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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유준은 작은 방 구석에 놓인 배낭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기본적으로 필요한 짐인 묵주와 성경책, 식량과 물 정도만 챙기면 될 것이었다.
그러고는 옷을 갈아입었다. 태유준이 검은 수단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세수를 마치는 동안 원혁은 원혁대로 무시무시한 물건으로 배낭을 챙겼다. 주로 식자재 마트에서 털어 온 요리 도구로 구성된 무기였다.
만약을 대비해서 식량을 나흘 치 정도 챙기고 문을 나서려는데, 뒤를 따르는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형아.”
고개를 돌려보니 할머니와 함께 왔던 남자아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이는 평소처럼 한 손에 장난감 칼을 들고 있었는데, 눈에는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지금 뭐 해?”
태유준은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아이에게 지금 우리가 벙커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한다면 밖에 나갈 일만 기다리고 있는 아이에게 충격을 줄 수 있었다.
“…형아 나가?”
아이가 악의 없이 물었다. 순수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질문임을 알았으나 태유준의 가슴속에는 죄책감이 피어났다. 마치 여리고 약한 자들을 놓고 저 홀로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그게….”
“신부님. 여기 계속 머물러 봤자 이도 저도 아니게 돼. 우리 목적을 잊지 마.”
짐을 다 꾸린 원혁이 배낭을 메며 태유준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유례없이 진지했다.
태유준 역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수도원을 뛰쳐나와 이처럼 험한 길에 오른 것은 어디까지나 여의도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일면식도 없는 저 남자와 동행을 결심한 것이었고.
“같잖은 동정심이라면 집어치워. 우리가 여기 사람들 그간 먹여 살린 걸로 천국 갈 포인트는 다 쌓았으니까.”
“…맞습니다.”
태유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다만, 떠나기 전 마지막 기도를 짧게 바치고 싶었다.
주여. 언젠가 이들이 이 어둠을 탈출하게 해 주시옵소서.
* * *
떠날 때가 됐다. 원혁과 태유준은 함께 식량을 공수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주의 사항을 알려 줬다. 그들은 원혁과 태유준이 없는데 자신들끼리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고 약한 소리를 했다. 우는 사람도 있었다. 울며불며 난리가 난 통에 원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열쇠를 하나 꺼냈다.
“이게 뭐죠?”
태유준이 원혁에게 묻자, 원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만능 키. 내가 딱 두 개 가지고 있는데 하나를 여기 사람들한테 주고 가려고.”
“만능 키요?”
“내가 거금 들여서 특별히 딱 두 개 만들어 놨던 건데, 천국 가려고 여기 놓고 간다.”
원혁의 말은 농담이 아닌 듯, 열쇠는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재질로 마감돼 있었으며 톱니 모양은 어디서도 본 적 없이 독특했다. 원혁은 칭찬을 바라는 듯 태유준에게 머리를 들이댔다.
“칭찬 안 해 줘?”
“아, 네. 잘…하셨어요. 천국… 가실 것 같습니다.”
“신부님이 그렇게 말해 주니까 기분 좋네. 자, 받아.”
원혁이 김은진에게 열쇠를 건넸다.
“이걸로 어떤 차든지 문을 딸 수 있으니까 적당한 트럭 훔쳐 타. 나 지금 엄청 착한 일 한 거다. 알지? 다들 나 좀 잘 봐. 내가 여러분 먹여 살렸으니까 나중에 마주치면 꼭 은혜 갚으라고.”
원혁은 뻔뻔하게 인사했으며, 태유준은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하며 손을 잡아 주었다. 특히 김은진과의 인사는 길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은진 씨.”
“신부님. 제가 꼭 기도할게요.”
“고마워요.”
“그런데… 부탁이 한 가지 있어요.”
“뭔데요?”
“혹시… 언제라도 용산을 지나가게 되면요. 저희 집에 한번 들러 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 말도 안 되는 부탁인 거 아는데….”
김은진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가족들이 무사한지 확인하고 싶어요.”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태유준은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목적지가 뚜렷해서 굳은 약속은 못 드려요. 하지만 언제라도 용산을 지나게 되면 꼭 들를게요. 저한테 지도도 주셨는데 그 정도를 못 해 줄까요.”
“고맙… 고맙습니다, 신부님. 제가 집 비밀번호랑 말씀드릴게요. 혹시 가족들 만나면 저 잘 지낸다고 꼭 좀 전해 주세요.”
“알겠어요. 울지 말아요.”
태유준이 그녀를 달래고 문의 손잡이를 당기려던 때였다. 사람들의 탄식과 기도 소리 너머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형아. 이거 가져가.”
“응?”
태유준의 허리춤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아까 마주쳤던 사내아이의 것이었다. 아이가 꼬질꼬질한 장난감 칼을 내밀었다.
“이건 네가 아끼는 거잖아.”
“형아가 괴물하고 싸우러 나간다고 들었어요. 그럼 칼이 필요해. 형아 가져가.”
“….”
“이걸로 괴물하고 싸워.”
아이는 한사코 태유준의 손에 플라스틱 칼을 쥐여 주었다. 아주 하찮고 허접해 그 무엇도 해칠 수 없는 칼을.
“소중한 걸 줘서 고마워.”
태유준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미소 지었다.
* * *
밖으로 나오자 짙은 어둠이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대한전력공단이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좀비들이 하도 올라타서인지 가로등은 깜빡이며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의지할 불빛이라고는 그것뿐이라 두 사람은 어둠 속을 더듬으며 트럭이 있는 장소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서도 ‘맛 좋은 호박고구마’라는 플래카드가 선명히 보였다.
