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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없으면 이거 먹어. 이거 달고 맛있다.”
“이걸 왜 저를 주세요.”
“건빵 별로 맛없어하는 것 같길래. 이거라도 먹으라고.”
원혁은 태유준의 손바닥에 직접 별사탕을 부어 주기까지 했다.
“…정이 많으시네요. 건빵에 별사탕이 어떤 의미인데 이런 걸 다 주시고.”
“하하, 어떤 의미인데?”
“뭐긴요. 퍽퍽한 세상의 한 줄기 빛과 소금이죠.”
“그럼 얼른 먹어. 내가 신부님 좋아해서 주는 거니까.”
태유준의 목에 사레가 들렸다.
“내 사랑을 한꺼번에 많이 먹지 마.”
“그런 소리 좀 그만하세요.”
원혁은 자기 몫의 수돗물을 태유준에게 건넸다. 태유준은 대놓고 다정을 떠는 원혁의 태도가 부담스럽고 또 껄끄러웠다. 하지만 입 안에 든 별사탕은 달았고 물은 시원해 막힌 목을 촉촉하게 적셔 주었다.
종잡지를 못하겠다. 벽을 부술 때 보면 과격하고 충동적이고, 좀비를 죽일 때는 과감하고 잔인하다. 하지만 광화문에서 민머리를 혼내 주었을 때는 태유준의 말을 잘 듣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태유준의 손이 좋다며 머리 한번 만져 주면 뭐든지 다 해 주고, 이뤄 낸다. 그리고 이렇게 닭살 돋는 다정함을 지니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이 남자가 점점 친밀하게만 느껴져. 이 정체불명의 남자가, 아직은 경계해야 할 때 같은데 밀물이 해안을 적시듯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져만 간다.
태유준은 별사탕을 씹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원혁이라는 이 기묘한 파트너가 자신에게 주는 의미를, 감정을. 그러다 보니 어느덧 별사탕을 모조리 먹어 버렸다.
“헉. 죄송해요. 다 먹어 버렸어요.”
태유준이 빈 봉지를 보고 식겁해 말했다. 원혁은 기특하다며 태유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은 솔직히 말해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부드러웠다. 많이.
* * *
깊은 밤이 되자 벙커 대표는 원혁과 태유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한 명과 중년 남성 한 명을 불러 모았다.
“물 문제는 해결됐지만, 당장 내일부터 먹을 게 없어. 식량 사냥은 계속된다.”
대표의 말에 젊은 남자가 한숨을 푹 쉬었다. 중년의 표정도 썩 좋지 않았다. 당연한 소리지만 바깥에는 좀비 떼가 창궐해 있었고, 밖에 나간다는 건 곧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다.
“그럼 새로 들어온 사람도 있으니까 간단하게 오늘 할 일 설명하겠습니다.”
대표는 핸드폰 액정을 열어 지하상가의 조감도를 보여 주었다. 아까 창영이 보고 있던 것과 비슷해 태유준은 지도를 쉽게 눈에 익힐 수 있었다.
“보시다시피 이곳 벙커는 사면이 다 방화 셔터로 막혀 있습니다. 저희는 주로 북쪽 셔터를 열고 나가서 식량을 조달해 옵니다. 셔터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B기업 구내식당이었던 곳이 나오거든요.”
“아, B기업 본사가 여기죠.”
지금 사람들이 은신하고 있는 곳 위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 B사의 사옥이 위치해 있었다. 그들을 위한 구내식당 또한 규모가 클 것이 틀림없었다.
“맞습니다. 좀비들은 인간 음식에는 관심이 없어서 아직도 거기 냉장고에는 쓸 만한 냉동식품이 많아요. 통조림이나 간식 종류도 남아 있고요. 그래서 저희는 그걸 매일 밤 카트로 실어 나르고 있는 거죠.”
“음… 길이 위험한가요?”
태유준의 물음에 남자는 잠시 말을 고른 후 대답했다.
“북쪽 셔터는 항상 좀비가 들끓습니다. 밤에도 느려질 뿐이지, 최소 열댓 마리씩은 상주하고 있어요. 문이 열리자마자 셔터 여닫아 줄 한 명 제외하고는 모조리 싸움에 임해야 합니다.”
“그런 거라면 자신 있는데.”
원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원혁은 여전히 반말을 해 댔다. 대표도 그렇고 바로 옆에 그보다 스무 살은 많아 보이는 중년이 있어, 태유준은 등줄기에 진땀이 흘렀다.
“이 사람이 외국인이라 우리말에 서툴어요. 존댓말을 못 하니 이해 좀 해 주세요. 대신에 싸움을 잘합니다. 좀비 잘 잡아요.”
“아… 그렇군요. 싸움 잘하면 그만한 게 없죠.”
“출발은 언제인가요?”
“지금 바로 가려고 합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그럼 준비하죠.”
원혁과 태유준, 벙커 대표, 그리고 불안해 보이는 신제환이라는 20대 남자와 중년까지 총 다섯 명의 팀이 꾸려졌다. 팀은 일사불란하게 채비를 시작했다. 목장갑을 각각 끼고 각목이나 과도를 들었다. 그들은 원혁과 태유준이 꺼내는 돈가스 다지는 망치와 주방 가위, 중식 칼을 보고 신기해했다.
“좋은 무기네요.”
“좀비 목 따는 데 중식 칼만 게 없지. 하지만 일격을 가할 때는 돈가스 망치가 더 좋은 것 같기도 해.”
원혁이 들고 있으니 돈가스 망치는 무시무시한 흉기로 보였다. 다시 한번 각자의 무기를 점검한 다음에 다섯 명은 벙커를 나섰다.
“북쪽 셔터로 가려면 저리로 가야 합니다.”
