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14화 (1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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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유준과 원혁은 테이핑된 박스를 들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좀비가 보이지 않아서 두 사람은 트럭에 짐을 빨리 실을 수 있었다.

마지막 상자를 트럭 짐칸에 싣고 그들은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누어 탔다. 원혁은 느린 속도로 차를 출발시켰다. 이따금 길 위를 방황하던 좀비들이 차 소리에 반응할 때만 속력을 높였다.

“꼭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된 기분이네.”

“그런 농담은 하지 마세요. 따라올까 봐 겁납니다.”

태유준의 말에 원혁이 웃었다.

방산 시장이 점점 멀어져 갔다. 태유준은 간간이 사이드 미러를 이용해 뒤따라오는 좀비가 없는지 확인하다가 이윽고 제법 안전한 지대로 접어든 것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라디오 좀 켤게요.”

뉴스라도 들을까 싶어 태유준이 라디오 채널을 틀었다. 마침 뉴스 시작 시간이었는지 앵커의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울을 중심으로 괴한들이 소요 사태를 벌이는 가운데, 군과 경찰은 오늘 오후 마포구 일대를 소탕했습니다. 서울서부경찰청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 처리된 괴한들은 총 210여 명입니다. 한편 정부는 내일, 강남에서 괴한 밀집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진 청담역 근방에 특수 부대를 파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근본적인 타개책이 없나 보군. 좀비 떼를 한 번에 소탕할 방법이 없으니 좀비가 많은 동네마다 쫓아다니면서 그때그때 때려잡고 있는 모양이야.”

원혁이 혀를 찼다. 태유준 역시 실망스러운 기분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벌써 사태가 일어난 지도 일주일 이상 되어 간다.

다행히도 전기와 가스, 수도와 통신은 끊기지 않았지만 그것들만 빼고, 단 일주일 만에 사회의 기능은 전부 마비되었다. 시장 경제도 의미를 잃었으며, 주식이고 현금이고 따질 것 없이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이쯤 되면 인간이 좀비를 때려잡는 게 아니라, 좀비가 인간을 점령한 게 아닐까.

태유준은 힘없는 손으로 라디오를 껐다. 그러자 원혁이 카오디오에 CD를 넣었다.

“이젠 내가 듣고 싶은 노래 들을게, 신부님. 마침 트럭에 이런 게 있더라고.”

원혁이 노래를 맞춰 허밍했다. 가사를 다 알고 있는지 손가락으로 툭툭 핸들을 건드리면서 몇 소절을 따라 부르기도 했다.

“되게 옛날 노래인데, 잘 아시나 봐요?”

“아. 이거 내 자장가였어.”

태유준의 물음에 원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자장가요?”

“어릴 때 엄마가 자주 불러 주던 노래거든. 지금은 엄마가 세상에 없으니까 이렇게 남의 목소리로밖에 들을 수 없지만.”

“아… 죄송해요.”

“신부님이 뭐가 죄송해. 신부님이 우리 엄마 죽인 것도 아닌데.”

원혁은 가볍게 말했으나, 태유준은 죽음이란 개념을 무겁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신을 믿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사람이 됐다. 또한, 임종을 앞둔 자들을 찾아가 기도해 주는 봉사를 하면서 점점 생명의 무게를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니 이 속 모를 남자가 가벼이 내뱉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숨겨진 무게가 있겠지.

옆에서 태유준의 경직된 표정을 힐긋 본 원혁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심각해할 거 없어. 이미 몇 년 전에 돌아가셨고, 평범한 병사였으니까.”

원혁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문제가 있다면 약이 없는 병이었다는 거 정도.”

“아….”

불치병이었구나. 태유준은 뭐라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원혁은 정면을 보고 운전하며 담담하게 뒷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양아버지는 좋은 분이셨어. 병약한 동양인 후처를 위해서 달도 별도 따 주려는 분이셨지. 하물며 나같이 피 한 방울 안 섞인 자식한테 회사 물려준 거 보면 말 다 한 거 아니겠어?”

듣다 보니 왜 그가 미국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 태유준은 짐작할 수 있었다. 외국인 양아버지 아래서 자라면서 미국 이름을 부여받은 것 같았다.

“뭐, 굴러들어 간 돌 입장이니까 박힌 돌들한테 괴롭힘을 많이 당하기야 했다만… 다 되갚아 줬으니까 그건 됐고. 나랑 양아버지는 그저 엄마가 낫기만 기도했어. 그런데 약이 없더라.”

원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쉰 다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근데 엄마 죽고 몇 년 있다가 신약이 출시됐어. 약만 조금 더 빨리 개발되었어도, 나을 수 있는 병이었던 거야.”

“아….”

태유준이 두 손을 모았다. 너무나 안타까운 사연이었다.

“그러니 내가 카레이싱을 때려치우고 신약 제조 사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지. 아, 신약이야말로 인류의 미래다! 하면서. 그러니까 나중에 신부님도 우리 회사 주식 사. 주가 쭉쭉 오를 거야.”

