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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머리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소리에 좀비가 깨어나는 기척을 냈다. 비록 눈은 없었지만 민머리는 좀비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휘릭, 하며 몸을 돌려 나무에서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사, 사람 살려!”
민머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래도 죽자 살자 일어나 달렸다. 어디가 벙커 쪽인지 분간도 못 하고 냅다 달리기만 했다. 그때, 태유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쪽입니다!”
벙커로 진입할 수 있는 굴다리 입구에 태유준이 서 있었다. 민머리는 후다닥 태유준 방향으로 달렸다. 그리고 가까스로 태유준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의 뒤에 숨었다.
“야! 이 괴물 좀 어떻게 해 봐!”
그러면서 민머리는 태유준의 등을 떠밀었다.
“헉!”
태유준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너무나 놀랐다. 이대로라면 달려오는 좀비와 정면충돌할 위기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한 손을 뻗었다.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였으나, 괴물에게 그런 신호가 먹힐 리 없었다. 오히려 좋다고 그 팔을 노렸으면 노렸지.
“으윽.”
좀비의 주둥이가 태유준의 손 바로 앞까지 다가온 순간이었다. 갑자기 휙 하고 몸이 돌아갔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가 살펴보니 태유준은 원혁의 품에 빨려들듯 안겨 있었다.
“이 새끼가!”
태유준의 귓가에 원혁의 목소리가 짙게 때려 박혔다. 그는 굉장히 노여운 목소리로 욕을 뱉은 다음 좀비의 아가리에 주먹보다 더 큰 돌을 박아 넣었다. 콱! 소리와 함께 돌이 좀비의 이빨을 깼다. 좀비는 마구 손을 휘저어 대며 경련했다.
이 와중에도 원혁의 손은 돌을 쥔 채로 좀비의 입 안에 들어 있는 꼴이라 태유준은 미치도록 겁이 났다. 혹시나 잘못했다가는 원혁의 손이 물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형제님! 위험합니다. 손 빼세요!”
“신부님은 내 등 뒤로 숨어. 어서!”
원혁은 자유로운 한 팔로 태유준을 끌어다 자기 뒤로 숨겼다. 그리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원혁의 힘에 밀린 좀비는 어쩌지도 못한 채 그대로 비틀거리며 뒤로 밀렸다.
우지끈. 좀비가 나무에 뒤통수를 박은 뒤 축 늘어졌다. 원혁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좀비의 입에서 손을 빼냈다. 태유준은 빠르게 다가와 원혁의 손을 살폈다.
“형제님!”
“안 물렸어. 괜찮아.”
“무사하시다니… 형제님…. 아, 어떡하면 좋습니까.”
“하아… 이제 괜찮으니까 진정해. 그나저나 너.”
원혁이 가로수 위에 올라가 벌벌 떨고 있는 민머리를 가리켰다.
“저… 저요?”
“그래, 너. 너 아까 좀비 달려들 때 신부님 떠밀었지?”
“아, 그… 그게. 너무 마음이 급하니까. 본의는 아니었고, 그게….”
“그래. 아까 행동은 우연이었다 치자. 너 지금 여기는 왜 나와 있는 거야? 새벽 6시에 너 혼자 왜 벙커 밖에 나와 있냐고.”
민머리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맞혀 볼까? 이유는 둘 중에 하나일 거야. 첫째, 좀비 밥이 되고 싶었다. 둘째, 우리한테 나쁜 짓을 하고 싶었다. 어느 쪽이야?”
“저, 저는 절대 그런 생각을… 안 했, 했고…! 오해, 오해입니다.”
원혁은 사시나무처럼 떠는 민머리를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가 무릎을 굽혀 바닥에 나뒹구는 송곳을 주워 올렸다.
“그럼 이 송곳을 가지고 우리 트럭 주변을 얼쩡거린 이유는 뭔데?”
“헉.”
원혁이 송곳을 빙빙 돌리며 나무 위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차에 펑크라도 내려고 했던 거겠지. 너 오늘 새벽 3시부터 부스럭거리던데? 쫓아 나오길 잘했네.”
“미… 미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저게 훔친 트럭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내 거거든. 난 내 물건 손대는 사람 용서 못 해.”
원혁이 으득, 손마디를 꺾었다. 민머리는 손을 싹싹 모아 빌었다.
“죄송합니다. 진짜 잘못했어요! 어떤 벌이든 다 받을게요. 용서 좀 해 주세요.”
“어, 그런데… 대머리, 너.”
“네?”
“뒤 좀 돌아봐야 할 것 같아.”
민머리가 뒤를 봤다. 언제 다가온 줄도 모르게, 회사원 복장의 좀비가 그의 등 뒤에 원숭이처럼 앉아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으아아악!”
원혁은 태유준의 손목을 꽉 쥐고 벙커 쪽으로 뛰었다.
“신부님, 얼른 가자.”
“형제님.”
“해가 뜨고 있어. 얼른.”
그들의 등 뒤로 해가 떠올랐다. 태유준과 원혁은 전신주 위에서 또 나무 위에서 하나둘 깨어나는 좀비들을 피해 굴다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금장치를 열고 벙커 내부로 발을 디딘 순간, 원혁은 머리를 짚고 비틀거렸다.
“형제님. 괜찮으세요?”
태유준이 사색이 되어 그를 계단에 앉혔다.
“안 괜찮아.”
“어디가…! 설마 아까 다치신 건가요.”
“아니.”
“그럼요?”
“머리가 좀 아파.”
“…네?”
원혁이 울상을 지으며 자기 머리를 가리켰다.
