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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에 따르면 저 집이네. 서둘러야겠는데.”
도로변에 널브러져 있던 좀비들이 어스름한 새벽녘 햇살에 움찔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가로수에 매달려서 밤을 보낸 좀비들도 하나둘씩 움직임을 보였다.
두 사람도 바쁘게 주소를 훑었다. 태유준은 희미한 햇빛에 의지해서 담벼락에 붙은 주소를 읽었다.
“37번길 1! 여기네요.”
태유준이 빠르게 빌라 건물을 찾아냈다. 다행히도 김은진의 집 앞에는 좀비가 없었기에 그들은 빌라의 공동 현관 비밀번호를 찍고 문을 열었다. 건물은 자동 잠금장치가 잘 작동하고 있었는지 아주 조용했고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101호예요.”
태유준은 조심히 걸어 101호 앞에 섰다. 문을 두드려 보았으나 인기척은 전혀 없었다.
“문 열게요.”
태유준이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현관문이 열렸다.
“누구 안 계십니까. 김은진 씨 친구입니다.”
“…아무도 없나 본데?”
“그러게 말입니다. 조금 살펴볼까요.”
두 사람은 집 안 곳곳을 수색했으나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평범한 가정집답게 TV와 소파가 놓인 응접실이 먼저 보였고, 좌측으로는 주방과 냉장고가 자리 잡고 있었다. 태유준이 가까이 다가가서 열어 보니 냉장고는 아직도 전원이 멀쩡하게 들어온 상태였다.
냉장고의 주홍색 불빛이 꼭 사람의 온기 같아서 태유준은 먹먹해졌다. 분명 냉기가 흐르는 기계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부패한 반찬과 시금털털한 김치 냄새, 시든 채소들에서 사람 냄새가 묻어나는 것만 같았다. 겨우 한 달 되었을 뿐인데 좀비가 나타나기 전의 시대가 머나먼 예전처럼 느껴져 태유준은 입맛이 썼다.
그러다가 그는 정신을 차렸다. 냉장고 옆에 놓인 전자레인지에 작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은진아. 연락이 안 되어서 쪽지 남기고 간다. 우리 모두 난리 통에 핸드폰을 잃어버렸단다. 네가 돌아올까 싶어 집에서 버텼지만 안전상의 문제도 있고 한계가 있구나. 우리는 신용산역에 있는 벙커로 갈 거야. 모든 일이 끝나면 꼭 다시 만나자. -엄마, 아빠, 오빠가.]
“메모가 있어요.”
“정말이네. 가족들이 남기고 갔군.”
“어서 이 소식을 전해 줘야겠어요.”
쪽지를 읽은 태유준은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나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왜 그래?”
“핸드폰이 또 먹통이에요.”
“또?”
“며칠 전에도 단체로 이러더니… 점점 먹통이 잦아지네요.”
태유준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다시 통신이 재개되면 김은진에게 이 내용을 알릴 생각이었다. 일단 쪽지를 사진으로 찍고 원본은 제자리에 붙여 두었다. 피곤함과 허탈함이 밀려와서 그는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았다.
“배고파?”
“예?”
“힘이 없어서 앉은 것 아니었어?”
“아… 그건 아닙니다. 그냥 조금 맥이 빠져서.”
“음….”
원혁이 태유준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마디를 건넸다.
“우리 밥 먹을래, 신부님?”
“밥 먹자고요?”
“차려 먹자. 요리는 내가 할게.”
그렇게 말하더니 원혁은 전기밥솥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마치 광고 모델이라도 되는 양, 어느새 한 손에는 밥주걱까지 쥐고서.
* * *
밀폐 용기에 보관되어 있던 쌀을 찾아 밥을 지었다. 반찬은 다 쉬어 먹을 수가 없었으므로 곁들일 것을 찾아야 했는데 때마침 추석 선물 세트가 하나 보였다. 열어 보니 참치와 통조림 햄이 잘 보관되어 있었다. 심지어 유통 기한이 넉넉하게 남은 김 세트도 나왔다.
원혁은 이 주방이 마치 자기 것이라도 되는 양 능숙하게 요리를 했다. 찬장을 뒤져 나온 파스타 소스를 가지고 케첩을 대체할 양념을 만들기도 했다.
“다 차렸다. 신부님.”
어두운 주방 구석, 남의 식탁 위에 플래시를 두 개 올려 불을 밝혔다. 쌀밥을 두 공기 푸고 수저를 놓은 다음 한 숟가락을 뜨려니 태유준은 기분이 영 어색했다.
“정말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이런 밥은요.”
“나도야.”
태유준이 먼저 밥을 먹었다. 따끈따끈했고 적당하게 조리돼 맛이 좋았다. 벙커에서는 늘 찬밥만 먹었기에 간만에 먹는 뜨거운 쌀밥이 놀라울 정도로 맛있게 느껴졌다.
“진짜 맛있네요.”
“내 요리 실력 괜찮지?”
“네. 정말요. 진짜 맛있습니다. 감사해요.”
감탄을 연발하는 태유준을 보며 원혁이 피식 웃었다. 그가 손을 뻗어 태유준의 입가에 묻은 김 가루를 떼어 주었다. 태유준이 흠칫거리며 몸을 뒤로 물리자 원혁은 머쓱해진 손을 거둬 턱을 긁었다.
“그나저나 신부님, 우리 둘이 오붓하게 있는 김에 이야기나 좀 할까?”
“네?”
