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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17화 (17/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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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배식한다고 새벽부터 지금까지 안 쉬었잖아. 엉덩이 좀 붙이고 앉아.”

“형제님. 언제 이렇게 준비하셨습니까.”

“그 전에 이거 먹고.”

원혁이 태유준을 앉힌 다음 손에 빵과 생수를 들려 주었다.

“아까 딱 보니까 본인 거 챙기는 일도 잊은 것 같아서, 내가 미리 빼돌려 놨어. 나 잘했지?”

태유준은 원혁의 배려에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형제님은 드셨나요.”

“나야 항상 잘 먹고 다니지. 난 배식할 때 무조건 내 것부터 챙겨.”

태유준이 피식 웃었다. 그가 빵을 베어 무는 동안 원혁은 가만히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리고 태유준이 빵 봉지를 깨끗이 비운 것을 확인하고 바닥을 툭툭 쳤다.

“다 먹었으니 한숨 때려.”

“덕분에 편히 쉴 수 있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태유준은 빈 껍데기들을 치우고 주섬주섬 모포 위에 자리를 잡았다. 옹송그리고 옆으로 누워 자기 팔을 베려는데, 갑자기 원혁이 옆자리에 벌렁 누웠다.

“내 팔 베고 자.”

“형제님.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시면 부담됩니다.”

그러자 원혁이 큭큭 웃었다.

“내가 싫어?”

“아뇨. 싫은 건 아닙니다.”

“그러면, 무서워?”

태유준은 자는 척 눈을 감았다.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귀찮아서가 아니라 찔려서였다.

…무섭다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신경이 쓰이는 건 맞았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저 남자에게 의지하고 있나. 저토록 위험해 보이고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를.

굳이 따지자면 민머리가 바퀴에 펑크를 내려다가 좀비로 변한 날,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날 저 남자는 손을 물릴 각오를 하고 날 구해 주었지.

누군가가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희생해 준 것은 처음이었어. 하다못해 내 양부모한테도 받아 보지 못한 희생이었으니 말이야.

하지만 아직 정체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은 데다, 그저 이해관계로 얽힌 인물일 뿐이다. 깊게 믿어선 안 돼.

태유준의 안에서 복합적인 감정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내면의 복합적인 생각과 달리 지친 몸은 노곤노곤 녹아내렸다. 원혁이 깔아 준 모포는 확실히 바닥의 냉기를 차단해 주었고 이마와 앞머리를 만지작대는 손길 역시 따뜻했다.

잠깐만. 머리를 만지작대는 손길? 이거 뭔데.

태유준이 눈을 번쩍 떴다. 그와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는 원혁의 눈이 마주쳤다.

“뭘 그렇게 놀라는 건데, 신부님.”

“아, 아니… 왜 이렇게 가까이 있으세요. 그리고 머리는 왜 만지시는 건데요.”

“난 신부님이 만져 주니까 기분 좋더라고. 그래서 신부님도 내가 한번 만져 줘야겠다 싶어서 만지는 건데.”

“전 알아서 잘 자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우리 사이 간격이 너무 가까워서 형제님께 불편함을 끼쳐 드릴 것 같으니 제가 몸을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태유준은 헛기침을 하며 벽 쪽으로 몸을 빼려 했다. 그러자 원혁이 어허, 하며 태유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 가까이 붙어 자야 따뜻하잖아. 응?”

그 말에 태유준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갈 뻔했다. 원혁의 손아귀가 지나치게 뜨거웠기 때문이다.

이 남자와 몸을 맞대고 잠들면 얼마나 따뜻할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11월로 접어든 날씨는 누군가의 온기를 빌리기에 좋은 핑계가 되었다. 하지만 한쪽 눈을 찡긋하는 원혁의 느끼한 얼굴을 보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사절합니다.”

안 돼. 위험해. 정신 차려, 요한.

태유준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위잉위잉 울렸다. 그는 결국 원혁에게서 등을 지고 누워 자기 위해 팔을 벴다.

“신부님 너무 차갑다.”

뒤에서 원혁이 중얼거렸다. 태유준은 안 들리는 척하면서 마음속으로 기도문을 읊었다.

저를 다만 유혹에서 구하소서, 하고 말이다.

* * *

그로부터 며칠은 순탄하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태유준과 원혁은 하루에 한 번꼴로 식량 사냥을 나갔다. 그때마다 건장한 남자 두어 명과 동행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마트로 가는 길과 좀비를 피하는 요령을 파악하고 나니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그러다 보니 방산 시장을 몇 차례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점점 가져오는 식량의 양이 늘어났다. 매일 벙커 안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 주고도 약간의 비축분이 생길 정도였다.

“이제는 먹을 것 때문에 비참해지지 않아도 돼.”

“적어도 구조대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 같아.”

온종일 뉴스만 들여다보며 무기력하게 누워 있던 사람들도 점차 기운을 차렸다. 사람들은 점점 더 태유준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태유준은 벙커 안의 사람들을 위해 자주 기도했다.

특히나 태유준과 자주 합심해 기도하는 것은 김은진이었다.

그들은 오늘도 강당 구석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늘따라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요. 오빠도.”

그녀는 사태가 터지던 날 가족들과 떨어져 있었다. 때문에 홀로 벙커로 도망쳐 올 수밖에 없었고, 그대로 가족들과 생이별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함께 있는 것과 외따로 있는 것은 천지 차이다. 태유준은 김은진의 심경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가족분들하고는 연락이 안 되십니까, 자매님?”