“이놈의 지겨운 두통. 머리 만져 줘.”
“지금 상황에 이걸 장난이라고….”
“장난 아니야. 난 진지해. 이제 신부님 손 없으면 못 살겠는데 어떡해.”
원혁은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처럼 엄살을 떨었다. 태유준은 망설였다. 진짜 머리가 아픈 건가? 아무리 봐도 장난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원혁은 이마를 짚어 달라며 연신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험악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태유준은 별달리 거절할 구실을 찾을 수 없었다. 태유준이 원혁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아, 살겠네.”
원혁이 표정을 풀며 말했다. 지끈거리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왜 그러셨어요. 위험하게.”
태유준은 원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은 지나치게 위험한 상황이었다. 태유준을 모른 척할 수도 있었을 텐데.
“신부님이 좀비 밥 되게 생겼는데, 그럼 내가 모른 척해?”
“…장 박사님 찾으러 가는 데 필요해서 구해 준 거 아니고요?”
“뭐? 신부님 말을 참 서운하게 하네. 장 박사 찾는 데 도움되는 건 맞지만 그런 이유로 구해 준 건 아니야.”
“그럼요?”
“예뻐서.”
원혁은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면박을 줬다.
“네?”
“몇 번을 말해도 모르네. 모르는 척하고 싶은 건지.”
원혁이 건들건들 몇 마디를 덧붙이는 동안, 태유준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허공에 대고 헛웃음을 지었다. 피식하는 웃음이 끝도 없이 입술 새로 새어 나왔다.
그러다가 허탈한 웃음 사이로 뜨거운 감정이 울컥, 북받쳐 올랐다. 태유준의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 주었다. 자신이 다칠 것을 각오하고 내 앞을 막아서 주었다. 이런 경험은 인생에 태어나 처음이었다.
“신부님. 울어?”
“아뇨.”
“아니긴. 눈이 빨간데?”
“아닙니다, 절대 아니에요.”
쓱쓱, 이마를 짚던 손을 옮겨 장난스럽게 원혁의 머리를 문지르며 조금 웃었다. 원혁은 성의가 없다며 태유준에게 핀잔을 줬다.
두 사람이 그렇게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 * *
며칠이 흘렀다. 민머리가 사라진 이후 벙커 안은 평화로워졌다. 다만, 길어지는 대피 생활에 사람들은 점점 지쳐 갔다.
“할머니, 죽 드세요.”
“이렇게 신세만 져서 어떡해. 너무 고마워요.”
“손자분한테도 먹이시고요. 가루에 찬물 부어서 잘 저으시면 돼요.”
“우리가 먹고사는 건 다 신부님 덕분이야. 고마워요.”
노파가 태유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메마른 손을 보며 태유준은 자기도 모르게 안타까워서 한숨이 나올 뻔하였으나 할머니의 허리에 꼭 매달려 있는 아이의 눈망울을 보고 한숨을 거두었다.
“우리 언제 나갈 수 있어요?”
“그런 거 물어보지 말랬잖아. 할미가 때 되면 나가게 해 준다고 몇 번을 말해.”
아이의 천진한 물음에 할머니는 손자를 타박했다. 태유준은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그는 여러 번 마음속으로 말을 고른 후 대답했다.
“나갈 때가 되면 문이 열릴 거야. 너무 걱정 말고 기다려.”
“그때가 언젠데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참고 기다리면 꼭 열릴 거야. 확실해.”
노아의 방주도 영원히 바다를 유랑할 듯했지만, 결국은 뭍에 닿았다.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신의 분노에도 끝이 있었으며, 온 땅에 퍼붓던 비도 끝내 그쳤다.
그러니 하늘에서 쏟아지는 좀비도 언젠가는 멈추지 않겠는가. 태유준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때 되면 이 칼로 재미있게 칼싸움도 할 수 있을 거야.”
태유준은 아이가 꼭 쥐고 있는 장난감 칼을 가리켰다. 아이가 무척 아끼는 물건인 듯, 끝이 부러지고 군데군데 흠집이 났는데도 아이는 벙커 내 어디를 가든 칼을 들고 다녔다. 자신의 원래 세상에서 가져온 유일하고도 가장 소중한 물건을.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고, 할머니 말씀 잘 듣자. 알겠지?”
“알겠어요.”
아이가 천진하게 웃었다. 태유준은 아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제는 그룹의 개념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유롭게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었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그리고 노약자에게 우선적으로 돌아간 식량에 항의하는 일도 없었다.
태유준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고 식량 상자를 정리하려 했다. 그런데 상자 안이 텅 비어 있었다. 누가 개수를 잘못 셌는지 몰라도 방금 노파와 아이에게 나눠 준 죽이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내가 먹을 게 없네….”
어쩐다. 이미 나눠 준 것을 회수할 수도 없고. 다음 끼니 상자에서 꺼내 먹자니 양심에 찔리고.
태유준이 고민에 빠져 있는 와중에 뒤에서 갑자기 누가 불쑥 나타나 인기척을 냈다. 돌아보니 원혁이었다.
“형제님.”
“신부님, 이리 와.”
원혁은 태유준의 손목을 잡고 창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애매하게 작은 방이라 사람들이 누워 자지 않는 빈 공간이었다.
“여긴 갑자기 왜….”
“앉아.”
태유준은 어둑한 방 안을 들여다보고 놀랐다. 바닥에는 언제 갖다 놨는지 모를 깨끗한 모포가 하나 깔려 있었고, 빵과 죽 그리고 생수병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