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내려와-12화 (12/93)

[email protected]

두 사람은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원혁이 간단하게 씻고 와 먼저 당번을 섰다. 태유준은 딱딱한 간이침대에 몸을 뉘였다. 하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신부님은 졸리지도 않아?”

“…네. 피곤해서 금방 잠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요.”

“하긴. 밖에 좀비가 우글거리는데 쿨쿨 자면 그것도 이상하지.”

“벙커 안에서 우릴 기다릴 사람들도 걱정되고, 구조를 못 하고 있는 걸로 봐서 정부 상황도 많이 나빠졌으리란 생각도 들고, 앞으로 우린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도 들고….”

태유준은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뭣보다도 박사님이 걱정됩니다.”

태유준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댔다.

장 박사 생각을 하다 보니 그가 원혁에게 보낸 소포의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태유준의 손을 거쳐 얼렁뚱땅 미국까지 배달되었던 그 상자 안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었기에 원혁이 여기까지 달려온 것일까.

“저기, 형제님.”

“응.”

“혹시 제가 물어보면 뭐 하나 대답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뭔데.”

“…장 박사님이 미국으로 보낸 우편은 대체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태유준은 조심스레 물었다. 답해 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원혁은 의외로 순순히 대답을 내놓았다.

“신약에 대한 연구 자료.”

“신약이요?”

“그래. 장 박사 전매특허, 항바이러스 치료제의 설계도 중 일부였어.”

장 박사는 오랜 시간 바이러스를 연구해 온 전문가였다. 특히나 새롭게 창궐하는 바이러스를 연구하고 그 특성에 맞는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이 주특기였다.

“혹시 무슨 바이러스에 관한 약이었습니까?”

“그건 모르지. 보통 바이러스들은 구조도를 그릴 수가 있거든? 사람들 눈에는 징그러운 벌레나 기계처럼 생겼는데….”

원혁이 손을 펼쳐 세 손가락을 접었다.

“약을 개발할 때 필요한 정보가 세 가지 이상 빠져 있었어. 신약 연구 자료에는 당연히 그 바이러스에 대한 설명과 특성, 구조도가 들어가 있어야 해. 그런데 그게 없이 약을 만드는 공정만 일부 들어 있더라고. 난 미완성된 신약 레시피에서 많은 뉘앙스를 읽었어.”

“뉘앙스라고 하면 어떤 것입니까.”

“편지를 보낸 사람은 내가 그 치료제를, 아니, 바이러스를 궁금하게 만들고 있었어. 그렇게 부분적인 자료를 비밀 주소로 보내왔다는 점도 그렇고. 내 주의를 끌기 위해 안간힘을 끄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주의를 끈다라. 태유준으로서는 그 의미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장 박사와 원혁은 두통약 연구를 위해 몇 년 전에 잠깐 협업했을 뿐 그 이후로는 접점이 없는 사이라고 했다. 친밀하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은 제삼자인 것이다. 어째서 장 박사는 하필 원혁에게 신약 개발 자료를 보낸 걸까.

어떻게 된 게 파고들수록 미스터리가 한층 더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 * *

태유준은 선잠을 자다 눈을 떴다. 원혁이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피곤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이었지만 어차피 푹 잘 것도 아니었기에 지친 몸을 일으켰다.

“신부님, 깼으면 밥이나 먹자.”

“아, 네. 배낭에 챙겨 온 게 있습니다.”

태유준도 하루 넘게 굶어 배가 고팠다. 그가 휴게실 의자에 벗어 둔 배낭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혹시 몰라 제 배낭에 레토르트를 좀 싸 왔습니다.”

“뭐 뭐 있어?”

“5분 카레랑 인스턴트 밥… 이건 전자레인지에 돌려야 하는데 전자레인지가 없으니 어렵겠고요. 아, 이게 좋겠네요. 물만 부어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죽. 빵도 두 개 있습니다. 멸균 우유랑요.”

“언제 이렇게 많이 챙겼어?”

“어려서부터 짐을 많이 싸 봐서, 제가 이런 건 제법 합니다.”

태유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원혁에게 음식을 건넸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처연한 눈매에 원혁의 시선이 길게 머물렀다.

“왜 계속 쳐다보시죠? 여기, 받으십시오.”

“아, 어. 그래.”

나무젓가락과 숟가락은 미처 챙기지 못했기에 맨손으로 음식을 먹어야 했다. 다행히 죽은 물만 부어 불려 먹는 스타일이라 그릇째로 붙잡고 꿀꺽꿀꺽 마실 수 있었다. 먹을 것이 한번 들어가니 그동안 억눌려 왔던 허기가 몰려왔다.

태유준은 빠르게 죽 그릇을 비우고 빵 봉지를 뜯었다. 빵을 오물거리면서 멸균 우유를 한 모금 마시는데 갑자기 원혁이 손을 뻗어 왔다.

“헉.”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원혁을 피했다. 그러자 원혁이 사납게 인상을 구겼다. 쫄아 붙은 태유준은 원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형제님. 부족하다면 제 것을 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제 손에 들린 빵 봉지를 스윽 내밀었다. 원혁은 헛웃음을 지었다.

“내가 남의 식량이나 빼앗아 먹는 사람으로 보여? 물론 그런 짓 평생 안 하리란 보장은 없지만… 여기 빵 부스러기 묻어서 떼어 주려고 한 건데.”

“네?”

“여기.”

원혁이 태유준의 아랫입술을 거칠게 문질렀다. 태유준의 얼굴이 빨갛게 불타올랐다. 너무 부끄러웠다. 상대를 탐욕 많은 인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 부끄러웠고, 내심 원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들킨 것도 수치스러웠다.

