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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가 다른 방으로 건너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태유준은 전신에 피로감과 안도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온종일 이동하고, 좀비 떼와 싸우고, 또 벙커에 입성하는 과정도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니 벽에 등을 기대자마자 졸음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신부님, 졸려?”
“네. 좀.”
“그럼 편하게 누워서 자.”
원혁이 옷을 접어 태유준의 머리 뒤에 받쳐 주었다.
“고맙습….”
바닥에 누운 태유준은 대답을 하다 말고 까무룩 잠들었다. 그는 꿈도 꾸지 않고 깊이 잠들었다.
몇 시간이나 흘렀는지 모르게 시간이 흘렀고, 그때까지도 태유준은 곤히 자고 있었다. 그의 단잠을 깨운 것은 꽤나 큰 소음이었다. 여러 사람이 다투는 듯한 격앙된 목소리와 쿵 하는 소리가 태유준의 귀를 찔렀다.
뭐지.
태유준은 상체를 일으켜 눈을 비비며 상황을 확인했다. 가벽 경계선에서 문지기들과 중년 여성 한 명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분명히 식량을 가져다줬잖아. 그런데 왜 수도 사용이 안 된다는 거야!”
“오늘부터는 어제 두 배 갖다줘야 문 열어 준다고. 우리 진작 그쪽 대표한테 통보했다니까요, 아줌마. 왜 자꾸 같은 말을 하게 해요?”
문지기가 목을 꺾고 팔을 빙빙 휘둘렀다. 껄렁대다 못해 위협적인 행동에 중년 여성이 주춤댔다.
“물가가 오르듯이 우리 수도값도 오르는 건데 왜 이해를 못 해 주셔, 응?”
“씻게는 해 줘야 할 거 아니야! 약속했잖아!”
“그럼 대표한테 빨리 식량 바치라고 해. 아줌마 대표한테 가서 따질 이야기를 왜 나한테 퍼붓고 있어?”
두 사람의 언성이 높아짐에 따라 사람들이 하나둘 깨어났다. 태유준의 옆자리에 누워 있던 원혁과 또 인근에 누워 있던 남학생 한 명도 차례로 일어났다.
“대체 왜 이래. 식량이랑 물이랑 물물 교환 하고 있다면서.”
원혁이 혼잣말을 하자 대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이 고개를 돌려 작게 말했다.
“실은 저쪽이 말을 자꾸 바꿔요. 어느 날은 된다, 어느 날은 안 된다. 그러니까 저희가 미칠 노릇이죠.”
“자세히 말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가 여기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이라 사정을 잘 모릅니다.”
태유준이 남학생에게 묻자, 그는 상당히 지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저쪽에 화장실이랑 샤워실이 있어서 물 독차지하고 쓰는 건 아시죠? 저희 쪽에는 수도 질금질금 나오는 화장실 달랑 하나 있고요, 아무 물도 안 나오고 마실 물조차도 없어요. 아, 물론 셔터 너머에 대기업 본사 안으로 들어가면 그 건물에 딸린 화장실이랑 샤워실이 잘 갖춰져 있긴 해요. 그런데 어떻게 매번 화장실 가겠다고, 또 씻겠다고 셔터 너머로 일일이 나가겠어요. 바깥에 좀비가 우글거리는데 누가 목숨 걸고 화장실 가고 누가 망을 봐 줘요.”
“그러니 저쪽 하자는 대로 맞춰 주면서 지내 왔겠군요.”
남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람답게 지내지도 못하게 해 놓고 뻑하면 식량을 더 가져와라, 내일은 더 많이 가져와라 말이 바뀌니 미치겠어요.”
태유준은 할 말을 잃었다. 왜 어딜 가나 이 모양인가. 바깥의 괴물보다 더한 것이 벙커 안의 인간들이지 않은가 싶을 정도이다.
광화문에서 있었던 일들이 태유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곳은 피라미드의 정점에 선 자들이 자신들만의 체제를 만들어 지배하는 구조였다면 이곳은 팀 대 팀의 갈등이다. 하지만 그 본질이 이기심과 착취라는 점은 동일했다.
“사람답게 좀 살자!”
“불만 있으면 식량 가져오라니까!”
싸움이 난 장소에서 한순간 목소리가 확 커졌다. 문지기는 인상을 구겨진 신문지처럼 일그러뜨리며 두툼한 손을 휘두르려 들었다. 중년 여성이 점점 수세에 몰리며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가만두면 안 되겠습니다.”
“아, 그러게요. 저 미친놈 저러다가 사람 치겠어요.”
더 이상 사태를 보고 있기만은 힘들어서 태유준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만 있던 원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왜 그러십니까, 형제님.”
“나 씻으려고.”
“네?”
“저쪽만 물이 나온다며. 다녀올게.”
원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태유준은 가벽 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뒤꽁무니를 허둥지둥 쫓아갔다.
“지금 싸움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어떻게 지나가시려고요.”
“그냥 가면 되지.”
“형제님…! 위험합니다.”
태유준이 원혁의 셔츠 자락을 잡았으나, 원혁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문지기와 중년 여성 앞까지 다가갔다.
“넌 또 뭐야!”
문지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 물 좀 쓰려고.”
“하, 나 참. 지금 이 상황이 장난으로 보이냐?”
문지기는 두툼한 팔뚝을 과시하려는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덩치를 부풀리듯이 어깨를 들썩였다.
“장난 아니지.”
“그럼 눈치 챙기고 꺼져. 절대 이 너머로 못 넘어가.”
“못 넘어간다고?”