“네. 며칠 전부터 연락이 끊겼어요. 초창기에는 다 같이 집에 있다고 했는데 말이죠.”

“…무사히 계실 겁니다.”

머릿속으로는 부정적인 생각이 스쳐 지나갔으나 태유준은 애써 생각의 고리를 잘라 냈다. 지금은 그저 김은진의 가족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저만 집 밖에 나왔다가 여기로 흘러들어 왔잖아요. 전공 조사를 조금만 더 일찍 마치고 빨리 집으로 갔으면 어땠을까 후회가 돼요.”

김은진은 빨개진 눈가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제가 그때 여의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중간 지점인 여기 벙커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거든요.”

탄식 섞인 그녀의 말 중에 태유준의 귀를 잡아끄는 단어가 있었다. 여의도였다.

“좀비 사태가 벌어지던 날 여의도에 계셨어요?”

“아, 네. 제가 도시공학과라고 했잖아요. 지금 쓰고 있는 논문이 서울의 지하도라서 여의도에 갔었어요. 제가 몇 달 동안 여의도를 집중 탐사 중이었거든요. 물론 갑자기 나타난 좀비 떼 때문에 다 내팽개치고 죽자 살자 도망쳤지만요.”

“여의도 지하도요? 국회 의사당에서 여의도역까지 이어진 통로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뇨. 그건 일반 차량과 보행자들이 이용하는 공개 지하도고요. 제가 연구하는 분야는 비밀 지하 통로예요. 이런 통로들은 공개 지하도보다 한층 더 아래에 거미줄처럼 조성돼 있어요. 일반인들은 모르는 깊은 지하에 있는 길이요.”

태어나 처음 듣는 소리였다. 태유준도 장 박사를 만나러 몇 번이나 여의도에 가 봤지만 비밀 지하도에 관하여서는 보고 들은 바가 없었다.

“깊은 지하에… 길이 있다고요?”

“모르시는 게 당연해요. 전쟁 때 비밀리에 건설한 지하도라서요. 저희 연구실과 교수님은 그곳을 B2라고 부르는데, 지하 2층 이상으로 깊게 파여 있어서 그래요. 일반인들의 출입은 금지돼 있고 입구도 찾기 어렵고요.”

태유준은 그녀의 이야기에 솔깃했다. 이 정보를 더 깊게 알아 손해 볼 것은 없어 보였다.

“혹시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어요? 실은 제 목적지가 여의도입니다.”

“어머, 정말요?”

김은진이 화들짝 놀라며 입을 틀어막았다.

“저 여의도에 대해서라면 지형, 지물. 모르는 게 없어요. 신부님, 제가 자세히 알려 드릴게요.”

그녀는 도움을 줄 수 있어 다행이라며 여러 차례 눈물을 글썽였다. 그리고 서둘러 자신의 태블릿 PC를 켰다. 화면을 들여다보는 태유준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런 지도가 있다니…!”

정밀한 지도가 태블릿 PC 액정을 가득 채웠다. 문외한이 봐도 지하도의 세밀한 갈림길 하나하나를 다 챙겨 그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 100퍼센트 완성본은 아니라서 미흡한 점도 있고 오류도 있어요. 그래도 굵직한 길은 제대로 파악해 놨다고 보시면 돼요. 여기, 출입구 열 곳을 찾는 법도 표시해 뒀고요.”

김은진이 지도를 대략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가만히 보니 장 박사의 연구실이 위치한 한강변 쪽에도 출입구가 하나 있었다.

“이 모든 길이 다 통해 있다는 거죠?”

“별일이 없다면 아직 다 뚫려 있을 거예요.”

“그럼… 지하로 여의도 전역을 걸어 다닐 수 있는 거군요.”

“신부님 말씀이 맞아요.”

태유준은 답답한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설령 여의도에 도착한다 한들 좀비 떼들을 따돌리고 장 박사의 연구실까지 갈 길이 막막했었다. 하지만 이 지도를 따라 지하로 이동한다면 좀비를 맞닥뜨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은진 씨. 저한테 이 지도를 주실 수 있나요? 중요한 연구 자료인 건 압니다만, 지금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염치 불고하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연히 드려야죠. 제 생명의 은인이시잖아요. 그때 그 잔인한 그룹 가르기를 멈춰 주시지 않았다면… 전 이미 죽고 없을지도 몰라요.”

김은진은 억울함이 섞인 눈빛을 띠더니 이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도는 그림 파일이에요. 메신저로 전송해 드릴게요.”

태유준이 자신의 번호를 알려 주면서 메신저로 전송을 부탁했다. 그런데 전송을 시도하는 김은진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어, 이상하다. 왜 안 가지?”

“잘 안 되나요?”

“네. 아까까지만 해도 통신에 문제가 없었는데… 신호가 안 잡혀요. 혹시 신부님도 그러세요?”

태유준이 핸드폰을 열어 보았다. 통신사 신호가 희미하게 한 칸 정도 떴다.

“저는 완전히 끊기진 않았는데 아주 약합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이지. 이따가 라디오를 들어 봐야겠어요. 통신망에 문제가 생겼다면 뉴스가 나올 테니까요.”

김은진은 급한 대로 태유준의 핸드폰과 자신의 태블릿 PC를 블루투스로 연결했다. 무사히 지도 파일이 송수신되었다. 태유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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