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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매는 차가운 편이었고 입술은 유난히 색이 엷었으며, 전체적으로 창백한 얼굴에는 표정이 감돌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우울하고 싸늘한 인상 아닌가. 야한 얼굴은 무슨.
원혁의 말을 인정할 수 없었다. 태유준은 고개를 저으며 거울을 박박 문질러 닦았다.
욕실 바깥으로 나오자 여전히 조명은 끈 상태였지만 자연스럽게 바깥 햇빛이 들어와 어느 정도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다. 원혁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커튼을 쳤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좋을 건 없으니까 커튼 치고 있자. 한 시간에 한 번 정도 커튼 틈새로 바깥 동향 살피면 될 것 같아.”
“좋습니다.”
정원 쪽으로 크게 난 창의 커튼을 친 다음 원혁이 뒤를 돌았다. 눈길이 목덜미와 쇄골 쪽에 길게 머물렀다.
“뭐… 뭡니까, 또.”
“음. 100점.”
“예?”
태유준은 고개를 숙여 자신이 입고 있는 헐렁한 티셔츠를 살폈다. 별로 비싼 브랜드도 아니어 보였고, 무늬나 로고도 요란하지 않아 멋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뭐가 100점이라는 겁니까.”
“내 스타일이야.”
“네?”
어리둥절한 태유준을 놔두고 원혁은 욕실로 들어갔다.
위험해. 위험한 놈이다.
태유준은 욕실 문을 노려보고, 옷을 꺼내 온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퀸 사이즈의 침대에는 폭신해 보이는 이불까지 깔려 있었다. 편안해 보이는 잠자리가 간밤 체력을 소진한 태유준을 유혹했다. 그는 침대에 누운 다음 천장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랜만에 집다운 집, 침대다운 침대에서 쉬자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어쨌거나 김은진은 아직 벙커에 머무르고 있으며 그녀의 가족들은 신용산역 벙커로 떠났다지만 가는 길에 아무 일도 없었으리란 보장은 없다.
또한 이 빌라 바로 앞 골목에는 좀비 떼가 가득할 것이고 아침인 지금은 아주 활발히 움직이는 중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10분 넘게 자리만 뒤척이고 있을 때, 문밖에서 원혁의 목소리가 났다.
“신부님, 나 다 씻고 왔어.”
“네?”
“들어간다.”
“아니, 여길 왜 들어와요.”
문을 벌컥 열고 원혁이 들어왔다. 태유준은 어이가 없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같이 자야지. 무섭잖아.”
“같이 자요? 여기 방도 많은데 왜 불편하게 한 침대에서 잡니까.”
“좀비 나타나면 신부님이 나 지켜 줘야지. 그러니까 같이 자자.”
원혁은 가련한 척 눈썹을 늘어뜨리며 순식간에 침대까지 다가왔다. 태유준은 주춤하며 침대 코너로 몰렸다. 그 틈에 원혁은 잽싸게 이불을 걷고 침대에 쏙 들어왔다.
커다란 덩치가 옆자리에 눕자 태유준은 식겁하며 그를 밀어 냈지만, 몸이 돌덩이 같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 좋다.”
옆에서 낑낑대며 자신을 밀어 내는 태유준을 모르는 척하며, 원혁은 베개까지 찾아다 벴다.
“저기요. 그 베개 제가 베던 건데. 저는 맨바닥에 머리 대고 자라고요?”
“아니지. 내가 그렇게 치사한 인간은 아니야.”
“그러면요?”
“이렇게 하면 되지.”
대뜸 굵직한 팔뚝이 뻗어 나온다 싶더니 태유준의 머리 밑으로 들어왔다. 설마 팔베개? 원혁은 기가 찬 태유준 쪽으로 돌아눕기까지 했다. 애인이 따로 없는 자세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지난번에 벙커에서도 무릎에 눕질 않나 지금도 팔베개를 해 주질 않나… 왜 이렇게 저한테 치근덕거리시죠.”
“벙커에서는 사이좋게 모포 깔고 자질 않나 어깨에 기대어 주무시질 않나… 왜 이렇게 저를 설레게 한 다음, 태도가 돌변하시는 거죠.”
“제 말투 흉내 내지 마세요.”
태유준이 도끼눈을 떴다. 원혁은 피식피식 웃으며 나머지 한 팔로 태유준을 끌어안았다.
“끌어안지 좀 마세요!”
“신부님한테 나는 냄새가 너무 좋아.”
“그냥 비누 냄새예요.”
“그게 좋다는 거야.”
팔이 무슨 쇠사슬처럼 단단해 풀어낼 수가 없었다. 가슴을 밀어 내 봐도 바윗덩어리를 미는 것과 다를 게 없어, 태유준은 몇 번 몸을 뒤척이다가 이내 포기 모드로 돌아섰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야하니까 한숨 쉬지 마.”
“제 마음대로 한숨도 못 쉽니까? 그리고 제가 뭐가 야해요.”