“당연하지. 내가 안 비켜 줄 거니까, 새끼야.”
“그럼 내가 알아서 할게, 새끼야.”
원혁은 그렇게 말하며 벽을 발로 찼다. 쾅! 굉음이 울려 퍼졌다.
“뭐… 뭐야! 미친놈이네 이거!”
문지기는 느닷없는 공격에 당황했는지 얼굴이 시뻘게져 악을 썼다. 그가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원혁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원혁은 민첩하게 그의 주먹을 피했고, 바로 문지기의 손목을 잡아 등 뒤로 포박했다.
“아악!”
“유연성 부족이네. 스트레칭 좀 할까?”
곧 우둑, 관절 나가는 소리가 났다. 문지기가 바닥에 쓰러지자, 좌중이 술렁였다.
“형제님…!”
“문이 생각보다 허접하네. 얇은데?”
원혁이 다시 한번 가벽 밑동을 걷어찼다. 그의 거센 발길질에 나무판자들은 금방 너덜너덜해졌다.
“뭐야. 벽을 부숴?”
“미… 미쳤어.”
소란에 일어난 사람들이 벽 근처로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쪽 사람도 저쪽 사람도, 어느 하나 원혁을 말리지 못했다. 지금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거나 만류했다가는 문지기와 비슷한 신세가 되리란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가벽이 엉망진창으로 무너지자,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높이가 낮아졌다. 원혁은 구두에 묻은 흙을 털더니 중년 여성을 빤히 쳐다봤다. 여성은 겁에 질린 얼굴로 부르르 떨었다.
이 미친 남자 뭐지? 이제 무슨 짓을 벌일까.
사람들의 시선이 빠듯하게 쏠렸다. 하지만 원혁은 호텔리어가 손님을 안내하듯 긴 팔을 우아하게 뻗으며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레이디 퍼스트.”
여성은 황당한 듯 눈을 끔뻑이다가 후다닥 가벽을 넘어 달려갔다. 원혁은 유유히 그 뒤를 따라 벽을 넘어갔다.
“우, 우리도 넘어갈까?”
“나 물 마시고 싶어.”
“난 물 잘 나오는 화장실 가고 싶어.”
“씻을래.”
사람들이 하나둘 눈치를 보다가 가벽을 넘기 시작했다. 태유준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 대단히 황당했으나, 속으로는 통쾌했다. 그 점은 뒤늦게 나타난 벙커 대표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들은 남아 있는 가벽의 잔해를 열심히 부쉈다. 그리고 서로를 얼싸안고 하이 파이브를 했다.
“이렇게나 간단하게 파괴될 벽이었네요.”
“네. 진작 이렇게 할 걸 그랬어요. 속이 다 시원하네요.”
태유준의 말에 옆에 서 있던 남학생이 동조했다.
곧 원혁이 샤워실에서 나왔다. 씻으러 간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머리가 젖어 있었다. 벙커 대표가 그에게 가 악수를 청했다.
“감사합니다.”
“감사받으려고 한 일은 아니고, 내 애인이 세수도 못 하고 꼬질꼬질하게 있는 게 싫어서 부순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
“애인… 세수요?”
“저기 있잖아.”
원혁이 먼발치에 서 있는 태유준을 가리키자, 벙커 리더는 놀란 기색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셨구나.”
“응. 그럼 이제 물 마음껏 써.”
원혁은 말을 더 이상 덧붙이지 않고 태유준에게 돌아왔다. 그러고는 다시 벌러덩 자리에 누웠다.
“잘하셨습니다. 감사해요.”
“고마우면 알지?”
원혁이 자기 이마를 가리켰다. 태유준은 피식 웃고서 원혁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원혁은 콧노래를 부르며 태유준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근데 신부님.”
“네?”
“어떻게 신부님은 이틀간 세수를 안 해도 이렇게 예뻐?”
“헉. 제가 이틀간이나 안 씻었나요.”
태유준은 창피함에 얼굴을 가리려 했지만, 원혁은 키득거리며 태유준의 손을 꽉 잡았다.
“세수 안 해도 예쁘니까 그냥 있어.”
“싫습니다. 저도 저기 샤워실 다녀올래요.”
태유준이 가방을 뒤져 세면도구를 꺼냈다. 그가 원혁을 두고 쌩하니 가 버리자, 원혁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진짜로 예쁜데 사람 말을 안 믿는단 말이지.
그나저나 신부님은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지긋지긋한 두통을 씻은 듯 낫게 해 줄 리가. 아, 귀여운 나만의 다안탁스.
원혁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편히 눈을 감았다.
* * *
가벽이 완벽하게 해체된 것은 아침 7시경의 일이었다. 태유준과 원혁은 두어 시간 더 자다가 일어나 배식을 받았다. 저쪽 양아치들에게 갖다 바치느라 정작 이쪽 먹을 것은 부족해 식단은 빈약했다. 건빵 한 봉지와 수돗물 한 컵씩이 전부였다.
꼭 군대에 다시 온 것 같네. 태유준은 속으로 살짝 투덜거리며 건빵 봉지를 뜯었다. 군에서의 기억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으므로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건빵을 한 입 먹는 순간 입대하고부터 제대 때까지 자신을 따라다녔던 온갖 희롱과 추근거림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의외로 주먹이 맵고 성격에 단호한 면이 강해서 망정이었지, 조금만 물러 터졌으면 험한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입맛이 뚝 떨어져 태유준은 건빵을 먹다 말았다. 그런데 눈앞에 불쑥 내밀어지는 것이 있었다. 별사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