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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님, 그만하고 쉬시죠. 밤이 되면 움직여야 하니까요.”
태유준은 대화를 일축하고 남은 빵을 먹어 치웠다. 공장제 빵이라 유통 기한이 찍혀 있었는데 이미 며칠이나 지나 있었다. 좀비 사태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이다.
바스락. 빵 봉지를 움켜쥐는 태유준의 손길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여전히 박사님과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무사하실 확률이 점점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태유준은 쉬는 와중에도 간간이 시간을 체크하고 바깥이 얼마나 어두워졌나 블라인드 틈새로 확인을 했다. 8시가 넘어가자 확실하게 바깥이 캄캄해졌다.
“어두워졌네, 신부님. 다시 그 마트로 가도록 하지.”
두 사람은 주섬주섬 배낭을 멨다. 태유준은 불과 수 시간 전 좀비와 난투극을 벌였던 장소로 되돌아가기가 꺼림칙하고 겁이 났다. 하지만 매장 내부 구조를 아는 곳에서 식량을 수급하는 게 유리했다. 또, 식품들의 위치를 대강 파악해 놓았기에 수거만 잘하면 굉장히 훌륭한 식량 사냥이 될 수 있었다.
난 지금 살인을 하러 가는 게 아니야. 괴물을 해치우고 인간을 먹이러 가는 것이지.
태유준이 마음을 다잡는 동안 원혁은 대놓고 무기를 갈고닦았다. 배낭에서 식당용 가위를 꺼내 포장을 벗기고 있었던 것이다. 날이 잘 갈린 새것이라 번쩍거리기가 칼 같았다.
“그걸로 싸우시려고요, 형제님?”
“아까 도마로 잘 싸우긴 했지만 가위도 하나 있어서 나쁠 거 없지. 이거 가져가.”
원혁이 태유준에게 가위를 건넸다. 원혁은 가위를 손잡이 쪽으로 돌려 건네는 매너를 선보였다. 조심스럽고 정중한 손길에 태유준은 피식 웃었다. 좀비 물리칠 가위를 이렇게 예의 바르게 건넬 일인가.
원혁은 중식 칼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허리춤에 칼을 꽂고 있자 그는 더욱 위협적으로 보였다.
“그럼 한탕 하러 가 보자고. 신부님.”
“네.”
휴게실 문을 열고 나간 두 사람은 등을 맞대고 좌우를 살폈다. 학원 건물 내부도 어두웠기에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도 태유준은 각별히 조심하며 원혁의 뒤를 따랐다.
발소리를 죽이고 걸은 끝에 비상구가 나왔다. 원혁은 아까 감아 놓았던 쇠사슬을 해체해 가방에 다시 집어넣었다.
하나. 둘. 셋.
그들은 입모양으로 숫자를 센 다음 단번에 문을 열었다. 휑한 가을의 바람이 안쪽으로 스며들어올 뿐 다행히도 바로 눈앞에 좀비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는 비극은 없었다.
꿀꺽. 태유준은 마른침을 삼키고 어둠이 내린 거리를 면밀히 살폈다. 길 건너에 비척거리며 느리게 이동 중인 좀비가 두어 마리,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려는지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좀비가 세 마리 정도 보였다.
눈깔이 없으니 안 보인다는 원혁의 주장이 사실인지 한 좀비는 태유준과 원혁이 나무 바로 밑을 지나가는데도 눈치채지 못하고 거꾸로 매달리느라 바빴다. 다만 코를 벌름거릴 때는 소름이 끼쳤다. 그나마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는 게 두 사람으로서는 다행이었다.
태유준과 원혁은 숨소리조차 자제하며 다시 방산 시장 안으로 진입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 삼보 식자재 마트 앞을 살피니 두 팔을 앞으로 뻗고 “꾸에…에엑….”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맴도는 좀비가 한 마리 보였다.
원혁이 손으로 직진 표시를 했다. 태유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나타냈다. 오밤중의 느려 터진 좀비 한 마리 정도는 감수해야 할 사항이었다.
그들은 좀비와 불과 몇 미터 간격을 두고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마트 안으로 들어갈 때 짤랑, 하고 손님의 입장을 알리는 벨이 울릴 것이므로 태유준은 미리 빈 우유갑을 준비했다.
그리고 문을 엶과 동시에 최대한 멀리 우유갑을 던졌다. 짤랑, 소리와 툭! 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좀비는 어느 쪽에서 소리가 났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 모가지만 꺾어 댔다. 원혁이 태유준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려 주었다.
무사히 잠입에 성공한 그들은 지난 새벽 물건을 담던 동선을 다시 한번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개판이 된 종이 상자를 새로 포장하고, 나무젓가락과 물티슈 같은 소소한 물건들을 확보해 한 군데로 모았다.
“신부님은 저쪽 레토르트랑 통조림 코너 맡아서 싹쓸이해 와 줘. 나는 여기 떨어진 것들 주워 담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태유준은 빈 상자 하나를 가지고 레토르트 식품이 가득한 선반으로 향했다. 그는 지난 새벽 찜해 놓았던 가루 죽, 실온 보관이 가능한 두유 종류, 레토르트 파우치류를 조용히 담았다.
다음은 통조림 차례였다. 빨리 여러 개를 쓸어 담아야겠다는 생각에 태유준은 품에 참치 캔을 잔뜩 안아 들었다. 느긋하게 쇼핑할 시간이 없어. 빨리 상자 채우고 다음 상자 가져와야지.
