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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적한 얼굴의 태유준에게 원혁이 물었다.
“장 박사랑은 양아들 비슷한 관계라 그랬지?”
“정확히 말하면 가톨릭식 대부님이십니다.”
“아. 그래?”
“네. 어려서 세례식 때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견진 성사 때도 제 대부를 서 주셨고요. 이후로 쭉 아버지처럼 모셨어요. 실제 양아버지보다 저를 더 잘 챙겨 주시기도 했고요.”
원혁은 한쪽 손에 턱을 괴고 태유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럼 양아버지는? 신부님한테 별로 잘 안 해 줬어?”
“직접적인 질문이시네요.”
“신부님에 대해서 많은 걸 알고 싶어서. 무례했다면 미안.”
“….”
태유준은 원혁에게 시시콜콜한 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사실 관계만을 간단하게 말하기로 했다.
“사정이 있어서 입양 관계는 정리했어요.”
“흐음.”
원혁은 팔짱을 끼며 못마땅한 제스처를 취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많이 힘들어하는 저를 장 박사님이 다독여 주셨죠. 장 박사님 연구실을 자주 찾아가게 된 것도 그때, 스무 살 즈음부터였고요.”
“연구실에 자주 찾아갔어?”
“네. 대기업이 맡긴 연구를 하느라 항상 바쁘셨지만 그래도 저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셨어요.”
“대기업이라면 어떤 회산데?”
“일융제약이요. 아시죠? 엄청 큰 회사니까.”
일융이라는 이름에 원혁이 흠칫했다. 태유준이 눈치챌 만큼은 아니었으나,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장 박사가 일융 측 연구를 맡았었어?”
“네. 제가 알기로는 그래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아니야. 아무것도.”
원혁은 적당히 말을 잘랐다.
“그냥, 장 박사는 사기업 연구는 안 하고 학계의 난제만 연구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놀라서 물어본 것뿐이야.”
“아. 기본적으로는 외주 건을 많이 맡으시긴 했어요. 보통 연구소 같은 곳에서 어려운 문제를 맡기면 박사님이 해결책을 찾아서 대답해 주는 방식으로 연구소를 운영하셨죠.”
“맞아. 그런데 항상 공공 기관이나 대학 연구소 의뢰만 받았던 걸로 알거든. 일융제약이라, 새삼스럽네.”
태유준은 장 박사 이야기에 심각해진 원혁을 살폈다.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대답한다고 알려 줄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나저나 한숨 잘 잤으니 이제 밤을 준비해 볼까?”
기대도 안 했지만, 원혁이 먼저 말을 돌렸다. 태유준은 항상 깊게 캐물어 오던 원혁치고는 의외라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두 사람은 김은진의 방에 있던 과자를 챙기고 주방에서 생수를 몇 병 꺼내 왔다. 그리고 만약을 대비해서 구하기 어려운 물건들을 찾아 가져가기로 했다.
원혁은 요령껏 집 안을 뒤져 담요 몇 장, 깨끗한 수건, 구급상자 등을 찾아냈다. 그리고 멀끔한 정장 차림으로 현관에 등장했다.
“옷은 대체 언제 빨고 말리셨어요?”
“세탁기에 건조 기능이 있길래 가볍게 건조한 다음에 선풍기 틀어서 말렸지. 그러니까 옷감 안 상하고 마르던데? 물론 다림질도 했어.”
“딱 봐도 무지하게 비싸 보이는데, 고급 정장에 물빨래라….”
“살다 보면 타협해야 할 부분도 있는 거야.”
패션에 굉장히 신경 쓰네. 나도 아까 수단 빨아 입었으니까 도긴개긴이지만.
“설마 셔츠나 넥타이를 여벌로 챙기시진 않았겠죠.”
“오빠 방에 꽤 괜찮은 것들이 있길래 몇 개 빌렸어.”
“갚지 않으실 거잖아요.”
“우리가 지금까지 김은진한테 베푼 걸 생각해. 그리고 갚으라고 청구서 내밀 사람도 아니고.”
“그건 그렇지만….”
“자, 얼른 나서자고.”
원혁이 태유준의 등을 떠밀었다. 태유준은 현관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밖으로 나섰다.
김은진의 집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어둠이 내린 골목을 조심스럽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트럭에 올라타서 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 용산에서 이들이 목표로 하는 원효 대교까지는 멀지 않았다. 도중에 장애물만 만나지 않는다면 오늘 밤 안으로 다리를 건너, 여의도 방향으로 쭉쭉 나아갈 수 있을 듯했다.
한참 차를 타고 가다 보니 원효 대교 방면임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왔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다리를 건널 수 있다. 여의도에 가면 지하도로 통행할 수 있으니 머지않아 장 박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태유준은 지난번 통화했을 때 들은 퍽 하는 소리, 알 수 없는 외국어와 갑자기 끊어진 장 박사의 전화에 대해 떠올렸다. 또다시 불길함과 초조함이 그를 찾아왔다.
생각에 잠긴 그에게 원혁이 말을 걸었다.
“길 좀 봐 줘. 여기서 몇 차선으로 들어가야 돼? 길이 헷갈리게 생겨 먹었네.”
태유준은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차창 밖으로 거리를 내다봤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멈춰요!”
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 끼이익. 빈 도로에 브레이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왜 그래.”
“저, 저기…! 길 건너!”