“안 뺏어 먹고 안 잡아먹어. 안심 좀 해.”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이것도 먹어.”

원혁은 제 몫의 빵을 내밀었다. 태유준은 그야말로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

“너무 잘 먹길래 내가 특별히 양보하는 거야.”

“…갚겠습니다.”

“신부님 갚을 거 많네. 나 데리고 온 값이랑, 빵 하나 확실히 달아 둘게. 내가 빚지고는 살아도 빚 떼이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그러세요.”

얼마나 뜯어먹으려고 그러나. 뭐, 한 100만 원? 사장이면 돈 씀씀이가 다를 테다. 설마 수천만 원을 부르진 않겠지? 나 돈 없는데. 태유준은 통장 잔고를 떠올리며 빵 포장을 벗겼다. 물론 돈으로 좀비도 죽일 수 없고, 음식도 살 수 없는 이 시국에 돈이 다 무슨 의미겠냐마는.

한 입 베어 물자 고소한 빵 맛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어쨌든 간에 맛은 좋았다.

태유준의 생각과 달리 원혁은 은근슬쩍 태유준의 손을 다시 한번 두통약 치료제로 쓸 생각이었다. 서로의 생각을 모르는 두 남자는 동상이몽 간에 식사를 마쳤다.

“아, 고구마 먹고 싶다.”

원혁이 중얼댔다.

“드시면 되잖아요.”

“아냐, 내가 말하는 고구마는 아주 상징적인 거야. 모든 좀비 사태가 끝나고 신부님하고 나랑 평화롭게 고구마나 구워 먹는 거지. 적들을 물리치고 해피 엔딩을 맞이한다, 이런 느낌으로.”

“고구마만 먹으면 목 메실 텐데요. 곁들일 음료는 없어요?”

“칵테일.”

“칵테일이요? 안 어울리는데. 하필이면 왜 칵테일인가요?”

원혁은 낡은 소파에 팔을 펴 몸을 늘어뜨리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마치 휴양지에서 선 베드에 기대어 눕는 사람 같았다.

“내 평소 꿈이 그거였거든. 아주 완벽하고 아름다운 바닷가 휴양지에서 내 이상형인 미인과 칵테일 마시기.”

“재력이 있으시니 충분히 실천 가능하실 것 같습니다만.”

“휴양지나 멋진 바다는 많이 가 봤는데 미인이 곁에 없었어. 지금은 찾았지만.”

“…설마 절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시겠죠.”

“알아서 생각해.”

원혁이 멸균 우유로 칵테일 잔 들어 올리는 시늉을 했다. 태유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신부님은 어떤 술 좋아해?”

태유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명백한 무시의 제스처였다. 그러자 원혁은 흠칫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마셔 본 적 없는 건 아니겠지? 성직자들은 평생 술 담배를 멀리한다던데, 신부님도 그런 케이스?”

원혁은 대놓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마치 태유준이 술을 일절 마시지 않기를 기대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태유준은 여태껏 살아오며 저런 눈빛을 여러 차례 받아 본 적 있었다. 너는 깨끗해, 너는 순결하지? 그런 류의 눈빛 말이다.

“아뇨. 저 마셔 본 적 있습니다.”

굳이 나서서 내가 네놈의 환상을 깨 주마. 태유준은 지지 않겠다는 듯 정색하며 대답했다.

“진짜요? 의외인데. 언제 마시고 다녔어.”

“저에게도 방황하는 어린양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태유준은 그렇게 말하며 멸균 우유를 쪽 들이켰다. 원혁이 턱을 괴고 태유준의 젖은 입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방황하는 어린양이라. 신부님하고 어울리진 않군.”

“어울리고 말고가 어디 있나요. 방황하면 하는 거지.”

스무 살이 되던 그해. 가족이라고 믿었던 이들에게 버림받은 태유준은 심하게 방황했다. 술은 그때 배웠다. 독한 술도 많이 마셔 봤다.

“지금은 미사 집전 때 필요한 포도주 외에는 냄새도 안 맡습니다.”

“이런, 안타깝네. 그럼 데낄라 선라이즈도 못 마시고 산다는 건데. 나중에 나랑 한잔해.”

“제가 그쪽이랑 왜 한잔합니까. 장 박사님 찾으면 서로 갈 길 가야죠.”

“신부님이랑 휴양지 가서 데낄라 선라이즈 마시면 진짜로 최고일 것 같은데….”

도대체 뭐래? 아까는 미인과 흥청망청 칵테일을 마실 거라더니. 꼭 나를 옆에 끼고 마실 것처럼 이야기하고 앉아 있잖아?

태유준이 가볍게 눈을 흘겼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저는 미사 집전 때의 포도주를 제외하고 그 어떤 술도 손대지 않을 겁니다.”

원혁은 한발 물러나듯이 빈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뭐, 일단은 그렇게 살아왔으니 거부감이 들 만도 하네. 그나저나 신부님하고 와인이라. 잘 어울리는데?”

그러면서 원혁은 태유준을 빤히 쳐다봤다. 무언가를 상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 보면서 무슨 생각 하십니까.”

“별 건 아니고. 신부님하고 와인이 얼마나 어울리는지 상상하고 있었어.”

“어울리는 건 또 뭡니까.”

“신부님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하얗잖아. 거기에 붉은 와인이면 끝내준다, 뭐 그런 소리지.”

태유준은 이 작자가 대체 무슨 장면을 상상하는 건지 감도 안 잡혔다. 더 이상 술에 대한 대화를 이어 가 봤자 이득이 없을 것 같았다.

0