태유준은 조심스럽게 원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저기, 플래카드는 떼면 안 됩니까?”
아무래도 저 플래카드는 지금부터 자신이 할 일들과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솔직하게 말해서 좀 창피했다. 그동안은 말할 기회가 없어서 하지 못했을 뿐, 태유준은 저 플래카드가 상당히 신경 쓰였다.
“이게 뭐 어때서?”
원혁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반문했다.
“이보다 훌륭한 위장이 어디 있어. 아무 데나 세워 놔도 자연스럽다고.”
“조금 창피….”
“창피는 무슨. 나도 처음 내 젝라렌을 잃고 이 트럭을 타게 됐을 때는 많이 쪽팔렸어. 하지만 지금은 이 고구마랑 정이 많이 들었다고. 터프한 주행감도 맘에 들고.”
원혁이 어깨를 으쓱였다.
태유준은 길게 따질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해 얌전히 트럭에 올라탔다.
“자, 그럼 어떻게 여의도로 갈지 상의해 보자. 오늘 아침 뉴스에 의하면 여전히 강북과 강남은 이동 제한 상태고 여의도는 한강에 둥둥 떠서 고립 상태야. 마포 대교 봉쇄도 그대로일 거라고 생각돼.”
“저도 굳이 마포 대교를 다시 가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죠.”
“웬만한 루트는 다 수용 가능해. 난 한강을 수영해서 건너는 것 빼고는 다 찬성이야. 내가 잠수는 잘하는데 한강은 너비가 제법 되더라고.”
원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비게이션에 서울 지도를 띄웠다. 지난번 진입을 실패한 마포 대교 옆으로 ‘원효 대교’가 보였다.
“원효 대교는 혹시 어떨까요? 열려 있을지도 모르고, 혹 닫혀 있더라도 그리로 가서 방법을 찾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음. 좋아. 원효 대교로 한강을 건널 수 있으면 그게 베스트고 아니더라도 우선은 이동하는 게 좋겠지. 한 시간 정도만 지나면 해가 뜰 테니까.”
그들은 현재 위치인 서울 서쪽 광화문에서 조금 더 중심부를 향해 움직이기로 했다.
트럭은 텅 빈 거리를 유유히 달렸다. 트럭 소리에 좀비들이 비척거리며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은 한밤중이라 힘없이 걸으며 헛손질을 해 댈 뿐, 트럭을 쫓아올 만큼 빠르지는 못했다. 사이드 미러를 보던 태유준의 시선이 한 좀비에게 닿았다.
눈이었던 자리에 안경을 쓰고 있고 체크 셔츠는 누더기가 되었다. 배낭까지 멘 채로 절뚝거리고 있는 좀비는 마치 출근길의 IT 개발자처럼 보였다.
저 남자는 평소처럼 생활하던 어느 날 좀비가 되었을 것이다. 별다를 거 없는 평범한 날에.
태유준은 팔로 자기 몸을 감싸 안았다.
저 남자는 지금 자신이 괴물이 되어 있다는 의식이 있을까? 죽어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고 이 연옥을 헤매고 있다는 걸 과연 알고 있을까.
원혁이 흘깃 유준을 쳐다봤다.
“신부님, 추워? 팔짱 꼈네.”
태유준은 헛기침을 하고 답을 한다.
“아닙니다. 그냥 좀….”
“왜?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새삼… 이 광경이 끔찍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원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끔찍하지. 여기도 저기도.”
그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어쩌겠어. 살아남아서 할 일을 해야지.”
태유준은 그 말에 사이드 미러에서 눈을 뗐다. 체크 셔츠의 좀비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그리고 희미하게 동이 트려 했다.
“조금만 더 가다가는 해 뜨겠네. 길바닥에서 아침 맞이하면 곤란한데. 지난번처럼 학원 같은 데 숨어서 밤까지 개길까?”
원혁이 고층 건물 너머 해가 솟으려 하는 지평선을 보며 혀를 찼다. 숨을 곳이라는 단어를 들은 순간 태유준의 머리를 퍼뜩 스치는 것이 있었다.
“지금 여기가 어디죠?”
“운명여대 앞 지나고 있어. 조금 더 내려가면 용산역이고.”
“용산이요? 그러면 제가 아는 곳이 있습니다.”
“뭐야. 신부님 용산에 주상 복합 아파트라도 갖고 있어?”
“아뇨. 우리랑 벙커에서 같이 지내던 은진 씨 집이 용산이에요. 안 그래도 집에 한번 들러 달라 했는데, 빈집일 확률이 높은 상황이거든요. 비밀번호를 알려 줬으니 거기서 쉬었다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태유준의 이야기를 들은 원혁은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괜찮은데? 그럼 해 뜨기 전에 도착해 볼게. 손잡이 좀 꽉 잡아. 보아하니 140까지 나오겠다.”
“140이요?!”
태유준이 조수석 손잡이를 제대로 잡을 새도 없이 차가 가속했다. 털털! 터러럭- 소리와 함께 트럭이 마구 덜컹거리며 뻥 뚫린 도로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끼이익! 동이 트기 직전, 트럭은 한 주택가의 골목길에 멈춰 섰다.
“얼른 내려.”
“하아… 하아… 주여.”
“기도는 이따 하고 빨리 내려.”
레이싱 카를 방불케 하는 속도에 태유준은 기를 쫙 빨린 상황이었다. 다리가 다 후들거렸다. 그는 원혁의 재촉에 못 이겨 차에서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