태유준이 왼쪽 인도를 가리켰다. 약간 떨어진 곳에서 한 남자가 좀비 떼에게 몰리고 있었다.
“사람이에요. 살아 있는 인간!”
“젠장. 진짜네.”
사태 이후로 길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남자는 눈도 코도 입도 다 멀쩡했고, 팔다리도 꺾여 있지 않았다. 그리고 벌벌 떨며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는 좀비 떼의 속도는 느릿느릿했지만, 수가 워낙 많았다.
“안 되겠어요. 구해 줘야겠습니다.”
“무슨 수로?”
태유준은 잠시 지켜보며 고민했다. 다가가서 육탄전을 벌이기에는 좀비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좀비 떼의 주의를 이쪽으로 끈다면 어떨까요?”
“뭐?”
“그사이에 남자를 도망치게 해 줄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뒤쪽으로 좀비들을 유인할게요. 그동안에 저 남자를 도망치게 해 주면 될 것 같습니다.”
“차 밖으로 나가겠단 거잖아. 그건 너무 위험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 인간이 무참히 희생되는 꼴을 가만두고 볼 수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이목만 끌고 바로 차에 올라탈게요. 좀비 떼와 거리가 있으니 충분히 해낼 수 있어요. 부탁드립니다.”
태유준은 빠르게 차에서 내려 남자 쪽으로 뛰어갔다. 좀비들은 죄다 남자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므로 태유준으로서는 놈들의 신경을 잡아 끌 만한 도구가 필요했다.
태유준은 길에 방치돼 있는 재활용 쓰레기 수거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로 걷어찼다. 캉, 캉.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하지만 좀비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계속해 남자만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더 시끄러워야 하나. 태유준은 있는 힘껏 쓰레기통을 밀었다. 그러자 와장창, 소리와 함께 아스팔트 바닥에 깡통이 쏟아져 나왔다.
좀비 떼 중 몇 마리가 움찔하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됐다. 이쪽으로 와라!
태유준은 더 요란한 소리를 내기 위해 캔을 힘껏 밟았다. 캔 찌그러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좀비들이 한 마리씩 뒤돌아 태유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좀비 떼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 태유준은 그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여유를 두고 달렸다. 좀비 떼들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태유준의 뒤를 쫓았다.
그사이에 원혁은 차에서 내려 남자에게 달려갔다.
“당신, 괜찮아?”
“헉…헉. 고맙, 고맙습니다.”
원혁은 남자를 일으켜 세워서 상태를 확인했다. 남자는 깡마른 체구에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평범한 인상이었다. 원혁이 살펴보니 얼굴에도 몸에도 별다른 부상이 없는 듯했다.
“흐…흑. 살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남자가 품 안의 물건을 꽉 끌어안으며 울먹였다.
“시간 없어. 저쪽으로 가서 트럭 짐칸에 올라타. 소리 내지 말고.”
“네.”
남자는 서둘러 트럭 쪽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을 확인한 원혁은 급하게 태유준을 찾았다. 태유준은 좀비 떼를 성공적으로 유인하고 있었으나, 계속 달리기만 하는 상황이라 되레 빠져나오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제길.”
원혁은 머리를 굴리며 트럭으로 향했다. 그리고 운전석 옆을 굴러다니던 확성기를 집어 들고 짐칸에 휙 올라탔다.
깡마른 남자가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따로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원혁은 똑바로 서서 확성기에 대고 쩌렁쩌렁 소리쳤다.
“고구마 사세요, 맛 좋은 호박고구마.”
원혁의 우렁찬 목소리가 길바닥에 울려 퍼졌다. 태유준이 달리는 발소리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볼륨이었다.
그 소리에 좀비 떼들은 이번에는 방향을 틀어 트럭을 향해 비척비척 다가오기 시작했다. 좀비들의 추격으로부터 벗어난 태유준은 이때다 싶어 발소리를 죽이며 트럭으로 달렸다.
꾸엑, 끼에엑!
태유준이 조금 더 앞서 나가긴 했으나 어쨌든 뒤에서 좀비들이 팔을 휘저으며 달려들고 있었다.
간격이 너무 좁아 이러다가는 원혁이 붙잡힐까 싶을 정도였다. 태유준은 급한 대로 손을 내밀었다. 원혁이 조수석 문을 열고 그에게 힘껏 팔을 뻗었다. 탁. 두 사람의 손이 맞물렸다. 원혁은 있는 힘껏 태유준의 손을 끌어당겼다.
“일단 타!”
태유준이 발돋움을 하며 날듯이 차에 올라탔다. 그가 의자에 앉음과 동시에 좀비 한 마리가 트럭 안에 손을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태유준은 가차 없이 문을 닫았다.
“꾸에엑!”
손이 낀 좀비가 악을 질렀다. 태유준은 눈을 질끈 감고 문을 다시 열었다가 확실하게 차 문을 닫았다. 좀비가 나가떨어졌다.
“꽉 잡아!”
원혁이 풀 액셀을 밟았다. 트럭은 빠른 속도로 후진하는가 싶더니, 방향을 확 틀어 드리프트했다. 순간 태유준을 포함해 차 안의 모든 것이 무게 중심을 잃으며 옆으로 쏠렸다.
“형제님!”
“전직 카레이서만 믿어.”
그러더니 원혁은 차를 지그재그로 흔들며 달리기 시작했다. 가공할 스피드에 태유준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정신 사납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