“내 목덜미에 신부님 숨결이 닿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원혁은 은근슬쩍 태유준의 다리와 제 다리를 얽었다. 단단한 다리가 다소 무거웠으나, 묘하게 안정감을 줬다. 태유준은 다리를 빼내려다가 그냥 두기로 했다. 단단한 몸에 갇혀서 갑갑했던 것도 잠시, 점점 편안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아, 졸려. 태유준의 호흡이 조금씩 느릿하고 규칙적으로 바뀌어 나갔다. 눈꺼풀도 추를 매단 듯 게으르게 깜빡였다.
“신부님, 자. 졸릴 거잖아.”
“…바깥에… 좀비… 안심하고 자면 안 되는데….”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자.”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면서 시야가 흐릿해져 갔다. 태유준은 이내 원혁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그리고 흐릿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벌써 한 달 가까이를 원혁과 같이 보낸 태유준은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저렇게 늘어져 있는 것 보여도 사실 바짝 날을 세우고 있는 상태일 것이다.
만약에 좀비가 이 근처에 얼쩡거리더라도 원혁이 망을 서고 있는 한 문제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꼴같잖네, 태유준.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이 남자를 믿고 잠을 청하려고 해? 꼭 든든해하는 것 같잖아. 틈만 나면 질 낮은 농담에 집적거리기 바쁜 인간을.
“신부님, 안 자?”
“잡니다.”
“좋은 꿈 꿔. 내 꿈 꾸면 더 좋고.”
“….”
그래도 신기한 건 항상 이 남자 옆에 있으면 잠이 잘 온다는 사실이었다. 바깥에 악몽 같은 세상이 도사리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태유준은 눈을 감았다.
그렇게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었다 일어났다. 원혁은 옆자리에 없었다. 거실로 나가 커튼 틈새로 바깥을 살펴보니 멀찍이 가로수와 전신주에 좀비 몇 마리가 매달려 있는 것 외에 특이사항은 없었다.
딱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태유준은 거실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네 식구 수에 알맞은 규모였다.
지금은 여기 없는 가족들의 일상을 상상해 보았다. 이 자리에서 가족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웃고, 시간을 보냈으리라.
소파와 테이블을 살피던 태유준의 눈에 가족사진이 들어왔다.
프레임 안에는 중년의 부부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 그리고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김은진이 담겨 있었다.
자세히 보니 ‘한국대학교 졸업식’이라 적힌 현수막이 그들의 머리 위에 걸려 있었으며, 김은진은 학사모를 쓰고 꽃다발을 한 아름 안은 채였다. 지금 대학원생이라고 했으니 이 사진은 대학교 졸업식에서 찍은 사진 같았다.
이때는 반짝반짝 빛이 났네.
태유준은 야위고 피부가 거친 김은진이 아닌, 티 하나 없이 해맑은 인상의 김은진을 한참 쳐다봤다. 아는 사람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현수막에 인쇄된 행사 날짜가 불과 1년 전이라는 점도 기분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좀비 사태가 터지지 않았더라면 은진 씨는 계속해 이런 모습으로 살아갔겠지. 가족들과 함께 밝고 행복하게.
“집주인들이네.”
언제 나왔는지, 원혁이 태유준의 옆자리에 앉으며 사진을 가리켰다.
“네. 은진 씨와 가족들 사진이에요. 한때는 여기서 잘 살았겠죠.”
태유준이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작게 말했다.
“신부님. 울적해?”
“네. 조금요.”
사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태유준을 보던 원혁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까만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그가 입을 열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고, 남을 물고 죽이고 하니까 무섭지?”
“…그렇죠.”
“나도 이런 사태는 처음이야. 누구든 이 일이 처음이겠지만, 하여튼 나도 막막해.”
“…형제님도 막막함을 압니까?”
태유준이 고개를 돌려 원혁을 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당연하지. 말했잖아. 우리 엄마가 나라는 혹을 달고 부잣집에 시집가서 엄청나게 괴롭힘당했다고. 내가 그때 박힌 돌 같은 형제들한테 제대로 미움을 받았거든. 진짜로 죽을 뻔도 했어.”
목소리는 덤덤했으나 그 안에 담긴 고생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놈들 때문에 눈 오는 날 신발 없이 걷기도 해 봤고, 낯선 지역에 그것도 길가에 버림받기도 해 봤어. 절벽에서 떨어지기도 했고. 최악의 경험이었지.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이 더 답이 안 보여.”
“왜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해결책이 없으니까.”
“해결책….”
“그때는 어떻게든 집으로, 양아버지와 어머니 곁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됐거든. 지나가는 어른의 도움을 받든 경찰서를 찾아가든. 그런데 이 좀비 사태는 그렇지 않아. 그저 하루하루 살아남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거지. 언제 이 생존 게임이 끝날지 그것조차 아무도 모르잖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일상. 원혁의 말이 맞았다. 태유준은 잠자코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자신도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이 시절이 어서 끝났으면 좋겠어요. 저랑 장 박사님이 살아남는 거. 그거면 만족스러운 결말이 될 것 같아요.”
전에는 몰랐다.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 또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것이었는지.
장 박사와 일상을 이야기하고, 아무 아픈 곳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정식 사제의 꿈을 꾸는 것. 그저 기도에 하루를 바칠 수 있는 날이 다시 돌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