“…결론이 왜 그렇게 나죠?”

두 사람이 시답잖은 대화를 하는 동안 트럭이 광화문 벙커 근처에 멈춰 섰다. 태유준과 원혁은 창문만 열어 주변을 살핀 다음 좀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물건은 트럭에 그대로 놓고 몸만 움직여 굴다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암호를 풀어 벙커 문의 잠금을 해제했다. 그런데 지하 2층으로 내려와 보니 입구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일전에 벙커 안에서 대장 노릇을 하던 민머리와 그 수하들이었다.

“뭐야. 안 뒈지고 돌아왔어?”

“객사라도 한 줄 알았는데 끈질기네. 야, 못 돌아온다에 걸었던 놈들은 내기 잊지 말아라. 물 한 병씩 내라고.”

놈팽이들은 시시껄렁한 잡담을 해 대며 빈정댔다. 그들의 얼굴에는 조소가 어려 있었다. 태유준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빈손이네. 이틀씩이나 걸려서 나갔다 왔는데 왜 빈손일까? 실패했구나, 그렇지?”

민머리에게 어필하려는 듯 개중 키가 작은 놈이 설쳐 댔다. 민머리 역시 원혁과 태유준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곧 그 웃음은 거둬졌다.

“짐이 너무 많아서 못 들고 온 것뿐이야. 힘 좋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짐을 옮겨야겠어.”

원혁이 성큼성큼 벙커 안쪽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키 작은 남자는 다리가 찢어져라 원혁을 쫓아가며 허겁지겁 말을 붙였다.

“야, 덩치. 진짜냐? 정말로 식량을 구해 왔어?”

“너희 패거리 몫은 없으니까 신경 꺼.”

“뭐?!”

원혁은 남자를 한 손으로 민 다음, 남자가 주춤하는 틈을 타 강당 한가운데에 섰다. 그 옆으로 태유준이 걸어와 자리를 잡았다.

“여러분, 식량을 구해 왔습니다. 무거운 짐을 나를 수 있는 분들은 앞으로 나와 주십시오. 상자가 여러 개라서 사람이 많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동요를 일으켰다. 진짜야? 정말로 저 둘이서 먹을 것을 구해 왔다고? 민머리 말로는 살아서 못 돌아올 거라더니, 멀쩡하게 돌아왔네. 어떻게 된 일이야.

사람들은 경계심과 당황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괴물이 가득한 바깥에서 식량을 조금도 아니고 잔뜩 가져왔다니, 이게 가능한 소리인가.

“신부님!”

와중에 벌떡 일어나는 여자가 있었다. 태유준과 이야기를 나눈 적 있던 대학원생 김은진이었다.

“무사히 돌아오셨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그녀가 때 묻은 소매로 붉어진 눈가를 닦으며 걸어 나왔다. 이틀 전보다 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보지 않아도 뻔한 상황이었다. 민머리는 또 그룹 운운하며 노약자들에게 식량을 나눠 주지 않았을 것이다.

“제가 짐 옮길게요. 돕게 해 주세요.”

“은진 씨.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우리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 오신 거잖아요. 목숨을 걸고….”

그때부터 서로 눈치만 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주로 최하위 무리인 그룹 3에 속한 이들이 많았고, 간혹 그룹 2에 속한 이들도 있었다.

“저도 돕겠습니다.”

“저도 짐을 나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주섬주섬 일어나는 것을 보며 민머리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거지 새끼들이…! 야, 늬들 맘대로 한번 해 봐. 해 보라고!”

원혁과 태유준은 씩씩대는 그를 무시하고 사람들을 인솔했다. 두 사람의 지휘하에 사람들은 식량 상자를 옮겼다. 박스가 하나 들어올 때마다 사람들은 크게 기뻐했다.

비록 굶주림에 지쳐 큰 소리로 환호하지는 못하지만, 누워 있던 노인이나 아이들도 일어나서 식량이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봤다.

“음식과 나무젓가락, 물, 휴지를 가져왔습니다.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 드리고 싶지만 우선은 노약자부터 챙기고 남는 것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노인, 아이를 데리고 계신 분, 그리고 여자분들은 이쪽으로 줄을 서 주십시오.”

그들이 곧 그룹 3이었다. 태유준은 노약자들을 구석에 모아 놓고 식량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손에 먹을 것을 쥐고 울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신부님. 정말 고맙습니다.”

“굶어 죽을 것 같았는데…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여자와 노인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으며, 꾀죄죄한 어린애들은 뭐가 뭔지 모르고 과자를 다 먹고는 봉지 안에 든 장난감을 조립하며 놀았다. 김은진은 빵을 한 입 먹다가 울고, 태유준이 건네는 멸균 우유를 마시다가 또 울었다.

“이 은혜는 어떻게든 갚을게요. 너무 고맙습니다.”

“은혜라니요. 그렇게 생각하실 이유 없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그룹 3과 태유준, 원혁이 음식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그룹 2 구성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불안과 부러움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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