태유준은 스피드를 더하며 선반에서 참치 캔을 꺼냈다. 소리는 내지 않으면서도 많은 양을 빠르게 담아야 했기에 그의 손길은 섬세해졌다. 하지만 마음이 너무 급한 게 문제였을까. 캔 하나가 땡그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헉.”
순간 진땀이 흘렀다. 태유준은 본능적으로 가게 입구를 봤다. 아까 입장할 때 봤던 좀비가 가게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고 두 팔을 쭉 뻗는 게 보였다. 좀비는 특이하게도 국방색 점프 슈트를 입고 있었는데, 얼굴이 다 썩어 문드러져 귀신 들린 군인처럼 보였다.
이런. 바깥까지 들렸나 보다.
태유준은 야구공 쥐듯이 참치 캔을 단단히 쥐었다. 그러는 사이 좀비는 손님이라도 된 듯 문을 열고 들어와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킁킁댔다. 그리고 이내 태유준 쪽으로 삐걱이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선제공격이다!
태유준은 참치 캔을 있는 힘껏 던졌다.
퍽! 퍽!
태유준은 엉성한 투수처럼 참치 캔을 마구 던졌다. 몇 개는 좀비의 눈두덩이나 이마를 맞혔으나, 몇 개는 빗나갔다. 별 타격을 입히지 못한 것이다.
“껙!”
맞을 때마다 아프기는 한 모양인지 좀비는 앙상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가까이 오지 마!”
아무리 네가 괴물이라도 살상은 싫단 말이다. 더 이상은 피를 뒤집어쓰고 싶지 않다고!
태유준은 이를 너무 악문 나머지 턱이 아플 지경이었다. 하지만 좀비가 그런 그의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참치 캔 세례를 받으면서도 좀비는 기괴하게 다리를 꺾으며 다가왔다.
“으윽…!”
좀비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결단을 내릴 시간이 왔다. 이제는 참치 캔으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태유준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아까 원혁이 준 가위가 잡혔다.
“신부님!”
맞은편, 즉 좀비의 등 뒤에서 원혁이 달려왔다. 그가 순식간에 달려와 좀비의 양팔을 꽉 붙들었다.
“지금이야!”
태유준은 한껏 힘이 들어간 손으로 가위를 꺼내 좀비의 목덜미를 노렸다. 놈이 점프 슈트를 입고 있는 탓에 드러난 부위가 많지 않았으나, 태유준은 집중력 있게 좀비를 겨눴다. 처단은 단 몇 초 만에 끝났다. 좀비는 나무 막대기보다도 뻣뻣하게 쓰러졌다.
쿵. 좀비가 옆으로 쓰러지며 점프 슈트의 앞섶이 흐트러졌고, 시커먼 목덜미가 드러났다.
“어…?”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태유준의 시선이 좀비의 목으로 향했다. 목에는 로마 숫자로 7이 크게 박혀 있었다.
문신은 유난히도 검고 짙어, 새긴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태유준은 이 좀비 또한 얼마 전까지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는 생각에 찝찝함과 징그러움을 느꼈다.
“수고했어.”
“고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태유준은 피가 몇 방울 튄 얼굴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원혁에게 고개를 숙였다. 원혁은 선반에 있던 행주를 꺼내 가위 날을 닦으며 웃었다.
“신이 아니라 나한테 먼저 감사 표시를 하네?”
“네?”
“주여, 감사합니다. 아멘 소리부터 할 줄 알았는데 아니군.”
“그야 당연히 이 상황에서는… 그쪽이 우선입니다.”
원혁은 기분 좋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발치에 있는 좀비의 머리를 한 번 툭, 차고 가위를 태유준에게 돌려주었다.
“이게 뭐야. 목에 문신을 했네? 우리가 힙한 좀비를 해치웠군.”
원혁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두 사람은 다시 식량을 갈무리했다. 원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상자를 포장하며 느긋하고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기분 또한 좋아 보였다.
“…형제님은 좀비들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나? 왜 무서워해. 얘네 다 죽었는데.”
“죽은 자들이 살아 돌아다니는데 두렵지 않냐는 말씀입니다.”
“죽었으니까 안 무섭다고. 산 사람이 훨씬 무섭고 악랄하지. 신부님은 그것도 몰라?”
원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산 사람이 더 무서운 존재라는 원혁의 말은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어릴 적 원혁은 지금과 달리 체구가 작았다. 그 사실은 양아버지의 아들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못된 형제들은 원혁을 작은 캐비닛에 가둔 다음 열어 주지 않겠다며 겁을 줬고, 귀신 이야기를 하며 잠을 깨웠다.
커 가면서 괴롭힘은 더욱 악랄해져 목숨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사냥 놀이를 하자며 원혁을 끌고 나가 실수인 척 죽이려 한 적도 있다. 가까스로 구조되어 병상에서 깨어난 원혁은 맹세했다. 나를 해치려 하는 자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고. 그리고 원혁은 그것을 실천에 옮겼다.
사실 원혁의 말에는 태유준도 동감하는 바였기에 입을 다물었다. 그래. 산 사람, 하다못해 독실한 사제들이 더 무섭다는 걸 불과 며칠 전에 잘 알게 되지 않았는가. 거슬러 올라가면 저를 거두어 ‘자식’처럼 키우다가 ‘악마의 자식’이라며 내친 자들이 있었고 말이다.
“그 무서운 산 사람들한테 식량 가져다주러 갑시다.”
“좋아. 최대한 조용히 상자 들고 나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