 아차, 했다.
“옷은 죄송해요. 나중에 돌려드릴게요.”
“죄송할 일 없으십니다.”
“그래도 남의 옷을 허락 없이 입었으니….”
“전 오히려 나중에 돌려주신다는 말이 희망이 되네요. 모든 일이 정상화되면… 여러분한테서 옷을 돌려받고 싶어요.”
태유준은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옷을 벗어 남자에게 돌려주는 날, 아마도 이 궂은비는 다 그치고 사람들은 대낮에도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으리라.
“주님께서 함께하시길.”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태유준과 남자가 가톨릭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태유준은 어딘지 모를 아쉬움과 먹먹함을 느끼며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하지만 지금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 원혁과 조금 더 빨리 여의도로 길을 재촉해야 할 때였다.
벙커를 나서 역사를 빠져나오는 태유준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가득했다.
트럭에 오른 태유준과 원혁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서울 시내를 한눈에 담았다. 당초 계획했던 대로 잠실을 통해 한강을 건너려면 이대로 계속 동쪽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이미 시간이 새벽 4시였다.
“일단 근처에서 잠깐 쉬었다 가야겠어. 이대로 쭉 가다가는 해가 뜨겠는데.”
“맞는 말이에요. 동트기 전에 여의도에 진입하는 것도 무리고, 진입한다 해도 아침이니까 뭘 시도하기도 어려워요.”
심지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해 차창 앞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비였지만 하나도 반갑지가 않고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생각만 들어 태유준은 초조해졌다.
“비 오니까 머리 아프네.”
원혁은 그렇게 말하며 글러브 박스를 열어 다안탁스를 꺼내 먹었다. 물도 없이 약을 삼킨 후 원혁은 입맛을 다셨다.
“우리 회사 두통약도 슬슬 질려 가. 내성이 생겼나?”
“제가 알기로 다안탁스 이상의 효능이 있는 두통약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맞아. 그러니까 빨리 자야 돼. 신부님이랑 쓰담쓰담 하면서 자면 다 나을 거야.”
“사설은 그만두시고요, 일단 번화가 쪽으로 가 보죠. 이 근처가 이태원인데 상점이나 호텔, 식당이 여러 개 있지 않습니까?”
“음. 좋아. 그렇게 하지.”
원혁은 이태원 쪽으로 차를 몰았다. 한때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았던 만큼, 비즈니스호텔과 부티크 호텔들이 골목마다 한 개씩은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 가서 살펴보는 족족 문이 잠겨 있거나 아니면 너무 파괴되어 있어 위험했다.
이대로 해가 뜨면 끝장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부지런히 뒷골목을 헤맸다. 그러던 중에 태유준의 눈을 잡아끄는 간판이 하나 있었다. 지하에 위치한 클럽이었다.
‘클럽 파라다이스’라고 외벽에 간판을 내건 클럽은 지하 1층에 파묻혀 있었는데, 현관문은 전면이 유리로 장식되어 있어 깊은 새벽의 어둠을 고스란히 비춰 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이 아주 살짝 열려 있었다. 좀비가 오가지 않았다는 흔적이었다.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네요.”
태유준은 순전히 이름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클럽을 선택했고, 원혁은 술이 있을 테니 좋다며 찬성했다.
그들은 트럭을 최대한 클럽 건물 가깝게 몰아 주차장에 차를 댔다. 차에서 내린 둘은 일단 바깥에서 안쪽을 관찰했다. 조명이 거의 없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한쪽 사이드에 바텐더가 설 수 있는 바 공간이 있었고 그 뒤로 냉장고가 몇 대 보였다. 꽤 넓은 스테이지는 텅 비어 있었다.
“난 여기 맘에 든다, 신부님. 술이 보여.”
“정말요. 잘하면 먹을 것도 있겠는데요. 냉장고가 보입니다.”
“그럼 여기로 낙찰.”
원혁은 더 이상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원혁이 지배인처럼 깍듯이 인사하며 태유준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네. 감사합니다.”
“아니, 이렇게 아름다우신 분이 어쩌다가 우리 클럽에.”
이런 상황에서도 심각함 하나 없이 장난을 치려는 원혁의 모습에 태유준은 피식 웃어 버렸다.
“지나가다 맘에 들어 왔어요.”
“입장료는 받지 않을게요.”
원혁이 앞장을 서고 태유준이 뒤를 따랐다. 카펫으로 마감한 로비는 두 사람의 발소리를 살그머니 지웠다. 마치 이곳에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의 흔적을 부정하듯이.
안으로 들어가니 손님들이 앉을 수 있는 화려한 가죽 소파, 호피 소파와 함께 테이블이 여럿 놓여 있었다. 마지막까지 영업 중이었는지 독한 양주와 와인, 글라스가 마구잡이로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스테이지 근처는 전 구역이 어두웠지만 바텐더 자리에 놓인 자그마한 무드등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레트로풍의 글씨로 쓰인 ‘PARADISE’ 문구가 네온사인 빛깔로 빛났다. 태유준이 다가가서 관찰해 보니 양 손바닥을 합친 것 정도 크기의 무드등은 건전지로 작동 중이었다.
그래서 클럽 전체가 소등되어도 빛나고 있었구나. 태유준은 분홍색과 파란색으로 빛나는 그 무드등이 퍽 마음에 들어 그 근처를 서성였다. 그러는 동안 원혁은 이미 와인 셀러를 열어 여러 종류의 와인을 살피는 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와인은 없네. 아쉬운 대로 이걸로 만족해야지.”
원혁이 와인 병을 들어 올려 보였다. 딱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라벨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것도 맛있어요?”
“응. 적당히 드라이하고 과일 향이 나거든.”
원혁은 와인 잔을 찾느라 주방 이곳저곳을 뒤졌다. 그러는 동안 태유준은 바 의자에 앉아 바 내부를 둘러보았다.
인테리어 소품이 전체적으로 앤티크풍인 것으로 보아 지어진 지 상당히 오래된 클럽인 듯했다. 바의 한쪽 벽에는 오래된 LP판들이 걸려 있었다.
그쪽으로 다가가 들여다보았지만 유준이 알 만한 사람은 없었다. 호텔과 마찬가지로 오래된 뮤지션들인 듯했다. LP 커버에서 밴드 멤버들은 색소폰이나 드럼 스틱을 손에 쥐고 있어, 재즈 뮤지션임을 짐작게 했다.
“이런, 얼음은 없네.”
원혁이 실망한 듯 말했다. 태유준은 LP판을 든 채 주방 쪽으로 다가갔다. 원혁이 막 냉장고 문을 닫고 있었다.
“안주 할 만한 건 없나요?”
태유준이 냉장고 문손잡이를 잡자, 원혁이 그의 손을 잡아챘다.
“안 열어 보는 게 좋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