“지난번에 좀비한테 쫓겨서 토익 학원에서 잘 때는 불침번 서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은 배도 부르고 비교적 안전하기도 하니까. 이야기나 좀 해 보자.”
원혁이 기지개를 켜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배가 부르고 몸이 따뜻해지며 긴장이 풀렸기에 태유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좋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대로 이야기 나눈 적이 없네요. 무슨 이야기 할까요?”
태유준이 묻자마자 원혁이 손에 턱을 괴며 물었다.
“이상형이 어떻게 돼?”
“이상형이라니요. 왜 그런 걸 물으세요.”
태유준은 뜬금없는 질문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못 물을 이유는 뭔데.”
“이런 상황에서 왜 그런….”
“이상형이 대체 어떻길래 대답을 못 해.”
꿀꺽. 물을 삼키며 태유준이 도리질했다.
“딱히 정해진 이상형은 없습니다. 저는 어차피 연애나 결혼을 할 수 없는 몸이니 아름다운 분이 계셔도 관심 가져 본 적이 없고요.”
“그래? 그럼 다음 질문. 음… 어쩌다가 신부님이 되기로 결심했어?”
기이한 초능력 때문에 파양당한 뒤, 돌아올 곳이 수도원뿐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에 의지했다는 말. 내 아픔을 치료하며 기도하다 보니 신부를 꿈꾸게 되었다는 말을 들려주기에는 뭐랄까. 사연이 믿기도 힘들뿐더러 너무 구구절절했다. 태유준은 적당히 말을 꾸며 내기로 했다.
“그게… 어려서부터 그쪽으로 진로가 결정돼 있었습니다.”
최대한 덤덤하게 말했다.
“흔들린 적 없어? 속세의 삶이 더 재미있는 건 알 거 아니야.”
“없습니다.”
이것도 거짓말이었다. 태유준이 지금껏 걸어온 신앙의 길은 의심과 흔들림의 길이었다. 적어도 초능력이 발현해 양부모의 미움과 두려움을 사면서부터는 신을 많이 원망했다.
정말로 신은 나의 편이실까. 날 사랑하고 아끼실까. 그렇다면 왜, 나에게 이상한 초능력을 주셨던 것일까. 무엇에 쓰라고…도대체.
“진짜로 안 흔들렸다고?”
태유준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자 원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대답하기 싫으면 말고. 그냥 궁금했어. 저렇게 생긴 사람이 사제 해도 되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제가 어떻게 생겼는데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태유준이 고개를 들어 원혁을 빤히 봤다. 어둠 속이었지만 플래시가 원혁의 오른쪽 얼굴을 비추고 있어 날카로운 눈매나 그 아래 찢어진 흉터가 잘 보였다. 거칠고 야만적인 눈가에는 희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몰라서 물어?”
태유준은 손으로 제 뺨을 쓸며 눈을 끔뻑거렸다.
“제가 어디가 어때서요.”
“신부님 야하게 생겼잖아.”
“제, 제가요?”
너무 당황스러워 태유준은 숟가락을 놓쳤다. 원혁은 손에 얼굴을 괸 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어. 그것도 엄청나게.”
“그…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봅니다.”
“다들 속으로 그 생각 하는데, 당신 직업 때문에 말 못 한 거야.”
“설마 그럴 리가요.”
민망함과 망측함에 태유준은 고개를 내저었다. 원혁은 그 반응이 재미있는지 쿡쿡 웃었다.
“거울도 안 보고 사나 봐.”
“아니… 아닙니다. 전 그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더 이상 괴상한 소리를 듣고 있기가 힘들어진 태유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밥도 다 먹어서 설거지를 해야 했다.
그릇을 바삐 싱크대로 옮기려는데 원혁이 다가와 태유준을 뒤에서 껴안듯 팔을 둘렀다. 누가 보면 다정한 연인이 무드를 잡는 듯한 동작이었다.
“포즈가 왜 이렇습니까. 저 나갈게요. 비켜 주세요.”
“같이 먹었으니까 설거지도 같이 해야지.”
“이 포즈로는 싫습니다.”
태유준이 정색하며 원혁의 팔뚝을 소리 나게 때렸다.
“아! 아파.”
원혁이 엄살을 부리며 팔을 치워 주었다. 태유준은 속으로 참을 인을 새기며 식탁 위의 김 봉지를 치웠다.
* * *
원혁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태유준은 작은방에 들어가 안을 살폈다. 아마도 김은진의 오빠 방으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젊은 남자 취향으로 꾸며진 공간이었다. 벽에 붙은 스포츠 선수들의 사진과 값비싸 보이는 컴퓨터와 주변 기기가 눈에 띄었다.
오빠가 덩치가 큰 편이었는지 옷장에서 큰 옷이 몇 벌 나왔다. 태유준은 넉넉한 사이즈의 티셔츠와 바지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남의 욕실이라 쓰기 미안했지만, 이 망한 세상에서 쌀과 반찬까지 훔쳐 먹었는데 옷가지와 비누를 못 빌릴 건 뭔가 싶었다.
“후….”
욕실 장을 열어 보자 뜯지 않은 비누와 샴푸, 새 칫솔과 치약이 여러 개 나왔다. 태유준은 그것들을 꺼내어 몸을 씻기 시작했다.
간만에 제대로 된 샤워를 마치고 태유준은 수건으로 머리를 털었다. 거울 속에는 물기 젖은 자신이 비쳤다.
“…으음.”
야하게 생긴 얼굴이라니. 태유준은 짐짓 진지하게 거울을 보며 객관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평가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