벙커 대표가 길을 안내했다. 남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저 멀리서 새된 소리가 났다.
“제환아!”
삼삼오오 앉아 있던 무리 중에 한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사람들을 헤치고 달려와 신제환의 팔을 꼭 잡고 매달렸다.
“무사히 돌아와야 해.”
“유나야.”
“제발, 알았지?”
여자는 울먹이고 있었다.
“죽으면 안 돼. 제환아.”
“나 안 죽어. 약속해.”
유나라는 여자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태유준은 그간 이 벙커에서 일어났을 일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갔다가 살아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가야 합니다. 그만 놓으세요.”
벙커 대표가 신제환을 붙든 여자의 손을 떼 냈다. 그가 신제환에게 빠르게 움직이라고 부추기자, 신제환은 눈가가 빨개진 채로 앞을 보고 걸었다.
“제환아!”
“그만해요.”
“아이구, 적당히 해.”
중년 여자들이 일어나 유나라 불린 여자를 다시 무리 속으로 데리고 갔다. 태유준은 이 모든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가슴에 추를 매단 듯 암울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남매를 들인 대가로 밥값을 하러 가는 길. 안타까운 사연을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은 도보로 북쪽 셔터까지 이동했다. 중년이 셔터 여닫기를 담당하며 망을 보기로 하고, 태유준과 원혁 그리고 벙커 대표, 신제환이 방화 셔터 앞에 나란히 섰다.
“엽니다. 준비하세요.”
중년이 낮게 중얼거리며 스위치에 손을 가져다 댔다. 태유준은 가위를 쥔 손에 힘을 잔뜩 줬다. 창살 사이로 이미 좀비의 인영이 여럿 보였다. 아마 문 여는 소리가 나면 그에 자극을 받아 마구 덤벼들 것이다.
쿠구궁.
셔터가 쇳소리를 내며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던 좀비, 멀리 있던 좀비, 합쳐서 열 마리 정도가 고개를 뚜둑 돌렸다. 남자들의 긴장이 만들어 낸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셔터가 완전히 열렸다. 남자들은 각자 무기를 꽉 쥔 채 주춤거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 거침없이 걸어 나가는 자가 있었다. 원혁이었다.
휙! 그가 중식 칼을 휘둘러 가장 가까이 있던 좀비를 벴다. 정확하게 경동맥을 노리는 공격에 남자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끼에에!”
“끼엑!”
인간들이 나타났음을 알아챈 좀비들이 역겹게 울기 시작했다. 태유준은 과감하게 달려 나가 좀비에 맞서 싸웠다. 손에 쥔 가위로 좀비를 한 마리 해치우고, 연이어 그 바로 옆에 있던 좀비를 공격했다.
“꾸엑!”
“끼아!”
좀비들이 하나둘 나가떨어지자 벙커 남자들도 용기를 얻었는지 우다다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는 개싸움이었다. 이판사판으로 싸우며 남자들은 조금씩 전진했다.
원혁은 짐 카트를 밀어 좀비의 발을 으깼으며, 그러고도 모자란지 카트를 집어 들어 좀비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좀비는 찍소리도 못 내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러자 얼추 상황이 정리됐다. 신제환과 벙커 리더는 카트를 밀며 구내식당 쪽으로 미끄러지듯 달렸다. 원혁과 태유준이 그 뒤를 엄호하며 뛰었다.
* * *
그들이 들어간 곳은 B기업 본사 건물이었다. 조리실 안으로 먼저 들어간 벙커 대표와 신제환이 냉장고를 열었다.
“받아 주세요.”
원혁과 태유준은 각각 그들의 파트너가 되어서 식품을 받아 들었다. 훈제 닭가슴살, 과일 통조림, 초대형 참치 캔과 냉동만두 같은 것들이 대량으로 나왔다. 실온에 보관한 젤리와 과자도 상당히 많았다. 이 정도면 백 명 넘는 사람들이 조금씩 나눠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덕에 10분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카트 두 개를 꽉꽉 채울 수 있었다. 벙커 리더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서둘러 자리를 뜨자고 했다.
“나갈 때도 조심해요. 다 해치우고 오긴 했지만 새로운 놈이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
“알겠습니다.”
남자들은 2인 1조가 되어 카트를 밀고 끌었다. 태유준은 신제환과 한 조가 되었다.
다시 길을 되돌아갈 때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태유준은 숨을 죽이고 사방을 살피며 신중하게 걸었다. 이따금 천장도 쳐다보고 텅 비어 보이는 매장들도 잘 살폈다. 안경점이고 통신사고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것이 없었다.
길을 중간쯤 왔을 때였다. 신제환이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세웠다.
“왜 그러세요.”
“저, 편의점이요.”
그가 가리키는 곳에 스산하게 형광등 불만 깜빡이고 있는 편의점이 하나 보였다.
“편의점에는 물건이 남아 있지 않잖아. 알면서 왜.”
벙커 대표가 묻자, 신제환이 멋쩍게 대답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초콜릿 종류는 다 가져가지 않았었거든요. 아직 안에 초콜릿이 남아 있을 겁니다.”
“양이라고 해 봤자 얼마 안 될 텐데?”
“이번 기회에 가져올게요.”
“지금 시간이 없어.”
“저만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대표는 짧게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신제환은 화색을 띠며 후다닥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거리가 제법 되어, 가는 데 거의 1분이 소요되었다. 태유준은 그를 혼자 보내는 것이 불안해 마음이 쓰였다.
“안 따라가 봐도 될까요.”
“여기 있는 식량을 지키는 게 더 중요합니다.”
대표는 단호했다.
“그래도 한 명은 따라가 봐야….”
그때였다. 우당탕 무언가가 무너지고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